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정말 뜬금없는 일기 내용을 보며 한동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깊이 고민해야 했다.
그동안 미래를 예언해주던 녀석이 뜬금없이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 미래 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도와주라 이거야?’
그동안 미래 일기를 집필하는 ‘누군가’는 상황을 타개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그런 조언자 역할을 상속자인 내가 직접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사각, 사각, 사각.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만년필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점은 삼인칭, 여백을 채우는 내용은 박하나를 향해 보내는 적당한 조언이었다.
‘감염체는 밤이 되면 활동성이 더욱 늘어난다. 비교적 해가 떠 있는 시간, 소음과 냄새에 주의하며 움직일 필요가 있다. 놈들이 뱉고 지나간 오물을 옷에 바르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100m 안쪽으로 접근하지 마라.’
‘근처 가게나 식품점은 이미 털렸을 확률이 높다. 주변 가정집을 돌며 먹을 수 있는 식수와 식량을 비축하자. 컵라면과 같은 반조리 식품은 제외, 건어물이나 비스킷 같은 제품으로 최대한 가방을 채워라. 그리고 생수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명심해라.’
‘절대 욕심 부리지 말고 네가 들 수 있는 무게를 항상 고려해라. 디폴트값은 당장 뛰어서 도망칠 수 있냐, 없느냐다. 물자는 다시 구하면 되지만 목숨은 하나뿐이다. 살아만 남으면 언제든 기회는 다시 생긴다.’
보통 이 정도 상식은 한반도를 사는 생존자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박하나라는 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감염체가 없는 일본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알려주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지고 또 쓸데없는 사족이 여러 개 붙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정도면 어디 출판해도 될 만큼 모범적이고 정석적인 매뉴얼이었다.
‘됐냐?’
만년필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한 차례 진동과 함께 다시 평범한 펜으로 돌아갔고, 미래 일기 속 글자들 또한 사막의 신기루처럼 하나둘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잘 전달된 건가?
어떻게 또 장단을 맞춰주기는 했는데, 과연 이게 옳은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녀가 들키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범석 씨.”
“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한참 사색에 빠져 있는데 부산에서 픽업한 엠마가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맞다. 우리 헬기로 이동 중이었지?
주변을 둘러보니 1팀 대원들 모두 아까부터 말이 없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
“오늘 점심 메뉴 고민했어요.”
마음 같아선 요즘 일기장으로 생체 다마고치 중이라고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미친놈 취급받기 딱 좋기에 대충 둘러대고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투두두두두두-!!
강릉에서 출발해 부산을 경유했던 수송 헬기는 어느새 대전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치익!
[곧 도착합니다!]
장벽이 통째로 무너진 대전 요새는 현재 서울-강릉 연합군이 주둔 중이었다.
우리는 주둔지와 가장 가까운 착륙장을 배정받고 신속히 수송 헬기에서 내렸다.
“생각보다 멀쩡하네요.”
“항복이 빨랐으니까.”
장벽과 일부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을 제외하면 시가지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하지만 줄지어 걸어가는 포로들과 통제당하는 대전 시민들을 보면 실상은 달랐다.
전쟁은 아무리 포장해도 전쟁, 주둔지에는 여전히 서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하늘 높이 피어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이제야 왔군.”
그 순간 착륙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계단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소장님?”
고개를 돌려보니 김태하 소장과 구 단장이 사이좋게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아니, 바쁘신 양반들이 여긴 왜…….
나는 별들의 마중이 부담스러운 일행들을 대신해 옛 상관들을 향해 뛰어갔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너도 고생 많았다.”
살아서 보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얼굴을 마주하게 된 두 사람.
마음 같아선 어디 풍경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오랜 회포를 풀고 싶은 심정이다.
“드라마 찍나? 들어가기나 하자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일단 빠르게 자리부터 옮겼다.
지금은 축포를 터트리는 것보다 엄석현 그 새끼의 모가지를 따는 게 더욱 시급했다.
* * *
현재 전선 상황은 굳이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단계였다.
그만큼 서울-강릉 연합은 압도적인 화력 차이로 남부군을 몰아붙이고 있는 건 물론, 장기전을 결정짓는 물자 보급과 배치 또한 별다른 문제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아마 공세가 이대로 이어진다면 이번 달 내로 군산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골치 아프군.”
하지만 문제는 제대로 트롤 짓을 벌이는 엄석현과 하이에나 같은 일본의 개입이었다.
만약 이해관계가 얽힌 두 놈이 손을 잡는다면 내전은 진짜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그것만큼은 절대 원치 않았던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끝낼 방법은 없을까요?”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미연방이 압박을 가하는 사이 빠르게 전쟁을 끝내는 거다.
남부군이 와해되면 사실상 일본이 개입할 명분이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불가능해. 적어도 2개월, 길면 4개월까지 봐야 하는 전쟁이야. 무리해서 움직이려면 사람을 갈아 넣는 방법 말고는 없어.”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저쪽도 나름 호남 최대의 요새라고 불리는 곳들이다.
군산까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밀었다고 해도 그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시가전.
김태하 소장 말처럼 급히 움직였다가는 진짜 예상치 못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구 단장님?”
나는 이번에는 정보사와 예하 특수부대를 이끄는 구 단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듣자 하니 이미 군산 시장의 모가지를 따다가 걸어둔 걸로 아는데 이번에도 힘들까.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바라보자 구 단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 외딴섬 벙커에라도 처박혔는지 이틀 전부터 모습을 감춰버렸어. 위치를 알아내려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필요할 거다.”
아무리 정보사라 해도 수백 개가 넘는 섬을 일일이 찾아다니려면 시간이 걸린다.
이는 엠마도 마찬가지인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을 하려고 하든 결국엔 시간, 그놈의 시간이라는 것이 꼭 필요한 상황.
시발.
답답함을 참지 못한 우리는 결국 담배를 입에 물며 사이좋게 욕을 읊조렸다.
마음 같아선 어디 모래사장으로 불러놓고 주먹다짐이라도 벌이고 싶다, 진짜.
괜히 허공으로 주먹질을 시전한 나는 곧 이성을 되찾고 다시 회의를 재개하려 했다.
“그럼 일단…….”
펄럭!
“불러내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천막 문이 열리며 익숙한 여성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다름 아닌, 용산 집무실에서 한참 업무를 보고 있어야 할 대통령 이솔하였다.
“각하?”
“도대체 무슨 소리를…….”
정말 뜬금없는 등장에 나도, 김태하 소장과 구 단장도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자연스럽게 회의에 참석했다.
“엄석현이요. 제가 불러낼 수 있어요.”
아무도 모르는 섬 벙커에 처박혀 있는 쥐새끼를 무슨 수로 끌어낸단 말인가.
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바라보자 이솔하는 슬픈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을 제안할 거예요.”
“협상 말입니까?”
“예. 종전 협상이요.”
뜬금없는 종전 협상 발언에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구 단장이 잔뜩 흥분하며 외쳤다.
“이솔하! 당신 제정신이요!”
하지만 이솔하는 그런 구 단장을 침착하게 제지하며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버린 그녀의 눈동자에선 어느덧 강렬한 불이 반짝이고 있었다.
“엄석현은 똑똑한 인간이에요. 하지만 반대로 자기 안위가 걸린 일에는 한없이 멍청해지는 인간이죠. 만약 혼자 살 방법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려고 할 거예요.”
“설마……?”
“네. 그 간절함을 미끼로 삼으려고요. 다른 시장을 넘겨주는 대가로 협상하자, 너는 살려줄 테니 이 전쟁을 끝내자. 이 뜻만 전해주면 무조건 협상장으로 나올 거예요.”
“그걸 믿겠소?”
“제가 하면 믿을 거예요. 그 인간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우습게 보는 인간이 바로 저였거든요. 설마 저 병신 호구 같은 년이 함정을 팠겠어? 분명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동안 호구처럼 당했던 경험을 기반 삼아 엄석현을 끌어들일 함정을 설계한다.
이솔하는 자기 비하까지 서슴지 않으며 우리에게 또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가능성은 있어.”
보통 전시 중 협상이라고 하면 수장이 아닌 다른 대표자가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솔하를 가장 우습게 보는 엄석현으로서는 김태하 소장이나 구 단장보다는 그녀와 협상하기를 원할 것이다.
“잠입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어차피 협상이 시작된 이상, 양측 모두 최소한의 호위만을 대동한 채 나타날 터.
협상장으로 몰래 잠입할 수만 있다면 엄석현의 모가지를 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엄석현이 아니라 협상장까지 직접 나와 있어야 할 이솔하의 안전이었다.
아무리 전쟁을 끝낼 기회라고 해도 시민들이 뽑은 대통령을 미끼로 쓸 수는 없었다.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예?”
“전쟁을 끝낼 수만 있다면 위험해지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요. 아니, 거기서 총에 맞아 죽더라도 절대 원망하지 않을게요.”
우리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이솔하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건 결국 저 때문이에요. 제가 책임질 수 있게 해주세요.”
그녀는 서울을 떠나기 전, 이미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결심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회피가 아닌, 끝까지 책임을 다하겠다는 마지막 각오였다.
참 밉기도 미웠고,
동시에 안쓰러웠던 인간, 이솔하.
하나둘 퇴장했던 주변 인물처럼 그녀도 어느새 마지막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끝까지 신세를 지네요.”
양쪽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는 이솔하와 조용히 손을 맞잡아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퇴임식만큼은 화려한 축포와 함께 끝내줄 예정이었다.
“쓸 만한 친구들이 필요하겠군.”
“최대한 정예로 선별해서 보내보지.”
교통정리가 끝났다고 생각한 김태하 소장과 구 단장은 나머지 작전을 논의하려 했다.
콰직!
하지만 나는 보란 듯이 왼쪽 팔을 들어 올려 책상 위로 강하게 내리쳤다.
차고 있던 깁스는 산산이 조각났고, 동시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직 부상이…….”
“그 새끼한테 빚이 하나 있거든요.”
다른 놈들이라면 모를까, 엄석현 그놈만큼은 꼭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다짐했었다.
나는 상처와 흉터가 가득한 몸을 우두둑 움직이며 오른쪽 눈동자를 사납게 빛냈다.
“이자까지 쳐서 받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