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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52화 (152/180)

<152화>

박하나는 겨우 구한 청테이프를 길게 뜯어 날붙이와 나무 자루를 하나로 연결했다.

찌익, 찌익.

그 모습이 어찌나 경건한지 마치 성경을 만지는 신실한 수녀를 연상케 했다.

그만큼 신중하게 작업을 끝낸 그녀는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됐다.”

창고에서 우연히 습득한 빗자루의 자루 끝을 부서트리고 날카로운 식칼을 연결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는데 청테이프로 튼튼히 묶어두니 꽤 그럴싸한 게 나왔다.

이게 정말 통할까?

코를 훌쩍 삼킨 박하나는 실시간으로 집필되고 있는 일기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은 제작이 어렵지 않고 재료도 덜 요구되는 효율적인 무기다. 또 숙련도와 상관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점, 상대와 거리를 벌리고 싸울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재 ‘그녀’에게 가장 알맞은 무기다.]

그러자 일기는 기다렸다는 듯 확신을 주며 불안해하는 상속자를 안심시켜주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창을 찔러보았다.

푹!

학창 시절에 배구 동아리에서 활동했을 만큼 기본적인 운동 신경은 타고난 박하나다.

또 먹고 살기 위해 했던 온갖 궂은일 덕분에 체력과 완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살아남은 건 요행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녀는 다부진 주먹을 꽉 쥐었다.

‘나가자.’

미래 일기의 첫 번째 과제였던 무기 제작과 그에 대한 활용까지 무사히 완수해냈다.

힘차게 각오를 되새긴 박하나는 미리 준비한 가방과 수통을 모두 챙겼다.

그리고 현관문을 1~2㎝ 정도만 열어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를 살펴보았다.

끼기긱, 끼익!

일주일 전만 해도 한적하기 그지없던 마을 외곽에는 감염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진 이후, 활동량이 늘어난 놈들이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모양이다.

만약 일기가 이를 경고해주지 않았다면 자신도 저 수많은 감염체 중 하나가 됐을 터.

마른침을 꿀꺽 삼킨 박하나는 자세를 낮춘 채 조심스럽게 현관을 빠져나왔다.

후웁.

그동안 모은 감염체 오물을 몸통과 가방에 발라 냄새를 완벽하게 지운 상태였다.

덕분에 들키지 않고 담을 넘어 놈들이 어슬렁거리는 거리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은신처 바로 뒷산, 나무가 을씨년스럽게 흔들리는 우거진 숲으로 진입했다.

‘이틀은 걸린다고 했어.’

부동산에서 찾아낸 지도에 의하면 이런 산을 두 개는 더 넘어야 국도가 나온다.

그 경로를 통해 후쿠오카까지 갈 생각이었던 박하나는 주머니 속 일기장을 꺼냈다.

[후쿠오카는 한반도와 가까워 상륙 거점으로 사용하기 딱 좋은 교두보다. 하지만 주변에 전파 방해를 일으키는 하위 군락이 정보 취득을 방해하고 또 선발대를 유인하기 위한 함정을 만들어 둔 상태다.]

[선발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현재 ‘그녀’가 유일하다. 후쿠오카시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으로 이동해 하위 군락이 어디 있는지, 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지 파악해 ‘그’에게 미리 경고를 보내주어야 한다.]

박범석이었다면 일기를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강제로 뜯어말렸을 위험한 임무였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깐 미래 일기는 조언자로 위장한 채 협력을 유도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상속자의 의무, 일기를 가진 자라면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과제였으니까.

‘할 수 있어.’

그동안 겪어온 모든 시련은 오직 ‘그’를 돕기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하다.

처음으로 사명감이라는 걸 느끼게 된 박하나는 어두운 숲속으로 혼자 걸어갔다.

사각, 사각, 사각!

박범석이 일기장에서 눈을 뗀 사이, 두 번째 상속자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 * *

쑥대밭이 된 항만을 걷고 있는데 압송되어 끌려가던 자위대 포로가 다급히 외쳤다.

“뭐랍니까?”

이에 함께 걷고 있던 현지 직원이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통역해주었다.

“대한민국 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답니다. 그전까지는 재판받지 않겠다고…….”

짠물 몇 번 마셨으면 정신을 차렸을 법도 한데 아직 현실 파악이 더딘 새끼가 있다.

“이봐! 이 새끼 다시 바다에 던져버려!”

나는 지랄하는 자위대 포로를 다시 바다에 던지라고 지시한 뒤 미간을 찡그렸다.

풍덩!

놈이 진짜로 바다에 던져지자 주변에서 함께 끌려가던 다른 포로들은 사색이 됐다.

방위군은 그제야 얌전해진 놈들을 호송 차량에 태우며 임시 수용소로 끌고 갔다.

살려준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뭐 요구? 하여튼 이 새끼들은 양심이란 걸 모른다.

나는 벌써 수백 명이나 사로잡은 자위대 포로를 노려보다 이내 입에 담배를 물었다.

‘치우는 것도 한세월이겠네.’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이 다친 시내만큼이나 부산항도 생각보다 피해가 심각했다.

특히 방파제와 주요 필수 시설들이 무너져 내린 것은 정말 뼈아픈 손실이었다.

저걸 다 복구하려면 결국 인력과 시간이 문제인데, 어느 세월에 다시 짓고 앉아있나.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쑥대밭이 된 항구 방파제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나?”

그런데 그 순간 김태하 소장과 구 단장이 사이좋게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한참 전투 현장을 지휘하다가 항구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직접 들린 모양이었다.

후우.

내가 말없이 담배만 뻑뻑 피우자 구 단장은 얄밉게 웃으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뭐, 머리가 아플 만도 하지. 이제 좀 끝나나 싶었는데 일본으로 원정을 가게 생겼다잖아.”

“어허, 이 사람이…….”

“내가 틀린 말 했나? 참, 범석이도 가만 보면 박복해. 정말 꾸준히 재수가 없다니까.”

한반도 문제만 해도 골치 아픈데 바다 건너 일본에서 상위 군락과 싸우게 되었다.

앞으로 할 개고생에 몸서리를 친 나는 낄낄 웃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두 분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담배나 좀 줘봐.”

하지만 그건 이 두 사람도 마찬가지라 웃고 있는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우리는 사이좋게 담배를 태우며 석양이 떨어지고 있는 부산 앞바다를 감상했다.

물론 군인 셋이 한자리에 모이면 하게 되는 이야기는 보통 거기서 거기였다.

“보니까 항공 정찰까지는 가능하겠더군. 최대한 고도를 높여서 날면 되니 말이야.”

“어차피 착륙 못하면 의미 없어. 깊은 땅굴에 숨어있는 놈들을 무슨 수로 찾겠나?”

군락이 내뿜는 강력한 전파 방해로 인해 무인기는 물론 유인 항공기에 장착된 전자기기가 오작동을 일으킬 위험이 존재한다.

이는 다른 정찰 수단인 드론이나 캠을 장착한 군용 RC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사람이 가야지.”

둥지를 깊게 판 상위 군락의 위치를 찾아내려면 지상에서 탐사 장치를 써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탐사 장치를 가지고 가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상위 군락이 자리 잡고, 그 아래 수많은 하위 군락과 감염체가 득실거리는 지옥.

그런 곳에 정찰대만 단독으로 보낸다는 건 사실상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본토 진입’이라는 선행 조건부터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후쿠오카.”

“그만한 곳이 없긴 해.”

거리상 부산과 제일 가깝고 중간에 대마도라는 중간 기착지도 존재하는 곳이다.

후쿠오카만 점령할 수 있다면 한반도 내 병력을 일본으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은 물론.

근처에 전파 방해를 발생시키는 하위 군락을 제거해 일부 통신을 복구할 수도 있다.

뭐, 평소였다면 위험 부담이 너무 커서 포기했겠지만, 미연방 항공모함이 오고 있는 마당에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한반도 연합군은 사실상 총력전이라 생각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할 예정이었다.

“일단 선발대부터 투입해보죠.”

“또 네가 가려고?”

선발대라는 말에 김태하 소장과 구 단장이 기겁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임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강릉 특임대뿐이다.

“우리 애들보다 잘 싸우는 애들 있어요?”

“재수 없는 놈.”

“할 말 없게 만드네…….”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잘난 체하자 두 사람은 분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매번 선두로 나서는 나와 특임대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일단 대마도나 이키섬을 보급 거점 삼고 차근차근 진행해보죠. 후방 기지만 마련되면 별 무리 없이 끝낼 수 있을 겁니다.”

항공모함 도착까지 앞으로 일주일이라 했으니 우리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나는 어느새 정리가 다 끝나가는 항만을 둘러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그 순간 강릉에 잠시 짐을 챙기러 갔던 경태가 가방 하나를 짊어진 채 다가왔다.

“가져왔어?”

“네, 이거 맞죠?”

가방 속에는 다름 아닌 할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미래 일기와 만년필이 들어있었다.

둘 다 무사히 도착한 걸 확인한 나는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태에게 물었다.

“뭐, 특별한 일은 없었지?”

“네? 그냥 백지던데요.”

역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책이랑 평범한 만년필로 보이는구나.

하긴 할아버지 집을 자주 들락거리는 상식 아저씨도 발견하지 못했던 거니까.

“고마워.”

“예! 들어가세요, 형님.”

나는 안도감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며 미래 일기와 함께 개인 막사로 걸어갔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가져온 간이 책상 위에 미래 일기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원정은 처음인데 소감이 어때?”

한동안 강릉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부산으로 가지고 왔다.

사실 앞선 미래를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섣부름 기대감이 더욱 컸지만 말이다.

나는 오랜만에 만년필을 꺼내 책이 그동안 써 내려온 일기를 읽으려고 했다.

사각, 사각, 사각!

그런데 그 순간, 만년필이 갑자기 지랄발광하며 엄청난 속도로 집필을 시작했다.

뭐야, 이 새끼 왜 이래? 깜짝 놀란 나는 잠시 뒤로 물러나 조심히 일기를 읽었다.

[……감염체가 기괴한 울부짖음과 함께 달려든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준다. 달려오는 적, 손에 쥔 창! 지금이 기회였다.]

[다리 한쪽을 땅에 딛고 창을 앞으로 내민다. 노려야 할 곳은 손쉽게 뇌를 파괴할 수 있는 양쪽 눈이다. 모든 힘을 오로지 버티는데 사용한 ‘그녀’는 감염체가 달려오는 힘을 이용해 그대로 일격을 가했다.]

[푹! 창날이 오른쪽 눈을 관통하며 뇌까지 닿았다. 감염체는 미친 듯이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창대를 놓지 않고 버티고 섰다. 잠시 뒤 놈은 움직임을 멈추며 싸늘한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잠깐, 은신처에 있어야 할 녀석이 왜 갑자기 감염체랑 싸우고 있는 거야.

나는 그동안 밀린 일기를 읽으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리고 곧 미래 일기가 제멋대로 판단해 박하나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걸 알게 됐다.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은 나는 서둘러 만년필을 쥐고 당장 도망치라 말하려 했다.

찌이익!

하지만 미래 일기는 내가 쓰는 글을 모조리 검열 처리해버리며 제멋대로 움직였다.

[첫 번째 감염체를 무사히 처치한 ‘그녀’는 안도감과 동시에 희열을 느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친다 해도 도망치지 않고 맞설 거야. 그 모습은 꼭 탈피하는 나비를 보는 듯했다.]

[‘그녀’는 쓰러진 감염체를 뒤로한 채 가드레일을 넘었다. 그리고 버려진 차들로 가득한 도로를 가로질러 후쿠오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일주일, 그전까지 주어진 과제를 완료해야 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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