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156화 (156/180)

<156화>

산 아래 걸쳐있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세상은 어느덧 어둠으로 짙게 물들고 있었다.

빛이라는 것이 사라진 210번 국도의 밤은 오늘따라 유독 어둡고 눅눅했다.

끼익!

한참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가던 박하나는 잠시 자리에 멈추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빨리 가야 한다는 일념 아래 달리다 보니 벌써 2시간이나 넘게 이동한 상태였다.

‘힘들어.’

그제야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걸 파악한 그녀는 자전거를 갓길에 세우고 앉았다.

우걱우걱!

수통에 채워온 깨끗한 식수와 건조 음식을 마치 햄스터처럼 입안에 욱여넣었다.

물론 그 두 눈 만큼은 이제 막 집필이 시작된 미래 일기를 하염없이 읽고 있었다.

[외곽 지역으로 이동할수록 감염체 출현 빈도는 현저히 낮아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근방이 안전하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장기간 생존, 즉 먹을 것과 마실 것, 또 체계적으로 체력을 관리하고 자기 자신을 살피는 방법을 배워야 할 때다.]

[‘그녀’는 오랜 강행군으로 몹시 지친 상태다. 더 이상 무리해서 움직인다면 도리어 탈이 날 수도 있다. 오늘 밤만큼은 이동하지 말고 감염체나 생존자가 접근할 수 없는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 긴 휴식을 취하자.]

미래 일기의 조언을 확인한 박하나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표지판을 확인한 바로는 이 근처에 강과 이어지는 작은 마을이 있다고 했었다.

마침 몸도 마음도 지쳐가던 차,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갓길에 세워둔 자전거를 끌고 마을 입구로 추정되는 진입로로 걸어갔다.

후우우우우웅-!!

어디선가 불어오는 불길한 바람에 국도 옆 나무들이 을씨년스럽게 흔들렸다.

한쪽 손에 무기를 쥔 박하나는 연신 주변을 경계하며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치익!

그런데 그 순간, 등에 메고 있던 등산용 가방에서 갑자기 이상한 소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다 못해 기겁한 박하나는 본능적으로 쪼그리고 앉아 가방을 열었다.

치이익, 칙!

그 소음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경찰 감염체가 가지고 있던 소형 무전기였다.

리볼버를 노획할 때 혹시 몰라 챙겨온 걸 잠시 깜빡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게 왜 지금 울리지?

얼굴이 사색이 된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며 무전기를 꺼버리려고 했다.

[치이익! 살려주세…… 요! 치익! 치지직! 살려…… 주세, 치지직! 요. 칙 치이익!]

그런데 그 순간, 시끄러운 무전기 잡음 너머로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거기 누구 있어요?”

사람? 사람이다. 분명 어린아이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무전으로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정말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박하나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어떡하지? 구, 구해줘야 하나?’

같은 생존자는 무조건 피하라는 철칙 하나로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지 않는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박하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구조신호를 따라나서려고 했다.

사각, 사각, 사각!

“……!”

그런데 그 순간, 잠자코 있던 미래 일기가 그녀의 발걸음을 다급히 붙잡았다.

[‘그녀’는 무전기 사용법을 모른다.]

짧은 한 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한 줄이 박하나의 머리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애초에 사용법도 모르는 무전기에서 우연히 구조신호를 들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심지어 이 경찰용 무전기는 조작법을 몰라 주파수조차 건드리지 않은 순정 상태다.

탁!

박하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들고 있던 무전기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주변은 어느새 강에서부터 시작된 짙은 물안개가 사방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순간적으로 등줄기에서 시작된 소름이 팔다리는 물론 머리 위까지 빠르게 차올랐다.

탁!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그녀는 서둘러서 짐을 챙기고는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자전거 페달을 밟아 안개 낀 시골 마을을 빠르게 벗어났다.

스스스스스슥.

그녀가 떠난 자리, 안개가 짙게 낀 산속에서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일렁였다.

그 ‘무언가’는 코앞에서 놓친 사냥감을 노려보다 이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기괴한 존재.

기이한 공간.

고립된 섬에선 인간을 잡아먹는 끔찍한 존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보통 규슈 지방에서 도쿄가 있는 혼슈 지방으로 이동할 때는 간몬교를 사용한다.

아무래도 섬과 섬을 이동할 때는 육로와 다리를 이용하는 게 더 편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기는 그쪽과 반대 방향인 사가노세키로 박하나를 이끌었다.

이는 북쪽의 육로가 아닌 시코쿠를 가로지르는 남쪽 해로를 쓰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아니, 왜 굳이 비효율적이고 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경로로 그녀를 안내하는 걸까.

참 알다가도 모를 녀석의 변덕에 이제는 평소에는 없었던 오기까지 생기는 기분이었다.

‘내가 기필코 찾는다.’

몰래 이동하려는 녀석과 그런 녀석을 뒤쫓아야 하는 치열한 눈치 싸움이다.

나는 박하나의 일기장을 찢어버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두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저기…… Mr 박?”

그런데 그 순간, 바로 옆자리에 탑승했던 엠버 하사가 조심스럽게 옷깃을 당겼다.

아, 맞다. 이거 촬영 중이었지?

나는 찡그리고 있던 표정을 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멋쩍게 따라 웃은 엠버 하사가 카메라를 올려 우리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혹시 평소에도 이런 분위기인가요?”

“예. 그런 편이죠.”

“생각보다 편안해서 놀랐어요. 저희 근무지는 정말 숨도 못 쉴 만큼 무거웠거든요.”

워낙에 작전 경험이 많은 1팀 대원들이라서 이런 장거리 정찰쯤은 웃으면서 한다.

하지만 엠버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특수부대 출신이라는데 아직은 현장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엠버.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눈 딱 감고 형님만 기다리면 돼요.”

“야! 시장님이 뭐 세콤이냐?”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근데 가은아, 넌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하냐?”

말 한번 잘못 꺼냈다가 또 한 번 얻어맞은 경태가 울상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에 주변을 경계하던 대원들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마찬가지로 함께 웃은 엠버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얼굴로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부르르릉!

후쿠오카를 떠나 주변 도로를 정찰하기 시작한 지 벌써 4시간이나 흘렀다.

나는 어느덧 어둠이 짙게 깔린 창밖을 바라보다 이내 남아있는 연료량을 확인했다.

“기름 좀 넣고 가자.”

험비는 정말 다 좋은데 이 무식한 연비 덕분에 꾸준히 연료 보충을 해줘야 한다.

끼익!

우리가 갓길에 정차하자 뒤따라오던 후속 차량도 기다렸다는 듯 도로에 멈춰 섰다.

나는 총과 장비를 챙겨 차에서 내린 뒤, 잠시 연료를 채우자는 무전을 보냈다.

덜컹!

경태와 가은이가 부지런히 연료통을 나르며 각각 험비 차량에 급유를 시작했다.

그사이 대원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물을 마시거나 비스킷을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마찬가지로 물과 초코볼을 입에 털어 넣은 나는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슬슬 보일 때가 됐는데.’

그동안 부지런히 다닌 덕분에 후쿠오카 근처 웬만한 외곽 도로는 전부 확인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을 박하나의 흔적은 아직 찾지 못했다.

끽해봐야 자전거밖에 없는 녀석이 어딜 이렇게 설치류처럼 돌아다니는 거야?

나는 방금 지나친 210번 국도에 X자를 칠하며 남아있는 견과류를 씹어먹었다.

“형님!”

“응?”

그런데 그 순간, 한창 급유하고 있어야 할 경태가 헐레벌떡 이쪽으로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니 대원들 분위기가 어수선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근처에 구조신호가 잡혔어요.”

“구조신호? 험비에 달린 군용무전이야?”

“아뇨, 일반 CB 무전기 같아요.”

나는 경태가 던진 소형 무전기를 낚아채 들려오는 구조신호에 귀를 기울였다.

[치이익! 거, 거기 누구 있어요? 치익! 치지직! 거기…… 누구, 치지직! 요? 칙 치이익!]

곧이어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는 익숙한 한국말에 순간 두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이 근처에 살아있는 생존자가 있다. 그것도 한국어를 사용할 줄 아는 한국인이 말이다.

설마 박하나?

깜짝 놀란 나는 급히 무전에 답해봤지만, 아쉽게도 통신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일단 무전기를 내려놓고 이미 전투 준비를 끝낸 대원들을 한 자리에 불렀다.

“혹시 위치 특정할 수 있습니까?”

“출력이 약한 무전기입니다. 아마 500m 안쪽으로 수색하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숨어서 무전을 보낼 정도면 다쳤거나 그에 준하는 위험에 처했을 확률이 높다.

만약 박하나라면 정말 다행이고, 아니어도 민간인은 구하는 게 우리 철칙이다.

나는 나머지 대원들에게 차량을 지키게 한 뒤, 직접 주변 수색을 시작했다.

치이익, 칙!

무전 신호가 뚜렷해질수록 가까운 곳에 구조를 보내는 근원지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500m 반경을 최대한 넓게 잡고 조금씩 조금씩 수색 범위를 좁혀갔다.

‘찾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 강을 끼고 있는 마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곳에서 구조신호가 오고 있다는 걸 확신한 나는 무전으로 대원들을 불렀다.

“분위기가 으스스하네요.”

“어우, 물비린내 장난 아닌데요.”

근처가 강이라 그런가, 정말 이상하리만큼 짙은 물안개가 끼어 있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일단 마을로 천천히 접근했다.

터벅, 터벅, 터벅.

오쿠히다라는 지명을 가진 이 지역은 일본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이미 모든 주민이 떠난 마을은 폐가와 버려진 살림살이들만이 굴러다녔다.

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함께 따라온 엠버 하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치익, 칙.

무전기 신호가 점점 뚜렷해진다. 재빨리 사방을 살핀 나는 결국 근원지를 찾았다.

그곳은 한때 관광객이 오면 머물다가던 오래된 온천과 일본식 료칸이었다.

어둡고 안개 낀 실내라, 어쩔 수 없이 야간투시경을 쓰고 천천히 내부로 진입했다.

끼익, 끼익.

나무를 엮어 만든 바닥을 밟을 때마다 끼익 끼익하는 소음이 무척 정신 사나웠다.

나는 조용히 미간을 찡그린 채 먼지가 날아다니는 복도 끝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치익, 칙.

뚝.

그런데 그 순간, 조금까지 시끄럽게 울리던 무전기 잡음이 갑자기 뚝 끊겼다.

이 근처인가? 나는 문이 열려있는 다다미 방안으로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무전기?’

방 한가운데는 전원이 켜진 낡은 무전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에 나는 떨어진 무전기를 주워 사방을 살펴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분명 구조신호를 듣고 여기까지 왔는데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무전기를 쥐고 있던 손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서늘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형님!”

그런데 그 순간, 함께 방 내부를 수색하고 있던 경태가 깜짝 놀라 외쳤다.

“엠버 하사가 안 보여요!”

엠버 하사?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뒤를 따라오며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갑자기 사라졌다는 말에 당황한 대원들은 황급히 사방을 살펴봤다.

“찾아! 뭐해!”

서로 이동 동선이 익숙한 대원들과는 달리 엠버 하사는 시야에서 놓치기 쉽다.

나는 주변을 수색하라 외치며 갑자기 모습을 감춘 그녀에게 무전을 보냈다.

“엠버!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불러봐도 무전기 잡음만 들려올 뿐 엠버 하사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젠장, 빌어먹을 물안개!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야간투시경을 벗었다.

“……?”

그 순간 보았다.

저 멀리 어두운 복도에서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지나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말이다.

“……모두 멈춰.”

나는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엠버 하사를 찾아 나서려던 대원들을 멈춰 세웠다.

“변이종이다.”

왼쪽 눈 흉터가 반응하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를 긴장시키기에는 충분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