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158화 (158/180)

<158화>

연식이 꽤나 되어 보이는 낡은 트럭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열심히 올랐다.

어찌나 외진 곳인지, 그 흔한 가드레일이나 표지판조차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감염체나 적대적인 생존자로부터 고물 트럭은 안전할 수 있었다.

능숙하게 길을 찾고 이동하는 것으로 보아 한두 번 다녀본 솜씨가 아닐 터.

한때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키리코는 이미 경험 많은 베테랑 생존자가 되어있었다.

“콜록콜록!”

뒷좌석을 바라보자 그녀의 어린 여동생이 두꺼운 이불을 덮은 채 누워있다.

지금 보니 꼭 병에 걸린 사람처럼 기운이 없고 얼굴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한참 운전대를 잡고 있던 키리코는 박하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키가 많이 컸지?”

“……응, 그러네.”

“겨울 동안 몸이 많이 쇠약해졌어. 도착하는 대로 항생제 약을 한 번 구해보려고.”

시간이 갈수록 한정된 자원인 식량과 생존 물자는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갔다.

특히 그중 수요가 많은 항생제 같은 약품은 현재 웃돈을 주고도 못 구할 지경이었다.

“사가노세키에 약이 있어?”

“응. 거기에 시코쿠 지방에서 넘어오는 선박이 있거든. 약도 구할 겸, 배를 타려고.”

“배를 탄다니?”

“응. 부산으로 갈 거야.”

능력 좀 있다는 규슈 생존자들 사이에선 이미 알음알음 퍼진 소문 하나가 있었다.

바로 사가노세키로 가면 일본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선박이 있다는 것 말이다.

마찬가지로 정보를 입수한 키리코는 동생과 함께 탈출을 감행하려고 이곳까지 왔다.

“너는? 너도 그래서 가는 거 아니야?”

“어? 그, 그건 아닌데…….”

“혹시 뱃삯이 걱정이면 그 리볼버라도 팔아. 아마 괜찮은 가격을 쳐줄 거야.”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서.”

“여기 규슈에?”

“응.”

감염체가 득실거리는 이 지옥도에 도대체 무슨 할 일이 있어서 남으려고 하는 걸가.

이상하게 생각한 키리코는 미간을 팍 찡그린 채 바보 같은 동창생을 바라봤다.

“그래? 그렇다면 뭐.”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무관심하게 고개를 돌리며 운전하는 것에 집중했다.

지금은 서로가 가진 물건이 필요해 협력하는 것뿐, 어차피 둘 다 생판 남이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야기꽃을 피우던 두 사람 사이에 조그마한 벽이 세워졌다.

그건 양측이 그동안 겪어온 역경과 인간 불신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부르르릉!

그렇게 산길을 얼마나 더 달려갔을까, 저 멀리 숲속에 숨겨진 진입로가 보였다.

사가노세키 항구와 그 인근 마을에는 꽤 많은 생존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어.”

“다 시코쿠로 넘어가거나 일본 밖으로 도망치려는 사람들이야. 뱃삯을 못 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절대 방심하지 마.”

같은 생존자들이 모인다고 해서 서로 돕거나 협력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박하나는 그들의 흉흉한 눈빛을 느끼며 주머니 속 리볼버를 꾹 움켜쥐었다.

끼익!

그사이 키리코는 트럭을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조심스럽게 운전석에서 내렸다.

다 같이 가기에는 그녀의 어린 여동생이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있어. 약부터 구해올게.”

“응.”

어쩔 수 없이 둘이 여기 남고 키리코는 약부터 구하기 위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박하나는 멀어지는 옛 친구를 바라보다 이내 항구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안가에는 생각보다 많은 선박이 16㎞ 남짓한 바다를 오가고 있었다.

저쪽이 시코쿠, 동쪽으로 쭉 가면 혼슈 지방과 그대로 이어지는 섬이었다.

드디어 두 번째 과제 장소에 도착한 박하나는 가방 속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나 도착했어.

이제 어떡해야 해?

늘 시끄럽게 수다를 떨던 미래 일기가 어젯밤부터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박하나는 불안한 얼굴로 일기장을 살펴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취하는 휴식 때문일까, 이상하리만큼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참 꾸벅꾸벅 졸음을 참던 그녀는 그만 창가에 기대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오늘따라 할머니가 너무나 그리웠다.

.

.

.

헉!

한동안 깊은 수마에서 허우적거리던 박하나는 본인 숨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밖은 어느덧 어둑해져 있었고 바다를 오가던 페리 또한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으응, 언니……?”

뒷좌석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키리코의 동생이 부스스 일어나 눈을 떴다.

키리코는 3시간이나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금, 금방 올 거야.”

박하나는 어쩔 수 없이 울상을 짓는 아이를 달래주며 어두워진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금방 약을 구해 돌아오겠다고 해놓고 왜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잠드는 게 아니었는데.

박하나는 속으로 조용히 자책했다.

사각, 사각, 사각.

“……!”

그런데 그 순간, 조용히 잠자코 있던 미래 일기가 빠르게 집필을 시작했다.

깜짝 놀란 박하나는 가방 속에서 조심스럽게 갱신된 일기 내용을 확인했다.

[약을 구하러 갔던 키리코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다. 그들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물품을 빼앗았고 또 차량마저 훔치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있다. 도망쳐야 한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강도를 당했다고? 박하나는 순간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가지고 왔던 짐을 서둘러 챙겼다.

“어디가?”

“쉿! 조용히 따라와.”

칭얼거리는 키리코의 어린 동생을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보조석에서 내렸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주차장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와 적막함이 깔려있었다.

번쩍!

그 순간 저 멀리서 손전등 불빛이 반짝이더니 곧 한 무리의 생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무려 다섯, 하나 같이 무기를 들고 있는 게 목적이 뻔해 보였다.

아이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은 박하나는 수풀 사이로 엉금엉금 숨어들었다.

그러자 주변을 한참 동안 서성이던 놈들은 터벅터벅 트럭 앞으로 다가갔다.

“뭐야, 어디 갔어?”

“분명 셋이라고 들었는데.”

하지만 곧 두 명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강도질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지 도망쳤다는 걸 금세 눈치 챈 것이다.

“찾아. 근처다.”

그 흔적을 추격당한 박하나는 서둘러 수풀 사이를 기어가며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

사방을 비추며 다가오는 섬뜩한 손전등과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만큼이나 박하나도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다!”

놈들이 발자국을 찾았는지 박하나가 숨어있던 수풀로 우르르 몰려왔다.

깜짝 놀란 그녀는 서둘러 아이를 안은 채 바로 옆 숲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허억, 헉!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차량과 더불어 살아있는 사람이 목적인 강도들이다.

지금은 남아있는 차량이고 뭐고 놈들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는 게 상책이었다.

“시발! 잡아!”

하지만 아이를 안은 채 달리느라 금세 거리는 좁혀졌고 바로 뒤까지 따라왔다.

눈가를 파르르 떨던 박하나는 곧 상속자의 조언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끝까지!’

아이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품에서 리볼버를 꺼내 배웠던 자세를 취했다.

“어?”

비열하게 웃으며 뒤따라오던 강도는 갑자기 겨눠진 리볼버를 보며 깜짝 놀랐다.

박하나는 정확히 가슴팍을 정조준한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날아간 총알은 왼쪽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가 강도 하나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숲속 한가운데서 울린 총성과 불꽃!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얼어붙었다.

‘끝까지 싸움을 멈추지 마!’

하지만 박하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머지 강도를 향해 리볼버를 발사했다.

타앙!

핏발선 그녀의 눈과 일렁이는 기운은 두 번째 상속자의 각성을 알리고 있었다.

* * *

군락이 터널이 끊긴 홋카이도로 어떻게 넘어갔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 숙주를 옮기는 방식이었다면 뱃길로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감염체만 있으면 지구상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게 군락 놈들이니까.

그렇다면 현재 가장 유력한 감염체 웨이브의 진행 경로는 딱 한 곳뿐이었다.

‘사가노세키.’

간몬교가 있는 혼슈와는 달리 규슈와 시코쿠를 잇는 다리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쪽 지역을 오가는 여객용 선박은 전쟁 전까지 활발하게 운용되었다.

그중 가장 가까운 곳은 육지와 겨우 16㎞밖에 떨어지지 않은 사가노세키 항구.

사실상 맨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에 거의 코앞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쩌면 미래 일기가 박하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하나둘 맞춰지고 있는 운명의 퍼즐 앞에 나는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형님.”

“응, 저기 세워.”

밤사이 열심히 국도를 달린 정찰대는 드디어 사가노세키 항구 근처에 도달했다.

우리는 수풀이 우거진 숲속에 험비를 숨긴 뒤 장비를 챙겨 산 아래로 내려갔다.

위이이이잉.

그리고 가장 먼저 송지영이 가지고 온 드론을 날려 항구 근처를 수색했다.

혹시 오염이 진행 중이라면 공군 폭격을 요청해 깔끔하게 소거할 생각이었다.

“사람이 있는데요?”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사가노세키 항구에는 꽤 많은 생존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 사라진 줄 알았던 선박과 페리까지 양쪽 육지를 오가고 있었다.

감염 숙주가 될 수 있는 생존자, 바다를 자유롭게 건널 수 있는 거대한 선박.

나와 김태하 소장이 예상한 대로 군락 숙주를 이동시키기에 너무나 좋은 환경이었다.

“본부에 병력 지원 요청해. 가은이랑 경태는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 따라와.”

“내려가 보시게요?”

“왜 모여 있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병력이 도착하기 전까지 상황부터 파악하자.”

민간인이 모여 있는 이상, 항구에 폭격을 날린다거나 하는 행위는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추가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후쿠오카로 모두 데려가야 한다.

우리는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군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품속에는 언제든지 뽑을 수 있도록 컴펙트한 권총을 숨겨놓았다.

“오후까지 돌아오죠.”

“예.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민간인으로 위장한 우리는 숲을 빠져나와 사가노세키 항구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벌이는 탐문 임무였지만, 다들 익숙한 듯 빠르게 현장으로 녹아들었다.

터벅, 터벅, 터벅.

아직 해가 떠 있는 낮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드리워있는 어두운 그늘이 느껴진다.

이를 곁눈질로 확인한 경태와 가은이가 입만 벙긋거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요.”

“다들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어요.”

보통 생존자가 모이는 곳에는 판자촌이나 작은 노상들이 생기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곳은 다들 분주히 이동하기만 할 뿐 사실상 모든 건물이 텅 비어있었다.

이러면 탐문이 힘들어지는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골목으로 넌지시 발걸음을 돌렸다.

“저쪽으로 가자.”

눅눅하고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음지. 너무나 익숙한 분위기가 이제는 지겹다.

우리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앞과 뒤로 생존자들이 나타났다.

“형씨, 뭔 깡이야?”

“이야, 시발 때깔 좋네.”

물론 그들을 생존자라고 부르기에는 그 눈동자나 얼굴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생존자가 모이는 곳이면 뒷골목이 필수, 골목 하면 또 강도질이 기본 옵션이다.

나는 우르르 몰려드는 놈들을 한 명 한 명 확인한 뒤 경태와 가은이를 불렀다.

“한 놈만 잡아.”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곧 어깨에 뭉친 근육과 손마디를 우두둑 풀었다.

“옛날 생각나네.”

“나는 이게 그리웠거든.”

그 모습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강릉 비글들의 진짜 본색이었다.

골목에서는 곧 무언가를 두들겨 패는 소리와 함께 강도들이 지르는 비명이 들려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