<138화>
상위 군락은 여타 하위 놈들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큰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생식 능력도 뛰어났으며 동시에 지능과 통제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그만큼 기동적인 면에서는 진화형 군락과 비교해 무척이나 떨어진다.
극독이나 다름없는 치료제를 두 발이나 맞았으니 그리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을 터.
한시라도 빨리 뒤를 밟아 지겹기 짝이 없는 상위 군락의 숨통을 끊어놓아야 했다.
푸욱! 푹!
나는 떠나기 전, 대원들이 파묻혀있던 폐허 부근을 뒤져 분실한 장비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개인화기인 소총과 함께 탄알집 두 개, 수류탄도 두 개나 찾아냈다.
주입기랑 확산 폭탄이 없는 게 아쉬었지만, 최소한 무기라도 건진 게 어디인가.
철컥!
약실 속 흙먼지를 털어내고 기능 점검을 끝낸 나는 탄알집을 넣어 장전을 끝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약품 케이스를 꺼내 치료제 개수를 세었다.
‘3개.’
지난 고성 작전 이후로 치료제 여유분은 항상 3개 이상 들고 다니게 했다.
물론 면역인 내게는 필요 없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 치명적인 무기가 되어줄 터.
나는 치료제를 언제든지 뽑을 수 있도록 챙겨 넣은 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기둥을 무너트린 게 효과가 상당했는지 군체는 상층 전체가 무너져내려 있었다.
그 파편 아래에는 수많은 감염체와 진화형 군락이 온몸이 뭉개진 채 깔려있었다.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본 나는 조심스럽게 폐허를 빠져나와 군체 밖으로 나섰다.
끼이이이익-!!!
그 순간 찢어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진화형 군락 하나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교란기가 없잖아.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노리쇠를 전진시켜 총을 쏘려 했다.
콰직! 푹!
하지만 놈은 이쪽이 아닌 반대쪽으로 달려들어 다른 감염체를 공격하고 있었다.
끼이이익!
마찬가지로 감염체 놈들 또한 머리가 돌아버렸는지 군락과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기어코 머리까지 썩어버린 걸까?
졸지에 숨어서 이를 지켜보게 된 나는 진지한 얼굴로 놈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곧 군락과 감염체가 서로 싸우기 시작한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통제력이 약해졌다.’
상위 군락이 쇠약해짐에 따라 둥지 전체를 아우르던 군집 통제력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에 가장 숫자가 많은 감염체 무리가 그만 통제를 잃고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
군락은 이를 막기 위해 둥지 사방에서 놈들을 말 그대로 손수 ‘폐기’하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나는 자세를 낮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둥지 공터를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여전히 왼쪽 눈 흉터를 자극하는 감각을 따라 상위 군락을 추격했다.
잠시 뒤 미로와 같은 수많은 통로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출구다.’
이 통로 중 하나에 둥지 밖과 직통으로 연결된 출구가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의 흐름을 따라 유난히 크고 튼튼한 통로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위 군락으로 추정되는 흔적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찐득.
치료제로 인해 녹아내린 살점과 마치 형광 물질을 연상케 하는 냄새 나는 핏물.
그 옆으로는 진화형 군락이 남기고 간 거대한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두 마리다.’
이동 능력이 없는 상위 군락을 대신해 하위 개체가 본체를 둥지 밖으로 옮기고 있다.
감염체 웨이브는 물론 군락만 수백 마리씩 거느리던 놈이 겨우 둘뿐이라니.
이 정도면 치료제 한 발에 즉사는 물론 완전히 소멸시킬 수도 있을 정도다.
또 한 번 가능성을 엿본 나는 놈들이 지나간 통로를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거의 반쯤 꺼져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유독가스 수치를 확인한 나는 아예 쓰고 있던 방독면을 벗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목 아래로 피와 땀이 섞인 액체가 후두둑 떨어지자 갑자기 서늘한 한기가 몰려왔다.
탁! 탁! 탁!
오직 놈을 죽여야 한다는 맹목적인 일념 하나로 한계인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속도에 점차 가속이 붙기 시작했고, 왼쪽 눈 흉터도 가까워지는 표적을 알려주었다.
어두운 통로를 가로질러 보이는 설국, 저 끝에 둥지 밖과 연결된 출구가 보였다.
치지직, 치익!
그 순간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질적인 소음 하나가 나를 자리에 멈춰 서게 했다.
아니, 단순한 소음이라기보다는 잡음이나 이명 쪽에 더욱 가까워 보였다.
나는 그대로 자세를 낮추며 소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조심히 고개를 내밀었다.
“……!”
둥지 바로 앞에는 유난히 거대한 진화형 군락 두 마리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특히 한 놈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살덩이를 품에 안은 채 안절부절못했다.
상위 군락이다.
존재감이 너무 미약해 순간 못 알아볼 뻔했지만, 저건 상위 군락이 분명했다.
끼기기기기긱!
서로 의견 대립이 일어났는지 진화형 군락들은 기어코 흉측한 이를 드러냈다.
덕분에 들키지 않은 나는 높이가 있는 출구 위에서 공격할 타이밍을 엿보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무기를 모두 갖추고 있어도 벅찬 진화형 군락을 과연 혼자서 처리할 수 있을까.
살고 싶으면 빨리 도망치라 외치는 본능 앞에서 나는 어느새 망설이고 있었다.
꾸욱.
하지만 여기서 도망치면 죽어 나간 이들의 희생이 모두 헛수고가 되어버린다.
그 꼴을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나는 잠시 흔들렸던 각오를 다잡았다.
후우.
현재 진화형 군락을 공격 한 번으로 죽일 구 있는 방법은 오직 이 조그마한 치료제뿐이다.
나는 고민 끝에 소총은 일단 등에 메고 치료제와 토마호크를 뽑아 자세를 취했다.
탁!
다리에 힘을 주고는 달리기 선수처럼 바닥을 박차고 뛰쳐나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후웅!
순간 불어오는 거센 돌풍과 함께 온몸으로 부유감이 느껴지고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표적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서 있는 진화형 군락 하나, 정확히는 놈의 머리였다.
끼익?
한참 다른 동족과 으르렁거리던 군락들은 내 존재감을 느끼자마자 깜짝 놀랐다.
후웅!
하지만 안타깝게도 허공으로 떠오른 나는 이미 토마호크를 힘껏 휘두르고 있었다.
콰직!
날카로운 도끼날이 정확히 놈의 머리 바로 옆인 오른쪽 어깨를 파고들어 고정되었다.
끼이이이익!
순간 고통을 느낀 군락은 깜짝 놀라며 이쪽으로 날카로운 팔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 타이밍에 맞춰 나는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숙였고 곧 목에 매달렸다.
공격 리치가 길다는 장점은 반대로 이런 상황에선 놈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미리 준비해둔 감염체 치료제를 꺼내 힘껏 찔렀다.
푸욱!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정확히 놈의 오른쪽 눈을 관통해 치료제 물질을 주입했다.
졸지에 기습 공격을 당한 군락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흔들었다.
젠장!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만 무게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큭!”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군락이 난동을 부리는 위험 지역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등에 메고 있던 소총을 꺼내 앞으로 겨눴다.
끼이이이이익!
아니나 다를까, 동족을 잃은 나머지 군락이 분노를 터트리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총구를 옮겨 놈의 머리가 아닌 오른쪽 가슴팍을 향해 총을 쐈다.
투다다다다다!
한 마리는 기습당해서 죽고 나머지 한 마리는 상위 군락을 끌어안고 있는 상태다.
그 말인즉슨 급소가 두 개라는 것.
나는 참 비열하게도 놈이 아닌 품에 안겨있는 상위 군락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끼이이이익!?
총알이 빗발치자 깜짝 놀란 놈은 서둘러 상위 군락을 보호했고 곧 뒤로 물러났다.
적의 죽음이냐, 아니면 어미의 보호냐. 망설이는 사념이 여기까지 전해져왔다.
찌르르!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놈은 결국 상위 군락을 안고 뒤쪽으로 도망쳐버렸다.
탁!
물론 이를 예상했던 나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군락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역전되어버린 상황.
나는 사냥꾼이 되어 사냥감을 미친 듯이 쫓아갔다.
후욱, 후욱!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폐부는 당장 산소를 삼키라고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몸을 학대하며 점차 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 속도는 이성이 날아간 나조차 비이상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너무나 빨랐다.
끼익?!
설마 뒤를 잡힐 줄은 몰랐던 진화형 군락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삐이이이이!
이명이 몰려온다. 터질 것 같은 심장 박동과 함께 시야가 좁아지고 있었다.
나는 즉각 총구를 들어 허겁지겁 도망치는 군락의 발목을 노리고 총을 쐈다.
드르르륵!
총알은 정확히 오른쪽 아킬레스건을 관통해 근육과 힘줄을 너덜거리게 만들었다.
놈은 그대로 무게 중심을 잃고 나자빠지며 높이 쌓인 눈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끼이이이이익!
감히 인간 따위가!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군락은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그 분노 속에서 차마 숨기지 못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읽었다.
철컥!
마지막 남은 탄알집을 침착하게 끼워 넣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놈도 이제 도망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흉측한 이를 드러내며 몸을 돌렸다.
마침 눈보라가 거세게 분다.
땅과 하늘 그리고 이 드넓은 설원마저도 모두 새하얀 백지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또 한 번 찾아온 겨울 앞에 겸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끼아아아아악!
그 순간 군락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뚫고 달려와 팔을 휘둘렀다.
후웅!
하지만 나는 도리어 안쪽으로 파고들며 공격을 피했고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투다다다다다!
1m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총알이 놈의 복부와 가슴팍을 난자했다.
품에 안긴 상위 군락은 끔찍한 고통을 호소했고 녹색 피와 살점을 떨어트렸다.
더 집요하고,
더 악랄하게!
아주 치가 떨릴 만큼 붙고 피하고 또 붙으면서 정말 끊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진화형 군락은 쉽사리 당해주지 않겠다는 듯 기어코 반격을 가해왔다.
서걱!
미처 피하지 못한 날카로운 손톱이 왼쪽 어깨를 깊숙이 찌르고 지나갔다.
나는 뿜어져 나오는 핏물을 틀어막으며 본능적으로 소총을 위로 들어 올렸다.
콰직!
아니나 다를까,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군락이 반대편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몸을 대신해 맞은 소총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 여파로 내 몸은 허공 멀리 날아갔다.
털썩!
충격이 엄청나다. 순간 사지가 끊기는 고통이 전해지다 못해 의식이 끊길 뻔했다.
너덜너덜한 그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이미 패배한, 아니 죽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끼긱! 끼이익! 이에 군락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회다.’
하지만 나는 놈이 승리를 자신하는 사이 손가락을 품에 넣어 꼼지락거렸다.
그 안에는 마지막까지 꺼내지 않았던 파열 수류탄 두 개가 숨겨져 있었다.
끼이이이익!
그 순간 놈이 또 한 번 눈보라를 뚫고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한걸음 가까워지는 놈을 노려봤다.
‘할 수 있어.’
마지막 힘을 쥐어짜 손가락으로 안전 클립을 제거하고 고정되어있던 핀을 뽑았다.
핑!
그리고 중지와 약지 끝에 힘을 빼자 안전고리마저 피잉! 빈 허공으로 떠올랐다.
일촉즉발의 순간, 나는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긴 채 들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다.
퍼어어어엉!
시간이 정확히 3초 지연된 수류탄은 달려오던 군락 바로 앞에서 폭발했다.
끼아아아악!
졸지에 파편으로 얼굴이 짓뭉개진 놈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끼익?
하지만 그곳에는 내가 아닌 또 다른 수류탄 하나가 또르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콰아아앙!
폭발이 일어났다. 온몸이 파편으로 너덜너덜해진 놈이 드디어 무게 중심을 잃었다.
쿵!
하나는 놈한테 던져 시야를 가리고, 하나는 제자리에 떨어트리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치익!
목숨을 판돈으로 걸었던 나는 어느새 눈보라를 뚫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끼이익!
이미 두 번이나 공격당했던 군락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먼저 보호하려고 했다.
달칵!
하지만 나는 놈이 아닌 공포에 덜덜 떨고 있던 다른 존재를 향해 달려들었다.
찰나의 순간, 손에 쥐고 있던 감염체 치료제가 정확히 상위 군락을 찔렀다.
푹!
그러자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을 멈추지 마.’
나는 비명을 지르는 군락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힘겹게 뜨고 있던 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