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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39화 (139/180)

<139화>

가까스로 동두천 방어에 성공한 서울-강릉 연합군은 서둘러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무너진 방어선을 재건한 것이 아니라 연천으로의 진격을 준비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단 하나, 상위 군락이 있는 레드존까지 계속 북진하는 것.

모루 역할인 연합군이 상위 군락의 시선을 끌어주어야만 박범석이 무사할 수 있다.

김태하 소장은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전면 공격을 강행하려고 했다.

끼이이이이익-!!

하지만 기세등등 올라가던 기갑 웨이브는 한탄강을 채 넘지 못하고 멈춰 섰다.

다름 아닌, 궤멸된 줄 알았던 감염체 웨이브가 또다시 연천까지 밀고 들어온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이기에 지난 공격보다 더 많은 웨이브를 생산한 거지?

한탄강 너머로 우글거리는 감염체를 내려다보며 김태하 소장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쯧.

그 모습에 잠자코 연합군 지휘권을 이양했던 구 단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쩔 거지?”

여기서 진격을 저지당한 이상 계속 싸울지 아니면 뒤로 물러날지 선택해야 한다.

이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부하들에게도 좋지 않은 판단이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일단 상황은 나쁘지 않아.”

방어선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현재는 한탄강을 끼고 주둔지를 건설한 상태다.

이대로 놈들이 공격을 가해온다면 연합군 화력만으로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다.

“다만, 그뿐이야.”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얼마나 버티느냐, 또 얼마나 많은 감염체를 상대하느냐다.

놈들과는 달리 우리는 보급이 필요하고 또 피곤이라는 것을 느끼는 인간이지 않은가.

언제까지 기약 없는 소식만을 기다리며 방어선을 지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한 그 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그런데 그 순간 이솔하가 따뜻한 커피를 직접 챙겨서 낑낑대며 언덕 위로 올라왔다.

죽을 뻔한 일을 겪고도 기어코 최전방까지 따라와 여러 허드렛일을 도맡은 것이다.

구 단장은 그런 모습이 무척 고까웠는지 뼈가 있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그쪽은 그만 갈 때 아니요?”

하지만 이솔하는 화를 내는 대신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돌아갈 곳이 없어서…….”

그 모습은 대통령이라기보다는 딱 그 나이대의 평범한 여성을 보는 것 같았다.

김태하 소장은 그런 구 단장을 만류하며 김을 폴폴 풍기는 따뜻한 커피를 받았다.

“경호실장은?”

“의식을 되찾으셨다고 들었어요.”

“다행이군.”

강릉이 제때 지원군을 보내준 덕분에 현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특히 중태였던 경호실장이 의식을 되찾았다는 희소식에 그녀는 무척 기뻐했다.

만약 박범석이 지원군을 파견해주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무사하지 못했을 터.

이솔하는 부끄러움과 동시에 고마움을 느끼며 저 멀리 북쪽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무사하시겠죠?”

동부 전선은 현재 재건 중이고, 이곳 서부 전선 또한 감염체와 전쟁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할 전장은 바로 상위 군락이 있는 저 레드존이었다.

감염체를 막는 것도 이렇게 힘에 부치는데 박범석은 과연 어떤 싸움을 하고 있을까.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했다는 생각에 김태하 소장은 참담함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녀석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며 버티는 것뿐이었다.

치익!

[놈들이 움직입니다!]

그 순간 감염체 웨이브를 관측하고 있던 수송 헬기에서 다급한 무전이 전해졌다.

이에 빠르게 고개를 추켜든 김태하 소장은 고개를 돌려 한탄강 너머를 바라봤다.

끼이이이이익-!!

이제 시간이 된 걸까, 가만히 멈춰있던 감염체 웨이브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들의 목표는 역시나 이 한탄강 너머를 사수하고 있는 서울-강릉 연합군이었다.

“전투 준비.”

김태하 소장은 그 즉시 벗고 있던 모자를 챙기며 부관에게 지시를 하달했다.

에에에에에엥-!!

그러자 적막함이 깔려있던 한탄강 주둔지에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빨리! 놈들이 몰려옵니다!”

“2소대 전원! 이쪽으로 집결한다!”

교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병사들은 개인화기를 챙겨들고 방어선으로 달려갔다.

부르릉!

기갑 장비 또한 하나둘 시동을 걸었고, 방열을 끝낸 포병들도 서둘러 포구를 옮겼다.

그렇게 순식간에 방어 준비를 끝낸 연합군 전원은 비장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우측을 부탁한다.”

“그러지.”

감염체 숫자가 워낙에 많은지라 방어선 이곳저곳에서 치열한 난전이 펼쳐질 것이다.

기갑 부대를 구 단장에게 부탁한 김태하 소장은 몰려오는 감염체를 노려보았다.

끼이이이이익-!!

놈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순식간에 평야를 돌파해 한탄강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가장 먼저 화력을 투사할 포병은 포구를 조준한 채 사격 지시를 기다렸다.

꿀꺽.

폭풍전야, 서늘한 바람과 숨 막히는 적막함이 병사들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리쇠를 전진해 방아쇠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하나.

둘.

그리고 셋.

놈들이 표적지를 넘어온 그 순간, 김태하 소장은 전군을 향해 사격 명령을 내렸다.

“전군……!”

그런데 그때, 갑자기 말문이 턱 막히며 무전이 뚝! 하고 끊겨버렸다.

이에 당황한 병사들은 조준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 멍청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분명 명령을 하달해야 할 장교들이 갑자기 입을 헤 벌린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참다못한 병사 중 하나가 결국 방어선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한탄강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광경 하나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말았다.

“어?”

마치 해일처럼 몰려오던 감염체 웨이브가 거짓말처럼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이에 두 눈을 의심하던 병사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전우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놈, 놈들이 물러난다!”

우회하는 것이 아니다. 변이종은 소멸하고 있었고 감염체는 분명 후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던 병사들은 그제야 하나둘 방어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우리가…… 우리가 이겼다!”

그 순간 누군가 외친 고함을 시작으로 모든 방어선에 우렁찬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은 쓰고 있던 군모와 방독면을 내팽개치고 옆자리에 있던 전우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환한 웃음을 지었으며, 동시에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살아남았다는 기쁨,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안도감에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

저 멀리 해가 떠오른다.

눈이 시릴 만큼 환한 그 여명은 먹구름을 걷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었다.

* * *

“정, 정말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요?”

“김태하 소장이 진짜 지기라도 하면…….”

한자리에 모인 충청, 호남권 요새 지도자들은 조금씩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두천이 위험하다는 소식에 그들도 슬슬 똥줄이 타는 것이었다.

만약 서울이 무너지면 그다음은 바로 충청과 호남인데 어쩌자고 이러는 걸까.

이미 서로 말을 맞추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권력이지 파멸이 아니었다.

크흠!

그렇게 한참 불만을 표하던 요새 지도자들은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꿀꺽.

그곳에는 일찍이 서울에서 빠져나온 엄석현이 연신 위스키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시민들은 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연명하는데 그 비싼 위스키를 퍼먹고 있는 개새끼.

하지만 그가 가진 권력과 세력이 무서웠기에 지도자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치익, 칙!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은 엄석현은 담배를 입에 물며 한껏 여유를 부렸다.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있으니까, 잠자코 기다리기나 하십시오. 때가 되면 서울이나 경기도 한쪽 정도는 양보해줄 테니까.”

“정, 정말이오?”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남는 게 땅입니다. 당신들은 제가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고 또 주면 주는 대로 먹으면 되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이미 김태하는 재기 불능이고 박범석은 지원군을 보내는 멍청한 선택을 했다.

감염체 웨이브야 놈들이 알아서 막아줄 테니 자신은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면 끝.

양쪽 세력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이솔하 그년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하면 그만이었다.

“우린 비서실장만 믿고 있네.”

“난 벌써 올라갈 준비도 끝냈어!”

욕심으로 눈이 먼 요새 지도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허허 웃으며 아부를 떨었다.

엄석현은 그 모습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다가도 이내 표정을 싹 지우며 같이 웃었다.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나면 이 짜증나는 병신들과도 이제 영영 작별이었다.

똑똑.

그렇게 한참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며 찾아왔다.

“실장님.”

“무슨 일이지? 시간이 늦었는데.”

“위쪽에서 온 연락입니다.”

이솔하와는 진즉에 연락을 끊었고 나머지 정치인들도 알아서 잘 구슬린지 오래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서울 ‘위쪽’으로 보냈던 부하로부터 연락이 온 게 분명했다.

“오오, 드디어!”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받으시게!”

위쪽에서 연락이 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요새 지도자들은 흥분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엄석현은 비서가 건네는 전화기를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나다. 상황은 어때?”

[형, 형님.]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화를 받은 부하는 곧 죽을 사람처럼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엄석현은 미간을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뭐야, 너 목소리를 왜 이렇게 떨어.”

[제발 살려주세요!]

“뭔 개소리야, 시발! 너 지금 어딘데!”

엄석현이 흥분해서 외치자 울음소리가 들려오던 전화기 너머가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껄껄 웃고 있던 요새 지도자들은 하나둘 웃음을 멈췄다.

[반갑군.]

그 순간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싸늘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기억을 더듬어본 엄석현은 곧 두 눈을 크게 뜨며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냈다.

“구 단장……?”

[기억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나는 자네가 설마 잊어버렸나 싶어 조마조마했지 뭔가.]

“당, 당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종적을 감춘 국군정보사령관 구 단장이 부하를 죽이고 연락을 취해왔다.

엄석현은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연신 핥으며 조심스럽게 지도자들의 눈치를 봤다.

[아! 아직 소식 못 들었나 봐? 그렇다면 내가 말해주지. 자네들이 개지랄 떠는 사이 전쟁이 끝났다는 건 알아야 하지 않겠나.]

“뭐……?”

[하하! 박범석 그 미친 또라이가 기어코 상위 군락 모가지를 따버렸어! 덕분에 수방사 병력과 강릉 연합군 전원이 대전으로 남하 중이지. 이게 뭘 의미하는지 이제 알겠나?]

박범석이 상위 군락을 죽였다. 한낱 인간이 패배가 예정된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현실을 믿을 수 없었던 엄석현은 손을 덜덜 떨었고, 이내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만간 얼굴 한번 보자고.]

뚝.

구 단장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곧 숨 막히는 침묵이 그들을 옥죄었다.

통화 내용을 모두 듣고 있던 요새 지도자들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일어났다.

“김, 김태하가 이겼다고?”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요?”

어떻게 되긴. 국가 반역자로 몰려서 김태하 소장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 죽겠지.

아니, 구 단장의 냉혹한 성향을 생각하면 산채로 생매장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엄석현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자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빨, 빨리 병력을 소집해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하지만 이미 전의를 잃어버린 그들은 빼액 소리를 지르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현재 그들을 가장 두렵게 하는 존재는 김태하 소장도, 구중탁 단장도 아니었다.

“박, 박범석 그놈이 살아있다잖아! 이 미친 새끼야, 너 박범석이 누군지 몰라?!”

현역 시절에 귀신으로 불리던 놈이 이제는 상위 군락의 대가리를 따고 다니고 있다.

인간을 넘어 거의 괴물과 필적하는 그 행보에 요새 지도자들은 모두 패닉에 빠졌다.

놈이 온다!

뒤늦게 사태 파악이 된 그들은 술잔을 내팽개치고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 아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던 엄석현도 허둥지둥 그 뒤를 따라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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