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전후 복구로 정신없었던 겨울이 지나고 슬슬 고드름이 녹는 봄이 찾아왔다.
때마침 본격적인 물류 이동이 시작되면서 막혀있던 행정 업무도 정상화됐다.
덕분에 물자 부족이라는 급한 불을 끈 우리는 슬슬 미뤄두었던 숙제를 시작했다.
이제 주먹구구식 시스템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틀을 갖춰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엠마에게서 소개받은 각 분야 전문가들의 조언과 함께 차분히 일을 추진했다.
‘일단은 사람.’
우선은 연합의 규모가 비대해지면서 기본적인 행정 인력들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분야를 막론하고 이를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는 책임자가 몹시 부족했다.
가장 먼저, 출중한 능력과 믿고 맡길 수 있는 신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연스레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일행들이나 지인들이 하나둘 요직을 맡기 시작했다.
“내, 내가 이래도 되나 모르겄네. 다른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게 안 나을까?”
“그동안 고생하셨잖아요.”
대표적으로 강릉의 치안을 책임져주던 순찰대가 정식 치안 기관으로 승격했다.
이를 책임지는 자리는 당연히 순찰대 소장이었던 상식 아저씨가 맡게 되었다.
새롭게 편제된 강릉 순찰대는 이제 영동 지방 전반으로 그 규모를 키워 공공 안전과 법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힘쓸 것이다.
“축하드려요.”
“으응…….”
나는 오랜만에 양복을 꺼내 입고 온 상식 아저씨에게 약식으로 임명장을 전달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진 기사가 빙긋 웃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쪽입니다! 한 번만 웃어주십시오!”
원래 이런 보여주기식 행위는 참 싫어하는데 이젠 이런 것도 신경 써야 하는 시기다.
찰칵!
나는 아침 신문에 실릴 사진 한 방을 멋지게 찍은 뒤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아는 얼굴이네.’
어째 임명장을 받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하나 같이 익숙한 얼굴들 뿐이다.
하긴 팀장으로 승진했던 혜지 씨가 이번엔 동해 시청까지 맡게 되었으니 말 다했지.
코흘리개 말단직원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참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리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혜지 씨를 보며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모두 축하드려요!”
“자, 자! 술잔 가지고들 모여!”
약식으로 진행된 임명식이 모두 끝나고난 후, 먹고 마실 게 준비된 뒤풀이가 시작됐다.
하지만 아직 만나야 하는 사람이 남아있던 나는 서둘러 세미나실을 빠져나왔다.
“이쪽입니다.”
태식 씨의 안내를 따라 집무실로 가보니 이미 손님 두 명이 접견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둘은 다름 아닌 저 멀리 경상도에서부터 올라온 포항 시장과 대구 시장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당연히 저희가 와야죠.”
원래라면 한반도 통합 이야기가 나올 때쯤 한 번씩 만났어야 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감염체 전쟁이 터져버린 탓에 모든 일정이 어영부영 떠버리고 말았고, 겨울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두 사람을 강릉 시청에 정식으로 초청할 수 있었다.
“일단 앉으시죠.”
이미 한 식구라는 개념이 자리 잡은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 그지없었다.
가벼운 덕담을 시작으로 이야기꽃을 피운 우리는 드디어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이야기했던 통합 건을 슬슬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예. 아무래도 시장직은 계속 유지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삼척과 저기 영월처럼 일부 자치권을 인정받는 식으로요.”
아무리 강릉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체급 차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특히 경상권과 영동 지방 전체를 비교해봐도 인구수에서부터 2~3배 차이가 났다.
만약 이를 모르고 꿀꺽 삼키려고 든다면 도리어 우리 입이 찢어질 게 분명했다.
적어도 시스템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연합의 형태로 내버려 두는 게 옳았다.
“저희야 나쁜 제안은 아닙니다만…….”
“부디 많이들 도와주십시오.”
뭐, 자잘한 문제들쯤이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멋쩍게 웃는 시장들과 마지막으로 악수한 뒤 성명문 위에 차례로 서명했다.
이제 내일이면 연합이 탄생했다는 공식적인 발표가 라디오를 통해 전해질 것이다.
“저기, 박 시장님.”
“예?”
그렇게 서명을 끝내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대구 시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슬슬 부산도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산말입니까?”
“예. 규모가 너무 커지고 있어서요. 저러다가 무슨 난리라도 날까봐 걱정입니다.”
한때 자유 무역 지역으로 재건될 예정이었던 부산 요새는 현재 서울 주둔군이 급히 떠나면서 대구가 모든 걸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구 시장은 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주둔군이 있을 때는 얌전히 통제에 따르더니 날이 갈수록 과격 시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제만 해도 두 명이나 죽었다니까요.”
“혹시 물자가 부족합니까?”
“아뇨! 이 시국에 배급만 하루 두 번! 심지어 피복도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아니, 시위는 우리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일본 난민이 몰렸다고 해도 하루 두 번 배급이면 충분히 먹고살 만하다.
심지어 급여를 주고 고용까지 해주는데 왜 과격 시위가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진짜 억울한 듯 가슴을 치는 대구 시장을 보니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잠깐, 이거 설마.’
무언가 느낌이 비슷하다 싶더니,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본 기억이 있는 그림이다.
턱을 쓰다듬고 있던 나는 일본인 거주지역에서 겪은 일말의 사건을 떠올렸다.
“치안은 어떻습니까?”
“치안이요? 글쎄요. 범죄 신고가 들어오는 횟수가 적어졌다고 듣기는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 나가고 있는 와중에 정작 신고가 들어오는 횟수는 적어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챈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식은 커피를 내려놨다.
“아무래도 놈들이 개입한 것 같네요.”
“놈들이라고 하시면……?”
“일본 말고 더 있겠습니까.”
몰래 벌였던 공작도 실패하고 그나마 동아줄이던 미연방과의 끈도 떨어진 일본이다.
이제 놈들이 비벼볼 수 있는 곳이라고는 자국 피난민이 잔뜩 몰려있는 부산뿐.
어떤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 속내가 보이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한쪽이 죽어야 끝이 나겠어.’
맥없이 맞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더 이상 참아주면 그건 진짜 호구 병신이다.
이번 기회에 아예 끝을 볼 생각이었던 나는 눈을 감고 있다가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식사부터 같이하시죠.”
“아, 예! 그럽시다.”
일단은 아무렇지 않은 척 빙긋 웃으며 시장들과 함께 가까운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지금은 우선 남은 일정을 소화하고 강릉 연합을 개편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다.
“시장님, 양양에서 호출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끝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엠마가 미국에서 온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며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부른 것이다.
“금방 간다고 전해주십시오.”
전화로는 말해줄 수 없다는 말에 일단 가볍게 식사를 끝내고 양양으로 향했다.
* * *
감염체 군락이 빠른 속도로 진화하듯 우리 인간도 그에 맞춰 필사적으로 변화해왔다.
특히 과학 기술이 만든 화학 무기와 감염체 치료제는 전쟁 양상을 통째로 바꿨고, 끝내 이루어진 백신 개발은 이제 ‘감염’이라는 굴레로부터 인류를 해방케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땅을 좀먹고 있는 감염체 군락을 영원히 소거시키는 것뿐이었다.
‘팍스 아메리카!’
중부 방어선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던 미군이 드디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단순히 국지전이나 일반 공세가 아닌, 전 병력을 동원해 일시에 서부를 공격한 것이다.
어어?
진짜 저래도 되나?
나는 그런 과감한 움직임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일부 피해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백신을 맞았다고 한들 피를 흘리면 죽는 건 다들 매한가지였으니 말이다.
“2시간 전에 찍은 위성사진이에요.”
“……다들 약이라도 빨았습니까?”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미군은 감염체 군락을 너무도 손쉽게 격파해나가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단순 위성사진으로도 움직임을 관측할 수 있을 정도.
내가 의아해하자 엠마는 관련 자료를 인쇄해 가져와 이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군락 생성 속도가 확연하게 줄어들었어요. 그만큼 감염체와 변이종도 지난 가을 공세와 비교해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고요.”
“도대체 이유가 뭐랍니까?”
“레드존에 위치했던 상위 군락이 원인 같아요. 서로 연결되어있던 개체가 갑자기 소멸하니까, 그만큼 같은 데미지를 받은 거죠.”
개체 간 의식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장점은 동시에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쪽이 충격을 받으면 그만큼 연결된 다른 한쪽도 같은 피해를 본다는 거니까.
특히 다른 군락과 감염체를 지배하는 상위 개체가 소멸하면 그 피해가 더욱 클 터.
이에 심각한 표정으로 관련 자료를 살피던 엠마는 조용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과학자들 대부분은 이 가설이 옳다고 보고 있어요. 만약 우리가 현존하는 모든 상위 군락을 소멸시킨다면…….”
엠마는 마른침을 삼키는 것을 끝으로 결국 종전이라는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했다.
10년간이나 이어졌던 전쟁이 끝난다는 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 일단 진정 좀 하자.
우리는 다 식어 빠진 커피를 사이좋게 나눠마신 뒤 문을 열어 방을 환기했다.
“상부 반응은 어떻습니까?”
“다들 흥분한 기색이 역력해요. 현재 파악된 상위 군락만 로스앤젤레스에 하나, 또 후지산에 있는 것까지 총 두 개잖아요? 일단 그중 하나만이라도 처리해보자는 거죠.”
“본토는 한 번 실패했잖아요.”
“예. 그래서 후지산으로 의견이 좁혀지고 있어요. 미국과 멀기도 하고 또 대피시킬 민간인도 없으니까 딱 맞죠. 뭐, 일본 정부에서 거품을 물긴 할 건데, 그 정도야.”
응?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웅얼거리는 엠마를 바라봤다.
아니, 주제가 뜬금없이 상위 군락 이야기에서 일본 본토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것도 꼭 일본에 무언가를 투하할 것처럼 살벌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혹시 좋은 소식이 이겁니까?”
“네! 요즘 부산에서 난리라면서요?”
“아니, 그렇다고 전술핵을 떨굽니까?!”
뜬금없이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길래 와봤더니 갑자기 전술핵을 투하한단다.
물론 일본 정부가 있는 홋카이도 쪽이 아닌 도쿄 후지산 쪽이겠지만, 사실상 수도를 지워버리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토 수복만을 꿈꾸고 있을 일본이 얼마나 거품을 물고 매달릴지 뻔한 상황.
끈 떨어진 신세라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나는 이번 일로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지 엠마는 피곤한 얼굴로 읊조렸다.
“근데 문제는 광범위한 전파 방해로 무인기 접근이 힘들다는 거예요. 결국 유인정찰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건데, 무선 통신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죠. 마음 같아선 텔레파시 능력이라도 가지고 싶네요.”
“……텔레파시요?”
“네. 배터리랑 안테나 없이도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이요. 헤헤, 너무 김빠지죠?”
잠깐, 나 그거 있는 거 같은데? 순간 식은땀 한 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