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153화 (153/180)

<153화>

처음에는 박하나에게 도움을 청해보는 방법도 정말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일단 통신 장비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치트키 같은 능력이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미래 일기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마음 한편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그 모두가 배신한다고 해도 녀석만큼은 끝까지 아군일 거란 믿음이 있었으니까.

‘뭐하냐, 너?’

하지만 놈이 멋대로 박하나를 조종하려던 걸 발견했을 때는 책과 만년필을 이 세상에서 지워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망가진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살릴 할아버지의 유산이라고 생각했지, 내 이득을 위해 사람을 죽인다면 그건 유산이 아니라 없애야 하는 흉물이었다.

녀석도 그걸 아는지 잠시 집필을 멈추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려고 했다.

하지만 일기가 멈춘다고 해서 책 너머 박하나가 행보를 중단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녀는 미래 일기의 상속자라는 역할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다.

[주변 사람은 ‘그녀’를 묵묵한 아이, 또 조심성이 유난히 많은 겁쟁이로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그녀’는 보이고 들리는 것에 민감하며 작은 변화에도 예민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단점은 감염체가 득실거리는 이 세상에선 엄청난 장점이었다.]

[‘그녀’는 생존에 있어 타고난 천재다. 자신을 숨기는 법을 알며 또 필요할 때는 싸워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그녀’는 최단 경로였던 국도를 사흘 만에 주파, 나흘째에는 후쿠오카 외곽까지 도달하는 기염을 토했다.]

평범한 민간인인 줄 알았던 박하나는 생각보다 일기의 과제를 잘 수행하고 있었다.

아니, 처음에 좀 얼을 탄 걸 빼면 기초 체력도 준수하고 완력도 평균 이상.

특히 집중력과 그 집념 하나만큼은 나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타고난 부분이 있었다.

아마 갓 입대한 신병 병아리였다면 저격수 보직으로 데려다 직접 가르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평가도 결국 미래 일기라는 초월적인 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까운 거리에 감염체가 있다. 코너를 돌면 바로 보이니 주의해야 한다. 시선이 끌리지 않은 틈을 이용해 선공을 가하자. 만약 다른 놈이 합류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물러나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도 좋다.]

나 때는 어쩌다 한 번씩 미래를 예언해주더니, 그녀에게는 거의 실시간으로 위험을 경고하며 대처 방법까지 친절히 알려줬다.

이 정도면 거의 치트키? 아니, 초보자를 키우는 생존 튜토리얼에 가깝지 않은가.

덕분에 박하나는 경험을 쌓아감과 동시에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후쿠오카는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망원경을 꺼낸 ‘그녀’는 그 검은빛이 그을림이나 어둠 때문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도시는 이미 수많은 감염체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특히 전파 방해를 발생시키는 하위 군락은 후쿠오카 타워를 기둥 삼아 지하 깊숙한 곳까지 둥지를 만들어두었다. 또, 배가 들어오는 주요 항구와 진입로에는 침입자를 막을 온갖 함정과 변이종이 대기 중이었다.]

학습이라는 걸 할 줄 아는 군락 놈들답게 역시 웬만한 대비는 다 해둔 상태다.

아무리 나와 특임대라 해도 이를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피해 가야지.’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무사히 후쿠오카를 점령하고 두 번째 상속자를 구하자.

나는 박하나가 목숨을 걸고 전해준 정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작전을 수립했다.

물론 내 특이함을 아는 일행들은 이젠 익숙하다는 듯 적극적으로 협력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일주일 뒤, 부산 앞바다에는 미연방 항공모함이 도착했다.

“만나서 반갑소, Mr. 박.”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항모강습단장 마이클 소장. 무려 별 두 개인 해군 장군이 부산을 직접 찾아왔다.

나는 딱 봐도 노련해 보이는 그와 반갑게 인사한 뒤 함께 항구로 걸어 나왔다.

저 멀리 부산 앞바다에는 엄청난 크기의 항공모함이 시야를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규모가 작다.’

10년째 이어진 군축의 영향으로 막강하던 호위함 전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병력 또한 대부분 효율이 좋은 구형 폭격기나 지상군을 지원해줄 수송선이 주류였다.

내가 실망했다고 여겼는지 마이클 소장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아꼈다.

“멋지네요.”

하지만 해외로 병력을 파병한다는 것 자체는 오직 미연방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전하며 마이클 소장과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감염체 규모는 우리 쪽에서도 충분히 예상했던 바요. 하지만 하위 군락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까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소.”

당연히 모르지, 탐사 장치로만 찾을 수 있는 지하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으니까.

아마 미래 일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 존재조차 모른 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연기 하며 자연스럽게 방향을 유도했다.

“그래서 선발대가 필요한 겁니다. 군락을 찾는 즉시 표적 신호를 보낼 테니, 벙커 버스터나 시원하게 한 발 꽂아주십시오.”

“그건 믿어도 좋소.”

마침 창공에는 수십 대가 넘는 수송 헬기와 항공기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하늘 위 남겨진 하얀색 궤적을 좇으며 저 멀리 바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해가 뜨기 전 가장 밝은 새벽.

기나긴 통로의 끝이 언젠가는 보이길 빌며.

* * *

드디어 부산에서 출정한 연합군은 현재 주인이 없는 대마도에 기지를 건설했다.

그사이 내가 지휘하는 선발대는 바로 앞 이키섬에 상륙해 진입할 타이밍을 노렸다.

첫 번째 목적지는 함정이 도사리는 후쿠오카가 아닌 같은 현에 속한 이토시마시.

보급 기지가 건설되었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 연합군 선발대는 이키섬을 떠났다.

철썩! 철썩!

어둠이 짙게 깔린 적막한 바다. 파도가 넘실거릴 때마다 선박이 위아래로 솟구쳤다.

하지만 능숙하게 수송선에서 내린 우리는 고무보트를 타고 해안가에 상륙했다.

철컥!

물론 그 선두에서는 특수 장비로 중무장한 나와 우리 1팀이 해안가로 진입하고 있었다.

[통신 상태 양호합니까?]

[아직 듣는 건 문제 없습니다.]

지난 레드존 전투로 특임 대원들 중에 반절이 현장에서 사망하거나 부상으로 은퇴했다.

하지만 우리와 합을 맞췄던 미국 특수부대 델타팀과 정보사 정예 요원들이 빈자리를 채워주며 선발대 전력은 더욱 급상승했다.

[2팀, 오른쪽 해안 확보 완료.]

[200m 반경까지는 별 이상 없습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정예인 걸 증명하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구역을 확보해주었다.

덕분에 할 일이 반으로 줄어든 나는 어두운 해안가를 살피며 진입 지시를 내렸다.

“이동.”

아무리 같은 후쿠오카 현이라 해도 단순 거리로만 100㎞가 훌쩍 넘는다.

이를 도보로 이동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동 수단과 경로를 먼저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나는 일단 1팀과 함께 해안가를 빠져나와 저 멀리 보이는 리조트로 걸어갔다.

그러자 나머지 팀들도 기다렸다는 듯 넓은 범위를 커버하며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사박.

인구 밀집이 심하지 않았던 외곽 변두리 지역이라 해안가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하지만 리조트와 가까워질수록 지난날의 참상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철컥!

리조트 주차장으로 진입한 나는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팀원들을 멈추게 했다.

끼이익, 끽!

그러자 감염체 한 마리가 버려진 자동차 사이를 비틀비틀 지나가고 있었다.

물론 그 뒤에는 이보다 많은 감염체가 어슬렁어슬렁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즉시 소음기가 장착된 아음속 권총을 들고 놈들의 머리를 겨누었다.

퓨슝!

퓨슝!

퓨슝!

맥빠지는 휘파람 신호에 맞춰 권총을 든 대원들이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털썩!

어슬렁거리던 감염체는 하나 같이 끈이 풀려버린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척하면 척인 대원들에게 엄지를 들어준 뒤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찾았다.’

주차장 한쪽에서 리조트가 셔틀버스로 운영하던 작은 버스 두 대를 발견했다.

운 좋게 이동 수단을 찾아낸 나는 조심스럽게 버스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덜컹!

타이어 공기압도 충분하고 핸들, 브레이크, 엑셀 등등 모두 멀쩡하게 달려있다.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차량 배터리를 충전하고 일단 시동부터 걸어보았다.

부릉!

연료가 어느 정도 채워져 있었는지 버스 두 대 모두 정상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나는 기쁜 마음에 창문을 열고 기다리던 대원들에게 어서 타라고 말하려 했다.

“엥?”

그런데 그 순간, 낡은 외형만큼이나 낡아 있던 엔진에서 덜덜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끼이이이익!

주차장 근처를 배회하던 감염체 무리가 그 소음을 들었는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곧 사방으로 퍼져나가 리조트 전체에 있던 감염체를 불러버렸다.

[감염체 접근 중.]

[입구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대원들은 침착하게 버스로 올라타며 창문 밖으로 총구를 거치했다.

나머지 선발대팀 또한 각자 바리케이드를 구해 전투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형님, 뭐해요?”

“어? 으응.”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 나는 대원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총구를 들었다.

슬슬 은퇴할 때가 됐나?

한창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대원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내 나이가 실감났다.

탕!

리조트의 감염체들을 빠르게 정리한 우리는 곧 버스에 탑승해 후쿠오카로 출발했다.

* * *

“힉!”

그 시각, 편의점 한쪽 구석에 쪼그려 있던 박하나가 몸을 움찔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치 강박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커튼으로 가려진 창밖을 정신없이 살펴보았다.

잘못 들었나? 어둠이 짙게 깔린 길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박하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바닥에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아파.”

일기가 내준 과제를 무사히 해냈을 때만 해도 방방 뛰면서 기뻐했었다.

하지만 전망대를 내려오자 만난 감염체에게 그만 오른쪽 팔이 물리고 말았다.

선명한 이빨 자국과 퉁퉁 부어오른 상처, 이런 경우는 보통 한 가지 뿐이다.

“……그럼 죽는 거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방심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들떠있던 나머지 실수하고 말았다.

백신은커녕 치료제조차 가진 게 없었던 박하나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훌쩍.

하지만 그녀가 아직도 죽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일기장 덕분이었다.

자신이 절망하며 죽으려고 하던 당시, 녀석이 갑자기 이런 말을 적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면역이라고?”

아무리 물리고 바이러스가 들어가도 자신은 감염되지 않는 완전한 면역자다.

그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던 박하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일기장을 펼쳤다.

사각, 사각, 사각!

그러자 함께 껴있던 모나미 볼펜이 억울하다는 듯 진동하며 서둘러 집필을 시작했다.

나 못 믿어?

박범석도 면역이라니까?

물론 몸으로 하는 대화가 통할 리가 없던 박하나는 훌쩍훌쩍 미래 일기를 읽었다.

[두 번째 상속자인 ‘그녀’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덕분에 무사히 본토로 넘어온 ‘그’는 후쿠오카로 출발했다. 이제 남은 것은 지하 깊숙이 숨은 하위 군락을 소멸시키고 이 일대를 해방하는 것뿐이다.]

그럼 이제 만날 수 있는 거야? 박하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일기를 계속 읽어나갔다.

[하지만 이는 겨우 여정의 시작일 뿐, 앞으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성장하라. 계속 나아가라. ‘그녀’는 상처가 아무는 즉시, 후쿠오카를 빠져나와 다른 규슈 지방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이익!”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박하나는 미래 일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열심히 주먹질을 했다.

‘야 이 개새끼야!’

그 모습은 꼭 지난날, 소리를 지르며 분노하던 박범석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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