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145화 (145/180)

<145화>

박하나가 드디어 집 밖으로 나섰는지 비어있던 일기 내용이 갱신되기 시작했다.

투덜거리던 나는 곧 할아버지의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하고 글을 읽어 내려갔다.

사각, 사각, 사각.

[결국 조언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감염체가 흘린 오물을 덕지덕지 바른 뒤 조심스럽게 집 밖을 나섰다. ‘그녀’가 가장 처음 마주한 것은 길가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감염체가 소음에 민감하다는 것을 배운 ‘그녀’는 침착하게 돌멩이를 주워 반대편으로 던져버렸다. 감염체는 곧 그 소리에 반응해 끔찍한 울음소리를 내며 달려갔고 ‘그녀’는 재빨리 골목으로 숨었다.]

좋아, 한밤중에 감염체 오물까지 발랐으니 웬만해서는 발각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잘 움직이고 있는 박하나를 응원하며 계속 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그녀’가 가장 처음 향한 곳은 한 노부부가 사는 옆집이었다. 아침이 되면 늘 반갑게 인사해주던 그 둘은 어딘가로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깨진 현관 창문과 핏자국이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애써 울음을 참은 ‘그녀’는 핏자국이 낭자한 현관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스턴트 라면과 생쌀 그리고 생수를 구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작은 부엌칼을 챙긴 것은 사소한 비밀이었다.]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라면을 정신없이 입에 욱여넣었다. 무언가를 먹을 수 있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흘렀지만, 겨우 식량 몇 개를 구한 것으로 사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전기도, 가스도 들어오지 않아 저체온증이 염려된다. 혹여나 눈이라도 온다면 고립되는 것이었기에 서둘러 이 지역을 탈출해야 했다. ‘그녀’는 식량이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해보았다.]

눈물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 것치고는 생각보다 침착하고 또 신중한 성격이다.

박하나라는 생존자를 빠르게 파악한 나는 드디어 마지막 문단을 읽어 내려갔다.

[전기가 끊기기 하루 전 근처에 대피소가 있다는 방송을 들은 기억이 났다. 여기서 한 4㎞ 떨어진 학교 건물이니 자전거를 타고 간다면 금방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조언자를 향해 조심스레 물어봤다.]

미쳤냐? 이 와중에 대피소에 간다는 건 나 좀 죽여 달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름없다.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손에 만년필을 쥐고 박하나를 위한 조언을 써내려갔다.

‘구조가 오지 않았다는 건 정부가 그 기능을 상실했을 확률이 높다. 이런 경우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 아닌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하루라는 여유를 두고 최대한 많은 물자를 구해 탈출할 기회를 노려라.’

‘만약 성공적으로 도시를 빠져나갔다면 인구 밀집도가 낮은 지역에서 안전한 은신처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명심해라. 절대 아무도 믿지 말고 혼자 움직일 것. 특히 여럿이서 몰려다니는 무리는 항상 경계해라.’

사실 안전한 은신처를 구한다고 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쨌거나 일본은 홋카이도를 제외한 모든 섬 지역이 감염체로 뒤덮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강조하며 일기 내용을 하나둘 줄여나갔다.

사각, 사각, 사각.

그러자 미래 일기는 기다렸다는 듯 글자를 삼키며 박하나에게 조언을 전달해주었다.

그 광경을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나는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잘 해낼 수 있으려나.’

미래를 예언 받았던 나와는 다르게 박하나는 겨우 조언 몇 줄을 듣는 게 전부다.

아니, 애초에 이쪽과 같은 타임라인을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도 배경 설명을 보면 현재 홋카이도에 거주 중인 것 같기는 한데…….

부디 그녀가 무사히 살아남아 지옥으로 변한 일본에서 탈출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딱!

살살 좀 해라? 나는 일기 녀석에게 딱밤을 먹여준 뒤 조용히 서재를 빠져나왔다.

.

.

.

.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그 시각 한참동안 울면서 생라면을 씹어 먹던 박하나는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한쪽에 올려둔 모나미 볼펜이 기다렸다는 듯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헛것을 본 게 아니었구나.

오늘로 벌써 두 번째인 광경에 박하나는 조심스럽게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일기장을 꼭 끌어안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 감사합니다.”

그동안 박하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건 굶주림도, 추위도 아닌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만약 이 일기장 너머 조언자가 아니었다면 진즉 목을 매달고 죽었을지도 몰랐다.

혹시나 답장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던 그녀는 그제야 일기장을 읽기 시작했다.

“으응…….”

왜 대피소로 향하냐는 따가운 질책에 아까 전에 멈췄던 눈물이 다시 나올 것만 같았다.

“헤헤.”

하지만 침착해서 다행이라는 칭찬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고 말았다.

누군가 옆에서 보고 있었다면 아마도 정신이 나가버린 미친년 취급했으리라.

그만큼 일기장 내용에 집중하던 박하나는 곧 고개를 끄덕거리며 감탄했다.

“대피소는 위험하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과 다르게 일기장 너머의 조언자는 역시 아는 것이 많았다.

덕분에 식량도 물도 구할 수 있었던 그녀는 대피소라는 단어를 머리에서 지웠다.

“한, 한 번 더 가보자.”

분명 일기장은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며 더 많은 물자를 비축하라고 조언해주었다.

이번에는 더욱 큰 가방을 챙겨 아예 옆집과 그 옆집까지 모조리 털어올 생각이다.

박하나는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며 집 밖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보통 중앙 관청이라고 하면 행정 중심지 혹은 권력의 중추라고들 많이 생각한다.

아무래도 중요한 요직에 앉아있어야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물론 실제로도 시청 직원은 엄청난 연봉과 승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예전부터 함께 한 이들이기도 했고 그만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강릉 시청은 직원들이 선정한 기피 근무지 중 1위였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들 배가 불렀군요.”

제발 좀 살살하라는 의미를 담아 야근만 한 달째인 태식 씨를 달래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턱도 없다는 듯 산처럼 쌓인 서류 위에 또 묵직한 서류를 올려놓았다.

“짧게 간추린 내용입니다.”

“요약치고는 양이 많은데요.”

나는 태식 씨가 오랜 시간에 걸쳐 작성한 방대한 보고서를 보며 그만 기가 질렸다.

어쩐지 다들 살려달라고 매달리더라니, 이런 어두운 내막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나는 직원들이 보내는 간절한 눈빛을 매몰차게 외면하며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정말 최소긴 하네.’

현재 강릉 연합은 영동 지방은 물론 포항을 포함한 경상권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당연히 규모가 그만큼 커져 이젠 지역이 아닌 작은 국가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급격하게 늘어난 영토, 인구, 또 관리해줘야 하는 여러 가지 행정 업무까지.

시스템이라는 풍선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여러 가지 문제를 품고 있었다.

“가장 시급한 건 물자입니다. 기본적인 식량은 물론 식수마저 부족한 곳이 대부분이니까요. 현재 동해항 비축 물량으로는 올해 3~4월까지가 한계라고 보고 있습니다.”

일본이 통째로 날아갔다는 건 그만큼 확실한 물자 수입처가 사라졌다는 걸 의미한다.

설상가상 전쟁까지 일어났으니 한반도 내 생산과 물류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을 터.

서울 요새가 최대한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경상권 전체를 커버하기에는 무리였다.

“이건 제가 해결해보죠.”

“감사합니다.”

결국 태평양 건너 위치한 미연방에 또 한 번 도움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뭐, 우리가 해야 할 고생쯤이야 사람들 목숨값에 비하면 싼 편이지 않은가.

나는 기운이 없는 직원들을 달래며 다시 산처럼 쌓인 보고서를 읽으려고 했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잠자코 옆을 지키고 있던 태식 씨가 넌지시 다른 화두를 꺼냈다.

“혹시 서울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은 현상 유지입니다.”

현재는 이솔하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고 김태하 소장이 대행 자리에 앉아있었다.

대충 정리가 끝나는 대로 선거를 진행할 예정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쑥대밭이 된 서울을 재건하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쳤다.

“시간이 걸리겠네요.”

“뭐, 결국은 정상으로 돌아갈 겁니다.”

아마 새로운 대통령을 보는 건 내년 늦게나 아니면 그다음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크흠!

그 순간 태식 씨가 굉장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나는 그냥 무시할까 하다가, 결국 커피 두 잔을 주문한 뒤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아직도 걱정되십니까?”

“솔직히…… 조금 불안합니다.”

“태식 씨가요? 의외네요.”

“권력이 얼마나 무섭고 추악한지 시장님도 아시잖습니까. 분명 엄석현처럼 욕심을 내는 괴물이 계속, 계속해서 나올 겁니다.”

이솔하는 내게 충분히 호의적이었고 현재 대행인 김태하 또한 온건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선택을 받은 다음 대통령이 또 그럴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태식 씨의 불안함은 결국 그런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두려움처럼 보였다.

“제가 대통령이 되길 원하셨군요.”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럴 겁니다. 박 시장님은 충분히 자격이 있으니까요.”

자격이라……. 나는 그 단어를 조용히 곱씹으며 흉터가 가득한 내 손을 펼쳐봤다.

자격이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손이었으며 또 처량하게 떨리고 있었다.

“태식 씨.”

“예?”

“제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까요?”

“그게 무슨…….”

“시간은 계속 흐르지 않습니까. 저도 은퇴하면 누군가에게는 이 시장직을 넘겨주겠죠. 저기, 먼저 떠나버린 사람들처럼요.”

은퇴라는 말에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식 씨가 깜짝 놀라며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제지하며 창밖으로 보이는 강릉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흉터와 고통으로 조각한 몸이 무뎌지는 사이,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

“저도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요. 영원할 것 같은 이들이 하나둘 퇴장하는 모습을 보면 이 세상에 꼭 혼자 남는 기분이 들거든요.”

“시장님.”

“근데 그게 슬프다가도 가끔은 기다려집니다. 내가 맡은 소임을 잘했는지, 정말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는지…… 유산을 남겨주신 할아버지께 꼭 한번 물어보고 싶어서요.”

이게 과연 최선이었을까. 더 나은 삶, 더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지는 않았을까.

지나와보니 모두 후회뿐이요, 결국은 손에 쥐지 못하는 미련한 모래알뿐이었다.

“모두가 그랬을 거예요. 남기고 떠났겠죠.”

하지만 이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마음도 곧 편안해진다.

동시에 내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며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눈이 그쳤네요?”

내 입김 때문에 흐려진 시청 창문을 오른손 소매로 뽀득뽀득 닦아보았다.

그러자 흐릿하기만 하던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또 환해져 있었다.

이를 넋 놓고 바라보던 태식 씨는 그제야 편안한 표정으로 다가와 내게 물었다.

“앞으로 뭘 하실 겁니까?”

“저도 남겨보려고요.”

고통으로 얼룩졌던 과거를 지우고 폐허 위에 새로운 희망과 번영을 재건하라.

일기장 밖 조언자가 내게 처음 맡겼던 임무를 드디어 마무리할 때가 왔다.

“사라지지 않을 유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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