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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41화 (141/180)

<141화>

보통 김태하라는 군인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가 딱 두 가지 정도 있다.

바로 모든 변수를 고려하는 ‘조심성’과 절대 먼저 움직임이지 않는 ‘신중함’이다.

단순히 바둑이나 장기를 둬도 상대 진영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병적인 방어 성향.

그는 자신을 함부로 건들지 않는 이상 절대 고개를 먼저 내밀지 않는 거북이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태하 소장의 지휘를 받아본 군인이라면 모두 숨겨진 비밀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 극단적인 방어 성향 속에 숨겨둔 거세고 흉포한 진짜 본성을 말이다.

쾅! 콰앙!

쿠르르르릉!

마지막 최후통첩을 기점으로 서울-강릉 연합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그 공세는 단순한 국지전 성격이 아닌 방어선 돌파를 목적으로 한 전면전이었다.

설마 선제공격을 가해올 줄은 몰랐던 남부군은 허무하게 천안 방어선을 내주었다.

또 불과 이틀 만에 모든 부대가 후방으로 퇴각하며 대전 요새가 포위되고 말았다.

기세에서 밀린 걸까?

그나마 협상 가능성에 모든 걸 걸고 있었던 요새 지도자들은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결국 혼자 남은 대전 시장은 초라하게 백기를 든 채 김태하 소장 앞에 무릎 꿇었다.

‘항, 항복하겠소.’

대전 시장은 횡령과 착복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죄목과 함께 서울로 압송 당했다.

서울-강릉 연합군은 그대로 장벽을 무너뜨리며 대전 요새로 무혈입성해버렸다.

개전 사흘 만에 대전 요새 함락!

내전이 길어질 것을 걱정하던 시민들은 그 압도적인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진!”

하지만 산에서 내려온 산군, 김태하 소장은 여기서 끝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현지에서 보급을 끝낸 연합군은 다음 표적인 군산으로 거침없는 진격을 시작했다.

쿠르르르르릉!

김태하 소장이 이끄는 수방사야 원래 서울 요새가 자랑하는 최정예 병력 중 하나였다.

거기다 실전으로 다져진 강릉 방위군까지 대거 합류하며 전력은 급상승했다.

“살, 살려주십시오!”

“항복하겠습니다! 제발 쏘지 마세요!”

상대는 끽해봐야 후방에서 근무하던 경기도 예하 부대나 요새 자경단들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큰 규모와 무기를 갖췄다고 한들 연합군 앞에서는 오합지졸 군대에 불과했다.

쾅! 콰르르릉!

마치 전격전을 떠올리게 하는 진격 속도 앞에 방어선은 더 이상 무의미해졌다.

“이,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비서실장! 무슨 말이라도 해보시오!”

그 시각,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뭉친 요새 지도자들은 연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달래야 할 엄석현은 먹통인 위성 전화기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분명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지원을 요청하던 군산 시장이 갑자기 연락두절 됐다.

그 욕심 많은 돼지 새끼가 싸운다거나 혼자 항복하기 위해 나갔을 리는 절대 없고…….

보통 이런 식으로 연락이 끊기는 경우는 엄석현이 아는 한 딱 한 가지뿐이었다.

‘정보사가 움직였다.’

판이 깔리기만을 기다렸던 국군 정보 사령관 구중탁이 드디어 칼을 뽑아 들었다.

개전 초기, 갑자기 모습을 감췄던 정보사 특수부대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군대와 군대가 맞붙는 전면전이라면 모를까, 특수전은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아마 군산 시장은 쥐도 새도 모르게 모가지가 매달렸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꿀꺽.

하지만 엄석현은 이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얌전히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가뜩이나 상황이 심각한데 나머지 시장들이 이 사실을 알아봤자 좋을 게 없었다.

“일단 진정들 하십시오.”

“우리보고 진정하라고? 대전 시장이 개처럼 끌려가는 거 비서실장 당신도 봤잖아!”

“그건 분명 오해가…….”

“분명 협상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김태하 소장이 왜 저러는 거예요!”

“시발! 저라고 이럴 줄 알았겠습니까!”

엄석현이 아는 김태하 소장은 정의나 따질 줄 아는 그런 고리타분한 인간이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대치를 이어가다 보면 분명 민간인 피해와 전력 손실을 우려해서라도 슬슬 종전 협상을 시도할 줄 알았다.

“불과 사흘이요! 사흘!”

“군산이 무너지면 다음은 우리 아닙니까!”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김태하 소장의 선택은 협상이 아닌 대규모 공세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왔던 자신만의 철칙을 모조리 무시하고 오직 남부군을 파멸시키기 위한 전면전에 돌입한 것이다.

평소 화를 내지 않던 상대가 갑자기 게거품을 무는 것만큼 두려운 게 있을까.

전쟁은 이미 수세에 몰렸고 항복해도 소용없다는 소문이 그들을 불안하게 했다.

“일단 다들 기다려보십시오.”

“대책이라도 있습니까?”

“박범석은 부상 때문에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동안 밖으로 지원을 요청해볼 테니 우리는 최대한 버티고 있어 봅시다.”

지원군? 경상권 요새들조차 고개를 돌린 마당에 어디에 지원을 요청한단 말인가.

허무맹랑한 말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요새 지도자들은 곧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당, 당신 정말 미쳤소?”

현재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집단은 한반도 밖에 있는 ‘그곳’만이 유일하다.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겠다는 발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엄석현은 두 눈을 빛냈다.

“이 방법 말고는 없습니다.”

그 모습은 꼭 파멸 직전으로 몸을 욱여넣는 한 마리 벌레를 보는 것 같았다.

멍청하고 아둔하게 빛만 쫓다가 산화해버리는 그런 하루살이 불나방 말이다.

* * *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도 영원할 것 같던 한반도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물론 강릉 또한 차분하게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내고 드디어 새해를 맞이했다.

차분하게 일상을 보내던 주민들은 오랜만에 가족들 손을 잡고 나들이에 나섰다.

이에 맞춰 강릉 시청은 정동진을 개방해 새해 분위기를 맞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직 슬픔이 모두 가시지는 않았지만, 새롭게 뜨는 해를 보며 기뻐하는 사람들.

나 또한 직접 정동진으로 가서 주민들과 함께 다가오는 새해를 직접 맞이해주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있던 강릉은 비교적 밝은 분위기로 1월을 시작했다.

“자! 다들 빗자루 들고 따라오세요!”

“장 씨! 여기야, 여기!”

그리고 우리 희망 아파트 또한 그동안 묵은 때를 벗겨내는 대청소에 돌입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한 번도 하지 못했던 큰 행사 중 하나라고 하는데, 이를 기억하고 있던 상식 아저씨와 경태 남매 그리고 가은이는 아주 신이 났다.

“어휴, 이 먼지 좀 봐!”

“형님, 평소에 청소는 하시죠?”

시청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나는 꼼짝없이 잡혀 할아버지 집을 청소해야 했다.

그래, 뭐 다른 집도 아니고 우리 할아버지 집인데 손자인 박범석이 청소해야지.

나는 투덜투덜하면서도 상식 아저씨를 따라 열심히 아파트 옥상을 쓸고 닦았다.

귀찮긴 해도 점점 때깔이 좋아지는 집을 보고 있자니 몸도 마음도 개운해졌다.

“형님! 우리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응. 금방 따라갈게.”

외관은 얼추 정리가 끝났고, 이제 먼지가 쌓인 집 내부만 털어내면 마무리된다.

나는 경태 남매와 아저씨를 먼저 내려 보내고 조용히 집 안으로 혼자 들어갔다.

‘여전하네.’

강릉에서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우리 할아버지 집이다.

아늑한 풍경, 온기, 은은한 나무 향기는 불변하는 나만의 휴식처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할아버지의 서재를 찾아온 오늘은 기분이 썩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야. 진짜 죽었냐?”

평소 시끄럽게 나를 갈구던 미래 일기가 기록 종료라는 말을 끝으로 멈춰버렸다.

그건 늘 있어 오던 일시적인 동면기가 아닌, 진짜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사는 하고 가던가, 새끼야.”

시간이 지난 지금도 미래 일기와 만년필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늠조차 못 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녀석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버텨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조언자, 또 어떨 때는 든든한 친구가 되어 여정을 함께 헤쳐 온 미래 일기.

고작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해도 유일하게 내 마음을 이해해주던 야속한 녀석이었다.

“쯧.”

영원한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이러한 이별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어느새 그 색을 잃어버린 만년필을 바라보다 말고 이내 담배를 입에 물려고 했다.

삐리리리리리!

그런데 그 순간 앞주머니에 넣어둔 위성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저예요.]

“엠마?”

내전이 발발하자마자 바삐 정보 수집에 들어간 엠마로부터 드디어 연락이 왔다.

그녀는 새해 인사를 할 새조차 없는지 피곤한 한숨을 푹 내쉬며 내게 말했다.

[일단 좋은 소식 하나랑 나쁜 소식 하나가 있어요. 어느 것부터 말씀드릴까요?]

“좋은 것부터 듣죠.”

[백신이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어요. 저희는 이미 접종을 시작했고 다음 주쯤에는 아마 강릉에도 물건이 도착할 거예요.]

그토록 기다리던 감염체 백신이 드디어 개발을 끝내고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다.

백신을 가득 채운 컨테이너가 다음 주쯤에는 도착한다고 하니 곧 접종도 가능할 터.

이제 우리는 직접적인 감염은 물론 공기 중에 퍼지는 변이 바이러스로부터도 안전해졌다.

그동안의 노력이 허사는 아니었다는 생각에 나는 실실 웃으면서 담배를 비벼 껐다.

“나쁜 소식은 뭡니까?”

[엄석현이 먼저 움직였어요. 아무래도 일본 쪽이랑 다른 이야기가 오간 것 같아요.]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이야기에 그만 새로운 담배를 꺼내 입에 물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본토가 쑥대밭으로 변해 변방 섬인 홋카이도 한쪽에 숨죽이고 있는 일본.

굳이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엄석현 그 새끼가 무슨 짓을 했는지 예상이 됐다.

“이제 아주 막 나가네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이거죠. 일본 정부입장에서도 굳이 손해 보는 건 없고요.]

한참 내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기어코 외부 세력인 일본을 한반도로 끌어들인다.

참 엄석현답다는 생각에 나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좋은 상황은 아니야.’

운용하는 데에 큰 비용이 드는 함정들은 일찍이 퇴역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비교적 평화가 길었던 일본에선 최근까지도 해상 자위대가 있었다.

또 홋카이도를 방어 중인 육상 병력을 생각하면 그리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지난번 야쿠자 사건을 통해 한반도를 향한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점차 말라 죽어가고 있던 일본 정부로서는 군침을 삼키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일단 저희 쪽에선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하고 있어요. 하지만 결국 먼저 움직일 거라는 건 예상하고 계셔야 해요.]

그나마 제프리가 계속 입김을 넣고 있기에 놈들도 당장은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엠마의 경고대로 추위가 더욱 심해지면 진짜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생기가 사라진 미래 일기를 잠시 노려보다 이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지금 어디예요?”

[부산이에요. 설마 오시게요?]

“태우러 갈게요.”

당분간은 요양하려고 했더니 어째 돌아가는 꼴이 손을 봐주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항상 짚고 다녔던 목발을 저 멀리 집어던진 뒤 빠르게 집 밖을 나섰다.

.

.

.

.

.

펄럭!

그 순간 잠자코 있던 미래 일기가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다.

이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만년필 또한 한순간 빛을 찾으며 일기 위로 올라갔다.

갔지? 살며시 눈치를 보던 녀석들은 그제야 새로운 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사각.

[10년 전, 부산에서 식당 일을 하던 할머니를 따라 일본 후쿠오카로 밀입국한 ‘박하나’는 올해로 성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축하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주변에는 오직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뱉는 감염체만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현재 수도와 전기가 끊긴 지 한 달이 넘었고 남은 식량이라고는 생수 반병과 먹다 남은 고양이 통조림 하나가 유일하다. 그것마저 아껴먹고 있던 ‘그녀’는 이제 슬슬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했다.]

[아무런 생존 경험이 없는 ‘그녀’는 이대로 나가면 감염체 놈들한테 발각당하고 말 것이다. ‘그녀’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험자의 조언이 무척이나 절실한 상황이다. 곧 돌아올 ‘그’는…….]

“뭐하냐, 너?”

그 순간 정신없이 일기를 쓰던 만년필이 다시 돌아온 박범석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웃기는 놈들이네.”

그는 책상 아래로 떨어지려는 만년필을 잽싸게 낚아채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들 스스로 기록 종료라고 하더니 주인 몰래 새로운 속편을 준비하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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