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147화 (147/180)

<147화>

상위 군락을 완벽하게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본체만을 정확하게 타격해야 한다.

워낙 재생력과 증식 능력이 뛰어난 놈이라 웬만한 공격은 모두 버텨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상위 군락은 산 하나를 통째로 둥지화 할 수 있는 놈들이다.

후지산 크기를 생각하면 벙커버스터 한 발 가지고는 정말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정찰 후 이어지는 정밀 타격이 없다면 전술핵은 결국 전력 낭비에 불과한 것이다.

‘방법을 찾아볼게요.’

작게 한숨을 내쉰 엠마는 일단 더 알아보겠다는 말과 함께 길었던 대화를 끝냈다.

물론 미래 일기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던 나는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내가 미래 일기의 주인이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욱하고 올라오는 무언가가 목구멍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결국 말없이 사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터덜터덜 차를 몰아 아파트로 돌아갔다.

일몰이 내려앉던 하늘은 어느덧 어둑해지고, 강릉에는 또 한 번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달칵.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할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가 낡은 백열전구를 켰다.

원목 책상 위에는 늘 그렇듯 상속받은 미래 일기와 황금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펄럭.

강릉에는 벌써 봄이 찾아왔듯 박하나의 타임라인도 꽤나 많은 부분이 흘러갔다.

나는 습관적으로 미래 일기를 펼쳐 그동안 쌓인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잘하고 있으려나.’

하루 동안 근처 가정집을 털며 식량을 비축해두었던 박하나는 드디어 집 밖을 나섰다.

그리고 길가에서 소음이 적은 자전거를 구한 뒤 조심스럽게 이동을 시작했다.

원래 목표로 했던 대피소가 아닌 인구 밀집이 적은 도시 외곽을 목표로 삼은 그녀.

물론 이동 과정에서 감염체 무리와 마주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내 가르침을 잊지 않은 그녀는 가까스로 감염체를 따돌리며 도시를 빠져나왔다.

그나마 후쿠시마현 중에 인구 밀집이 제일 적은 위성 도시 중 하나여서 다행이지, 만약 발원지인 도쿄 한복판이었다면 도로에서 꼼짝없이 포위당해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도시를 빠져나온 그녀는 하루를 꼬박 달려 한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근처에 열차역이 있는 것치고는 무척이나 인적이 드물고 작은 마을이었는데, 근처에 산과 개울이 있어서 마실 수 있는 식수와 장작을 구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박하나는 조심스럽게 마을을 정찰해 산과 가장 가까운 가정집 하나를 선정했다.

‘운이 좋았지.’

그런데 하필 거기서 집주인이 차마 챙기지 못하고 떠난 물자 창고를 발견해냈다.

그 안에는 무려 30㎏이 넘는 쌀과 산에서 수확한 말린 나물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운 좋게 도시를 빠져나온 박하나는 또 한 번 운 좋게 좋은 은신처를 발견한 것이다.

와아, 장난 아닌데? 정말 깜짝 놀란 나는 이 집에 정착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녀 또한 이에 쉽게 수긍해주며 집안에 짐을 풀고 본격적인 겨울나기를 시작했다.

뭐, 그 뒤로는 별 탈 없이 쌓인 눈이나 치우며 한가로운 일상이 계속된 건 덤이었다.

‘저, 저는 박하나라고 해요!’

‘응 알아.’

남는 게 시간뿐이다 보니 박하나는 일기를 통해 계속 나와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정보를 감추거나 일부 필터링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의사를 전달하는 부분에서는 핵심 의미는 빠짐없이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아마 그녀에게 있어 이 일기장은 현실을 잠시 잊게 해줄 유일한 수단이었겠지.

물론 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일기를 열심히 주고받으며 많은 가르침을 내려주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평화로운 일상도 잠시. 겨울이 끝나자 슬슬 비축 물자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껴먹는다고 해도 겨우 이만한 양으로는 일주일도 버티기 힘들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식량을 구해야 한다는 조언과 함께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박하나는 조심스럽게 집을 빠져나와 마을 시가지로 향했다.

‘성공했을까?’

물론 여기까지가 어제 내용이었고 곧 다가오는 밤이 일기가 갱신되는 시간이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시계와 어둑한 창밖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그 순간 만년필이 방정맞게 움직이더니 곧 새로운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떨리는지, 작게 심호흡을 한 나는 꼼꼼하게 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좋은 스승을 만난 이후 평범한 일반인에서 멸망한 세상을 살아가는 생존자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다. 작은 체구 속에 숨겨진 대담함과 용기, 거기에 특유의 조심성까지 더해지니 판단은 정말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일기의 조언을 따라 근처에 위치한 가정집을 목표로 삼았다. 다행히도 거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감염체 또한 마을 중앙을 어슬렁거리는 한두 마리 말고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지금이 기회다.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담을 넘었다. 그리고 천으로 감싼 돌멩이로 유리창 한쪽을 부수고 들어가 이미 전기가 끊겨버린 냉장고, 부엌 찬장, 창고와 차고 등을 열심히 수색했다.]

좋아, 잘하고 있다. 이제 이런 게 익숙해지면 정찰 범위를 더 넓힐 수 있다.

나는 마치 제자를 기르는 스승의 심정으로 박하나의 행보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대다수 식량은 부패했거나 마을을 떠난 주민들이 모두 챙겨간 지 오래였다. 3시간을 넘게 돌아다닌 ‘그녀’는 결국 고양이 통조림 몇 개만을 얻은 채 파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다른 가정집도 사정이 같은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점점 조급해지고 있었다. 당장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마당에 체력만 소모하고 있다니. 아마 ‘그’가 봤다면 무척 실망할 것이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결국 조언을 잠시 망각하고 모험을 떠나기로 했다. 목표는 마을 중앙에 있는 번화가. 길가를 지나가다가 분명 문이 닫혀있던 편의점과 오래된 음식점 몇 곳을 본 기억이 있었다.]

잠깐, 지금까지 잘 해오다가 갑자기 왜 위험한 방향으로 급발진을 하려는 거야?

깜짝 놀란 나는 움직이고 있는 만년필을 나도 모르게 붙잡고 답장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일기는 이미 지나간 일일 뿐,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마을 중앙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적했던 외곽과는 달리 중간중간 보이는 감염체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몸에 바른 오물 덕분에 다행히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편의점에 도착했다. 마을에 유일하게 딱 하나 있는 편의점은 이미 약탈당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차마 채 챙겨가지 못한 물자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이를 가방에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창고 뒤쪽에 위치한 문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깜짝 놀란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와 마주치고 말았다. 사람? 같은 생존자였다.]

설마 이런 한적한 시골 마을에 아직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는 박하나도 마찬가지였는지 다른 곳으로 도망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중년 남성은 깜짝 놀란다. 하지만 곧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겨누었던 무기를 내려놓는다. 해칠 생각은 없다. 어디서 온 누구냐, 만약 갈 곳이 없다면 자신과 함께 가자. 그는 무척 호의적인 태도로 접근했다.]

[하지만 조언을 잊지 않고 있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고 이내 편의점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남성은 순간 태도가 돌변하며 그 뒤를 따라왔다. 험악한 얼굴과 매서운 눈동자, 그 의도가 너무 뻔했다.]

[겁에 질린 ‘그녀’는 따라오는 남자를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재수 없게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비명을 지를까? 아니, 그랬다가는 근처에 있는 감염체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것이다.]

[놈은 가방을 뺏으려 했고 몸싸움이 이어졌다. 힘에서 밀린 ‘그녀’는 점차 지쳐갔고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아악! 그 순간 한차례 짧은 비명이 들리며 놈이 복부를 움켜잡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을 칼로 찔렀다. 살집을 파고드는 생생한 감촉에 ‘그녀’는 덜덜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자리에서 도망쳤다. 저 멀리서 비명을 듣고 감염체 두 놈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감염체는 피를 흘리는 남성에게 시선이 쏠려 있었고 덕분에 무사히 마을에서 벗어나 은신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피 묻은 손을 씻고 장롱으로 들어가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썼다.]

[계속된 성공은 자만을 불러왔다.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그녀’는 비참한 현실에 좌절하고 또 상처 입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으며 또 칼을 찌른 오른손은 부르르 떨려왔다.]

위기에서 벗어난 박하나가 울고 있는 서술을 끝으로 일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그녀가 살았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첫 살인.

아직은 시기상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겪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제 고작 20살이 된 어린 그녀가 과연 삶을 짓누르는 무게를 감내할 수 있을까.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만년필을 들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쓰지 못하고 내려놨다.

후우.

사람을 죽였다고 덜덜 떠는 애한테 부탁이나 하려고 했던 내가 순간 혐오스러웠다.

일본이고 나발이고 우리 일은 우리가 해결해야지 박하나가 나설 일이 아니다.

스스로 자책한 나는 미안한 마음을 잔뜩 담아 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사각.

부디 꿋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끝까지 투쟁을 포기하지 않기를 빌며 말이다.

.

.

.

.

“끅, 끄윽.”

그 시각 이불을 뒤집어쓴 박하나는 수건으로 연신 손을 닦으며 눈물을 훌쩍였다.

분명 물로 씻고 닦았음에도 손에 남은 감촉과 피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탓이다.

물컹했던 살과 근육,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에 맞춰 후두둑 흘러내리던 붉은 핏물.

이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며 울고 있는 박하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사각사각!

그 순간 책상 위에 소중히 모셔둔 모나미 볼펜이 일기장 위를 춤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참동안 울고 있던 그녀는 허둥지둥 장롱에서 빠져나와 일기 앞으로 다가갔다.

나 무서웠어요.

나 진짜 무서웠다고요!

외로운 시간을 버티게 해준 유일한 친구이자 또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미래 일기다.

박하나는 서러운 눈물을 터트리며 이 상황을 지켜봤을 ‘그’의 조언을 기다렸다.

“응……?”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기의 내용은 그동안 봤던 조언과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완전히 바뀐 글씨체에 깜짝 놀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닦고 두 눈을 비볐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그 시작을 넘지 못하면 끝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 일기를 받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굴레가 정해져 있었다는 걸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눈물을 닦고 울음을 멈춰라. 꿋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내일을 준비하라. ‘그’가 ‘그녀’를 도왔듯, ‘그녀’ 또한 ‘그’를 도울 것이다. 다가오는 운명에 대비해 성장하고 또 성장하라. 오직 상속자를 위해.]

박범석이 쓴 내용은 모조리 검열되어 단 한 글자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알 리가 없던 박하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코를 훌쩍 삼켰다.

“내가…… 도와야 한다고?”

모든 톱니바퀴와 계산은 오직 미래 일기라는 전달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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