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155화 (155/180)

<155화>

후쿠오카 시를 점거했던 군락이 소멸하면서 감염체 무리에 대한 통제가 풀렸다.

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은 즉각 바다를 건너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진격!’

군락이 사라진 도시를 청소하는 건 뿌리 잃은 잡초를 뽑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연합군은 굳이 화력을 동원해가며 감염체로 더러워진 후쿠오카를 정화했다.

콰아앙! 쾅!

쿠르르르릉-!!

미연방으로서는 본인들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일 것이고, 김태하 소장은 실전 호흡을 맞춰보기 위해 기꺼이 이 화력 쇼에 동참해주었다.

재주는 곰이 다 부린 것 같은 기분이지만, 본인들이 원한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덕분에 감염체 무리는 깔끔하게 제거가 되었고, 원정을 썩 달갑지 않아 하던 병사들도 사기가 잔뜩 오른 채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노련한 지휘관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후쿠오카 시를 점령한 연합군은 본격적으로 기지 건설을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잉!

드드드드득! 철컹!

상위 군락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 침입자의 존재를 이미 눈치 채고도 남았을 터였다.

혹여나 감염체 웨이브가 움직이기 전에 서둘러 방어선을 구출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고성 방어선 당시 사용했던 컨테이너 공법을 이용해 방어선을 쌓았다.

또, 지난번 경험을 토대 삼아 콘크리트로 보강하고 철근을 중간에 심었다.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동원한 만큼 순식간에 구축되기 시작한 거대한 회색 요새.

이 정도면 웬만한 감염체 웨이브가 몰려와도 한 달은 너끈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침몰.’

그 시각 상위 군락의 침공을 받은 일본 상황은 점점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홋카이도 남부가 뚫린 것을 기점으로 기어코 최후의 방어선까지 돌파당한 것이다.

이제 남은 곳은 일본 정부가 후퇴하고 또 후퇴해서 남은 아사히카와 시뿐.

그곳마저 뚫린다면 사실상 일본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 제발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상륙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 정부는 급히 특사부터 보냈다.

이젠 자존심이고 뭐고 없는지, 일단 마이클 소장 앞에 대가리부터 박고 본 것이다.

이 새끼들 뭐지?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온갖 음흉한 계략과 패악질로 민폐만 끼치더니, 상황이 이 꼴이 되고 나서야 뻔뻔하게 도게자를 하며 도움을 청하고 있다.

“내보내.”

물론 미연방과 강릉 연합이 호구도 아니고 이런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던 특사는 헌병들에게 붙잡혀 후쿠오카 밖으로 끌려 나갔다.

제발 살려 달라 외치는 그와 위기에 처한 일본을 동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됐나?

나는 상황이 얼추 정리되기 시작하자 휴식을 핑계로 개인 막사에 틀어박혔다.

무사히 일본으로 넘어왔으니 이제 슬슬 근처에 있을 박하나와 합류할 생각이었다.

“뭐야, 어디 가?”

하지만 빌어먹을 미래 일기 녀석은 상속자의 조우를 그리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박하나는 이미 군락이 사라진 후쿠오카를 떠나 하염없이 동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사각, 사각, 사각!

[‘그녀’는 수많은 위기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첫 번째 과제를 완수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으며 동시에 훌륭한 생존자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작이었을 뿐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살던 후쿠오카를 떠나 규슈 지방 가장 동쪽에 있는 사가노세키 항구로 향한다. 이는 시코쿠 지방을 통해 도쿄까지 이어지는 <검열 삭제>다. 상속자를 위한 두 번째 과제를 무사히 완수하자.]

이제 좀 만나나 싶더니 그새 박하나를 빼돌려 규슈 지방 동쪽으로 보내버렸다.

이젠 화낼 힘조차 남지 않은 나는 힘없이 의자에 앉아 미래 일기를 노려보았다.

현재 녀석이 원하는 건 이제 막 민간인 티를 벗기 시작한 박하나의 성장이다.

물론 그 뒤에는 검열이라는 단어가 숨겨진 걸로 보아 다른 꿍꿍이도 있어 보였다.

탁!

그래,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미래 일기를 거칠게 던져버린 나는 그대로 막사를 빠져나와 지휘 본부로 향했다.

“장거리 정찰을 떠나겠다고?”

“예. 원래 예정이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모든 물자와 병력이 넘어오고 기지가 건설되기까지 적어도 보름은 넘게 걸린다.

그사이 놀고먹을 수만은 없었던 우리는 현재 빽빽한 정찰 일정을 짜둔 상태였다.

전파 방해라는 제약이 있는 만큼, 사전 정찰은 꽤나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굳이 자네가?”

하지만 김태하 소장과 구 단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난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중요 전력으로 취급받는 특임대를 투입하기에는 좀 아까운 임무였다.

말마따나 후쿠오카로 넘어와서 개고생했는데 휴식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는가.

내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주던 김태하 소장도 이번 작전은 만류하려는 눈치였다.

“확인해볼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조금만 양해해주십시오.”

하지만 내 거듭된 부탁에 결국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행을 벌이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무선 통신까지 복구됐으니 허락해도 되겠지.

작전 지도와 무전기를 챙긴 나는 짧은 안부를 끝으로 지휘 막사를 나오려고 했다.

“Mr. 박.”

그런데 그 순간,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이클 소장이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밖으로 함께 나가자는 말에 조용히 막사를 빠져나와 그와 함께 걸어갔다.

“정찰을 떠난다고 들었소만.”

“예.”

“혹시 위험한 임무요?”

“아뇨, 어차피 같은 규슈 지방입니다. 군락이 없으니 그리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후쿠오카를 점거하던 군락이 사라진 이상, 이 일대 지역은 제법 안전하다.

그리 위험한 임무는 아니라는 말에 마이클 소장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제안할 게 있소.”

“말씀하십시오.”

“Mr. 박도 알다시피 우리 미연방이 선전 영상으로 꽤나 재미를 보지 않았소?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것을 원하는 모양이오.”

확실히 지난 번 미국 방문 때 우리가 촬영했던 영상이 엄청난 히트를 치기는 했다.

특히 영웅이라는 키워드에 환장하는 미국인 특성상, 선전 효과가 정말 대단했다.

아마도 이 맛을 잊지 못한 제프리가 또 한 번 그런 영상을 원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우리를 촬영하겠다는 말인데.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하려고 했다.

“정찰 중 다른 임무는 무리입니다.”

“촬영팀을 동행시키면 어떻소? 모두 특수부대 소속이니 제 몸 하나 지킬 능력은 충분하오. 여차하면 알아서 도망치라 하겠소.”

“아무리 그래도…….”

“이 프로젝트만 잘 마무리되면 미국 내에서도 반응이 있을 거요. 위에서 약속한 게 있으니 반드시 추가 증원을 받아오리다.”

“추가 증원이요?”

하지만 추가 증원을 보내준다는 말에 굳건하던 마음이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태세를 바꾼 나는 무척 아쉬워하던 마이클 소장과 재빨리 악수했다.

“좋습니다.”

“으, 으음?”

“최대한 협력해드리죠.”

그래,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하는 마당에 얼굴 팔리는 게 뭐 대수인가.

미국이 그토록 원한다면 아주 눈물 콧물 다 빠지는 인간 극장 한편 찍어줄 생각이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협력을 약속한 나는 다시 막사로 돌아와 미래 일기를 가방에 챙겼다.

이제 이상한 꼬임에 빠져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두 번째 상속자를 찾을 시간이다.

* * *

지난 작전과는 다르게 소수의 인원이 움직여도 되는 단순한 정찰 임무다.

굳이 많은 이들을 데려갈 필요 없이 손발이 제일 잘 맞는 대원들만 따로 호출했다.

물론 미연방이 부탁한 일인 만큼 마이클 소장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야, 이거 험비 맞죠?”

“미친! 포장도 안 뜯은 신품인데요?”

전쟁 영화에서나 보던 미군 군용 험비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예 신품으로 넘어온 험비 앞에 대원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난리가 났다.

“반납 안 해도 되죠?”

“돌아갈 때 몰래 가져가면 되지.”

물론 대부분은 이걸 어떻게 훔칠까, 또 꿍쳐 먹을까 하는 나쁜 생각들뿐이었다.

누가 가르쳤는지 참 잘 컸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웃었다.

“Mr. 박?”

그런데 그 순간, 한참 시끌벅적한 험비 옆으로 한 무리 인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남자 하나, 여자 둘로 구성된 그들은 다름 아닌 이번 작전에 동행할 촬영팀이었다.

특수부대 소속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모두 하나같이 노련함이 엿보였다.

팀원 중 계급이 제일 높아 보이는 한 흑인 여성이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카산드라 중위입니다. 이쪽은 같은 촬영팀 소속 마일드 상병과 엠버 하사입니다.”

팀을 이끄는 건 카산드라 중위, 마일드 상병과 엠버 하사는 같은 카메라맨이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는 나머지 둘과 반갑게 인사한 뒤 우리 팀원을 소개하려 했다.

“이쪽은…….”

“괜찮습니다. 다 아는 얼굴이네요.”

“저희 구면입니까?”

“영상에서 수십 번씩 봤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일드와 엠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안, 안녕하세요.”

셋 다 어느 정도 한국말을 할 줄 알고, 대원들 신상 정보도 미리 공부해둔 듯했다.

자잘한 건 걱정하지 말라더니, 마이클 소장이 정말 본격적으로 준비해 온 모양이다.

“크흠! 잘 나옵니까?”

“이거 모자이크해주는 거죠?”

이에 대원들은 무척 어색해하면서도 살갑게 다가오는 두 사람과 반갑게 인사했다.

뭐, 나름 중요한 프로젝트인 만큼 알아서 협력해 달라고 미리 말해둔 상태였다.

“잠시 걸으시죠.”

“아! 예.”

나는 장비를 점검 중인 카산드라 중위를 불러 잠시 험비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일단 마이클 소장을 생각해 수락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주의해야 할 점이 많았다.

“막상 교전이 시작되면 지켜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점 꼭 잊지 마세요.”

“저희도 군인입니다. 감염체 몇 마리 정도는 거뜬하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자신만만하게 총을 들어 보이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희는 언제나 임무가 최우선입니다. 혹여나 촬영 때문에 지장이 생긴다면 곧장 복귀시킬 겁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해보죠.”

거듭된 경고에 불쾌함을 느낄 법도 한데, 카산드라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나는 그런 그녀와 다시 한번 악수한 뒤 모든 준비를 끝낸 대원들과 합류했다.

“출발!”

총 다섯 대로 구성된 정찰팀 험비는 하나둘 기지를 빠져나와 동쪽을 향해 달려갔다.

쯧, 박하나는 잘하고 있으려나.

분명 어디 처박혀서 덜덜 떨고 있을 게 뻔했다.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석양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걱정을 삼켰다.

.

.

.

콰직!

박하나는 자신이 방금 죽인 감염체 품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 경찰이 들고 다니는 스미스 앤드 웨슨, 즉 리볼버였다.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진짜 총 앞에서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실린더를 열어보았다.

철컥!

총 다섯 발을 장전할 수 있는 실린더 안에는 공포탄을 제외한 실탄이 가득 들어있었다.

겨우 한 발 쏘고 나서 사망한 걸까?

박하나 입장에선 정말 큰 행운이었다.

사삭, 사삭!

열심히 주변을 살핀 그녀는 리볼버를 소중히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헤.

처음 들어보는 총에 긴장할 법도 하건만, 그녀는 도리어 기쁘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미래 일기는 오늘도 한 줄 추가했다.

[<주의!>총은 조심해서 쏴야 한다.]

이게 맞나? 박범석을 겨우 따돌린 일기장과 모나미 볼펜은 슬슬 후회가 몰려왔다.

골든 리트리버인 줄 알고 주워온 강아지가 어째 점점 비글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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