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삶의 불확실성이다.
세상일이라는 건 아무리 노력하고 준비해도 절대 내 뜻대로만 흘러가 주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배운 불확실성은 내게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을 가지게 했다.
‘토끼몰이.’
아무리 이솔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고 해도 혹시 모르는 변수라는 게 존재했다.
토끼를 잡고자 한다면 굴이 몇 개인지, 또 어디로 도망칠지 정도는 예상해야 한다.
우리는 온종일 머리를 맞대고 앉아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와 김태하 소장이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토끼를 안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군 후퇴.’
서울-강릉 연합군은 군산을 향한 포위망을 전부 풀고 서천과 익산으로 물러났다.
물론 정보사 특임대 또한 모든 작전을 무기한 연기한 채 완전히 모습을 감춰버렸다.
군산 상공을 날던 미연방 무인기도, 시끄럽게 날던 헬기도 전부 사라져버린 상황.
졸지에 포위망에서 벗어난 군산 요새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정찰했다.
‘빨, 빨리 연락해!’
곧 연합군이 후퇴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는지 서둘러 광주 요새로 이 소식을 알렸다.
뭐지? 갑자기 후퇴한다고?
요새 지도자들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면서도 연합군의 속내를 파악하려 했다.
역시 대가리를 굴릴 줄 아는 엄석현답게 이 정도로는 절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맘때쯤 강릉 전역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 하나가 돌기 시작했다.
‘박범석이 뇌출혈로 쓰러졌다.’
강릉 시장 박범석이 병원으로 호송된 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뇌출혈이라니!
난리가 난 강릉 주민들은 소문의 근원지인 동인병원으로 우르르 몰려와 진짜인지를 물어봤고, 주치의인 차지철이 이를 확인시켜주면서 소문이 명백한 사실로 밝혀지게 되었다.
박범석이 누구인가?
과거, 전쟁 영웅이라 불리며 전설적인 감염체 특수팀의 창설 멤버였던 것은 물론, 고향인 강릉을 수복하고 영동 지방 전체를 연합 아래로 묶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쓰러졌다는 건 사실상 연합군 전체가 휘청거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강릉은 당연히 난리가 났으며 소문은 곧 서울과 호남까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이건 기회야!’
이에 숨 죽인 채 정보를 모으고 있던 엄석현은 쾌재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병력을 광주로 집결시켜 군산 요새를 향한 진군을 시작했다.
일본의 개입, 박범석의 부재, 상황은 조금씩 남부군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 * *
“협상 날짜가 잡혔어요.”
하지만 이 모든 건 토끼를 속이기 위한 눈속임일 뿐, 결국 미끼에 불과했다.
놈이 쓰러졌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인물은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이뤄진 협상 타진!
한동안 죽은 사람 흉내를 내야 했던 나는 그제야 일행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은 정확히 사흘 뒤, 장소는 군산과 서천 사이에 있는 개야도라는 곳이에요.”
“병력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이구먼. 엄석현 그 새끼가 생각보다 머리를 잘 썼어.”
현재 남부군과 서울-강릉 연합군은 바다와 강을 낀 채 서로 대치 중인 상황이다.
협상 장소로 결정된 개야도는 정확히 그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섬 중에 하나인데, 주변이 탁 트여있어 헬기나 선박이 접근하면 곧바로 알아챌 수 있는 곳이었다.
“호위 병력은요?”
“양측 모두 다섯 명이요. 전원 9mm 이하 권총만 휴대하기로 합의를 본 상태에요.”
거기다 데려올 수 있는 호위 인원까지 제한해 사실상 허튼짓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조심성 하나는 맥스를 찍은 쥐새끼답게 웬만한 안전장치는 모두 걸어둔 것이었다.
“10분이면 되겠는데요.”
하지만 그런 엄석현조차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헬기와 선박이 접근하지 못한다고 해서 침투 루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게 뭐지?”
“윙슈트라는 거예요. 250km/h로 고공 낙하해서 작전 지역으로 진입하는 거죠.”
나는 엠마가 가져다준 고성능 윙슈트를 펄럭이며 일행들 앞에서 자랑했다.
마치 하늘다람쥐를 연상케 하는 검은색 윙슈트를 보며 일행들은 신기해했다.
고성능 장비, 고고도 비행이 가능한 항공기, 모두 미연방의 지원 덕분이다.
나는 히히 웃고 있는 엠마를 향해 엄지를 살짝 들어 올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 혼자서 되겠나?”
“충분해요.”
겨우 대가리 여섯 개를 따는 일에 우르르 몰려가서 굳이 시선을 끌 필요는 없었다.
나는 따라오겠다는 팀원들을 만류하며 반나절 남짓 남은 시간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이제 슬슬 갈 시간이다.
시계를 가리키자 일행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져 작전을 준비했다.
“형님, 말씀하신 물건이요.”
나는 경태가 가져다준 최 대위의 권총을 손에 쥐고 묵직한 슬라이더를 당겼다.
철컥!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라.
약실 속 9mm 탄환이 내 눈동자를 비추고 있었다.
* * *
개야도는 한때 주민이 백 명 넘게 거주하기도 했던 군산의 여러 섬 중 하나였다.
하지만 감염 사태가 발발한 지금은 모든 주민이 떠나고 쓸쓸한 무인도로 변해버렸다.
버려진 건물, 쓰레기가 잔뜩 널려있는 선착장, 적막함만이 감도는 작은 갈대밭.
이 모든 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이솔하와 엄석현이 마주 본 채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
숨 막히는 대치가 이어지던 와중, 엄석현이 먼저 입을 열며 자리에 앉았다.
이에 이솔하도 그와 마주 보고 앉으며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뒤로 표정을 숨겼다.
약속한 대로 호위는 다섯, 모두가 권총 위로 손을 올린 채 협상이 시작되었다.
“꽤 급했나 봐.”
“……뭐?”
“박범석 말이야. 듣자 하니 뒤지기 직전이라며. 찾아오는 게 너무 늦은 거 아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엄석현은 비열한 이죽거림과 함께 입에 담배를 물었다.
초장부터 강하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예 자신이 승리했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멍청이.’
이에 이솔하는 기죽은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초읽기가 시작된 손목시계를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본론이나 말해.”
“성급하긴.”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기가 죽은 이솔하를 보며 엄석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곧 입에 머금은 담배연기를 푸우 내뱉으며 자신이 원하는 요구사항부터 말했다.
“대전에서 물러나.”
“뭐?”
“대전까지 넘기라고.”
너무도 어이가 없었던 이솔하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장난해?”
대전은 분명 서울-강릉 연합군이 가장 먼저 항복을 받아낸 초기 점령지다.
이곳을 넘기라는 건 사실상 모든 전쟁 결과를 백지로 만들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처음으로 욱한 이솔하는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장난 같아?”
하지만 처음으로 언성을 높이는 상대를 보며 엄석현은 여유롭게 웃음을 터트렸다.
“끈 떨어진 마당에 발악하는 게 안타까워서 그래. 그냥 깔끔하게 넘기고 끝내자고.”
“너……!”
“이번 일 끝나면 대통령도 그만두잖아? 어디 비빌 언덕이라도 만들어야지 않겠어.”
엄석현은 마치 뱀을 연상케 하는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이솔하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너무도 노골적인 조롱에 그녀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참자.’
마음 같아선 욕을 퍼부어준 뒤 협상이고 뭐고 다시 싸우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역할은 결렬이 아닌 단순한 시간 끌기라는 것을 알기에 꾹 참았다.
신호를 보내놨으니 박범석이 탄 항공기도 개야도 상공으로 향하고 있을 터.
그가 약속했던 10분 중 이미 절반이 넘게 지났으니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됐다.
‘할 수 있어.’
엄석현은 보통 이런 식으로 주도권을 가져와 자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기꺼이 응해주겠다고 마음먹은 이솔하는 반쯤 일어나려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대전, 넘겨줄게.”
“으음?”
이걸 참는다고? 그 침착한 반응에 도리어 놀란 것은 엄석현 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며 자기 예상이 적중했다는 걸 확신했다.
“야.”
마지막 협상 카드인 대전까지 넘겨줄 정도면 정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상황을 대충 유추해본 건데 이솔하가 이 정도까지 양보하려 한다는 건…….
“박범석 그 새끼, 죽었지? 그치?”
몸 밖에 쓸 줄 모르는 무식한 새끼가 분수도 모르고 날뛸 때부터 알아봤다.
엄석현은 앓던 이가 빠진 사람처럼 후련하게 웃더니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직감한 이솔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주춤했다.
철컥!
깜짝 놀란 양측 호위들은 서둘러 테이블 앞으로 다가와 권총을 뽑아 들었다.
순간 뒤바뀐 분위기에 엄석현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비벼 껐다.
“일본에서 좋은 제안을 했더라고.”
“이 개새끼……!”
“병신 같은 년.”
그 순간 이솔하가 몰래 챙겨온 무전기에서 다급한 음성이 울려오기 시작했다.
[서쪽 해안가에서 식별 불가능한 적 접근 중! 젠장, 함정이었습니다! 피하십시오!]
박범석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엄석현은 애초에 협상에 임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엎드려!”
그 무전을 기점으로 경호원들은 재빨리 권총을 뽑아 상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탕! 탕! 탕!
그나마 새로운 경호실장의 임기응변 덕분에 이솔하는 총을 맞기 직전 엎드렸다.
“꺄악!”
하지만 워낙에 갑작스러웠던 만큼 주변 호위들이 대신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연신 불을 뿜는 총구. 양측 군대가 주둔하던 군산과 서천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뭐해, 이 병신들아!”
일본에서 약속한 자위대 특수부대가 현재 경비정을 타고 개야도로 접근 중이었다.
어차피 다 끝난 상황, 여기서 괜히 눈먼 총알에 맞아 죽었다간 본인만 손해였다.
엄석현은 싸우려는 호위를 다그치며 접선 장소인 갈대밭으로 빠르게 도주했다.
후우, 후우.
엄폐물 뒤에 숨어있던 경호실장은 서둘러 주변을 살피며 이솔하를 다그쳤다.
“정신 차리세요! 서두르셔야 합니다!”
아무리 연합군이 빨리 출발한다고 해도 몰래 다가온 적보다는 느릴 수밖에 없다.
놈들이 이솔하를 찾기 전에 빠르게 이곳에서 벗어나 선착장까지 도망쳐야 한다.
“각하?”
하지만 그녀는 겁에 질리기는커녕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괜, 괜찮아요.”
“예?”
“여기서 기다리면 돼요.”
“그게 무슨…….”
경호실장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미간을 찡그리며 시계를 뺏으려고 했다.
타앙!
그런데 그 순간 저 멀리 엄석현이 사라졌던 갈대밭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려왔다.
‘총성?’
총을 맞고 신음하던 경호원들은 뜬금없는 총성에 놀라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끄아아아아악!
살, 살려줘! 괴물이다!
그러자 어둠이 짙게 깔린 갈대밭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비명은 다름 아닌 엄석현과 함께 도망쳤던 호위들의 처절한 단말마였다.
서걱!
어둠 속에서 뛰쳐나온 날다람쥐 한 마리가 피 묻은 토마호크를 휘두른다.
탕!
깜짝 놀란 경호원이 그쪽으로 권총을 뽑아보지만, 한 박자 먼저 머리통이 꿰뚫렸다.
물론 그 주변에 있던 다른 호위들이라고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걱!
적의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들은 하나둘 목이 잘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은 꼭 인간을 학살하는 변이종, 아니 그 위에 사냥꾼을 보는 것 같았다.
“히, 히이익!”
불과 2분 만에 호위 다섯을 전부 잃은 엄석현은 발을 헛디디며 넘어지고 말았다.
그의 앞에는 접선하기로 했던 일본 특수부대원의 목이 데굴데굴 굴러와 있었다.
자신을 습격한 남성은 이미 모래사장을 건너온 지원군까지 모조리 학살한 상태였다.
“머리 좀 썼더라.”
“아, 아아…….”
“근데 너무 뻔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오른쪽 눈.
박범석의 등장에 엄석현은 그만 실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