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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59화 (159/180)

<159화>

강도들을 쓰러트린 박하나는 서둘러 도망쳐 항구와 멀리 떨어진 폐가에 몸을 숨겼다.

놈들의 동료들은 도망친 그녀를 찾기 위해 연신 항구를 시끄럽게 돌아다녔지만, 해가 밝고 낮이 되자 곧 분을 삼키며 하나둘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가 버렸다.

‘갔나?’

창문 밑에 몸을 숨긴 박하나는 리볼버 실린더를 열어 탄피를 탈탈 털어냈다.

손바닥 위에 떨어진 탄약을 하나하나 세어보니 남은 총알은 겨우 2발뿐이었다.

그녀는 남은 총알을 소중하게 챙겨 다시 실린더 속으로 넣어 재장전 했다.

철컥!

손안 가득 묵직한 그립감이 느껴지자, 미세하게 떨리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박하나는 전날 밤 느꼈던 흥분과 전율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웠어.’

방아쇠를 당기면 불꽃과 함께 총알이 나가고, 그 총알은 적을 꿰뚫는다.

어쩌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그 광경에 모든 세포가 기쁨의 비명을 질렀었다.

또 느낄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위험’에 매료되어가고 있었다.

“으응…….”

그 순간 품속에 안겨 있던 키리코의 동생이 몸을 뒤척이며 고통을 호소했다.

이에 깜짝 놀란 박하나는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열이 심해.’

조금 전 고열과 함께 정신을 잃었었는데, 어째 열이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숨이 불규칙한 것으로 보아 몹시 위태로운 상황. 현재로선 약이 꼭 필요했다.

‘어쩌지?’

사실 박하나 입장에선 키리코와의 의리를 끝까지 지켜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동행하게 된 이유도 사실상 거래나 마찬가지였고 두 사람 모두 동의했던 일이니까.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인간성이라는 마지막 족쇄가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박하나는 결국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자리에 앉았다.

지옥 같은 방구석에서 자신을 구원하고 여기까지 인도해준 미래 일기와 조언자.

항상 문제를 주었기에 답을 풀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박하나는 피떡이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이며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늘 품속에 꼭 끌어안고 있던 미래 일기는 오늘따라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각, 사각, 사각.

그동안 잠자코 있던 모나미 볼펜이 미약한 빛을 내뿜으며 글을 써 내려갔다.

[차량을 포함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긴 키리코는 현재 빛 한 점 들지 않는 깊은 항만 창고에 갇혀있다. 다행히 죽지 않고 목숨은 건졌지만, 상품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노리개로 팔려 갈 예정이었다.]

[흔한 결말이요, 흔한 비극이다. 이미 수많은 죽음을 봐왔던 ‘그녀’는 이를 외면하고 돌아설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의 조언이 가슴을 쿡쿡 찌르며 ‘그녀’를 괴롭게 했다.]

그동안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던 박범석은 미래 일기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항상 자신을 걱정해주던 모습과는 달리 박하나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게 대했으니까.

하지만 일기는 그 속도만을 늦췄을 뿐, 단 한 번도 방향을 바꾼 적이 없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 녀석은 오직 그 한 가지 가치만을 추구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이 세상 모두를 구함이다.’ 갇혀있는 키리코를 구출하고 어린 동생을 치료하자.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과제를 완수할 차례였다.]

* * *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을 때쯤 골목을 시끄럽게 만들던 고성이 점차 잦아들었다.

한 12명쯤 몰려온 거 같은데, 경태와 가은이 둘이서 모조리 털어버린 것이다.

어찌나 맞았는지 얼굴이 밀가루 반죽이 된 채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강도 놈들.

그중 가장 뺀질거리게 생긴 새끼를 하나 끌고 와 본격적인 탐문 조사를 시작했다.

“여기가 밀항 장소라고?”

“예, 예! 본토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상대로 밀항 장사를 합니다! 저, 저기 부산으로요!”

한반도로 도망치지 못한 수많은 피난민이 위험한 본토를 떠나 상위 군락이 활동하지 않는 이곳 규슈 지방으로 몰려오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바로 밀항.

사가노세키 항구는 난민들이 부산으로 가기 위해 들르는 사실상 중간 기착지였다.

“배 주인이 누군데.”

배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 말에 놈은 순간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고민했다.

이에 잠자코 보고 있던 경태가 피식 웃으며 어깨 위로 손을 턱 올려두었다.

“히익!”

그러자 놈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털어놓았다.

“시, 시코쿠에서 꽤 알아주는 항만 회사입니다. 밀항선을 포함에서 크고 작은 페리들까지 전부 저놈들 소유라고 들었습니다.”

“그냥 항만 회사?”

“당연히 질이 좋은 놈들은 아니죠. 진짜 웬만한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닙니다. 저희 같은 건달이랑은 차원이 다르달까……?”

“자랑이다, 씹새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놈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연신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황급히 골목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바로 저기요!”

그곳에는 딱 봐도 질이 좋지 않은 놈들이 흉흉한 기색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보이는 생존자마다 얼굴을 살피는 게 딱 봐도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 저래?”

“어제 항구를 들쑤신 년이 하나 있었는데 총으로 무려 셋이나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새벽부터 찾겠다고 저 난리들입죠. 예!”

총으로 셋을 죽였다고? 그 순간 이상한 촉 하나가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 기분…… 어디서 느껴봤더라.

그래, 내가 어딜 싸돌아다닐 때마다 맡았던 그 냄새다.

바로 뜬금없이 난리를 치며 나타나 판을 뒤집어버리는 ‘상속자’의 진한 냄새 말이다.

“형님, 어쩔까요?”

“시간 얼마나 남았지?”

“본대가 오려면 한참 남았죠.”

“그럼 잠깐만 보고 가자.”

고개를 끄덕인 경태가 뚜벅뚜벅 다가가자, 강도는 싹싹 빌며 목숨을 구걸했다.

“분, 분명 살려주신다고……!”

“응, 알아.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대답을 잘해줬으니 살려주긴 할 거다. 물론 딱 숨만 붙여놓는 정도겠지만 말이다.

끄아아악!

나는 비명이 들려오는 골목을 걸어 나오며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쏴아아아아-.

그날 밤,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대비가 세상을 눅눅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 * *

박하나는 가지고 있던 귀금속을 몰래 팔아 따뜻한 음식과 항생제를 구했다.

그리고 그것을 키리코의 동생에게 손수 먹이며 기운을 차리게 도와주었다.

“감, 감사합니다.”

아이도 바보가 아닌지라 언니가 잡혀갔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음식을 받아먹으면서도 훌쩍훌쩍 울음을 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밉보이면 버려질지도 몰라. 지금은 언니가 보고 싶어도 꾹 참고 견디어야만 했다.

“키리코를 데려올게.”

하지만 박하나는 이제 가라는 매몰찬 말 대신 아이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것은 바로 어디 있는지도 모를 키리코를 구해오겠다는 믿을 수 없는 약속이었다.

“언니를요……?”

“응. 꼭 데려올게.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내일까지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어른의 말은 믿지 않는다. 엄마도 그렇게 말하고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어째선지 상냥하게 웃고 있는 이 어른의 약속을 믿고 싶었다.

결국 울음을 터트린 아이는 눈앞을 아른거리는 약지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낸 박하나는 은신처를 빠져나와 항구로 천천히 접근했다.

쏴아아아아-.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자 하늘에선 천둥 번개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덕분에 생존자들이 돌아다니고 있던 시내 거리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박하나는 그 틈을 이용해 항구까지 무사히 도달했고 곧 방파제에 몸을 숨겼다.

‘할 수 있어.’

미래 일기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려주고 품속에 잠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예언을 떠올리고 복기하며 그대로 실행하는 것뿐이었다.

박하나는 짧게 자른 창을 꾹 움켜쥔 채 조심히 방파제 아래로 내려갔다.

‘돌아오는 배는 1시간 뒤.’

놈들은 16㎞ 정도 떨어진 반대편 항구와 주기적으로 오가며 손님을 태운다.

그 말인즉슨 앞으로 1시간 정도는 최소한의 경비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틈을 노릴 생각이었던 박하나는 위태롭게 방파제를 건너 항만으로 접근했다.

“무슨 비가 이렇게 오냐.”

“덕분에 내일 스케줄 다 취소란다.”

빗줄기가 워낙 거센 탓에 주변을 순찰하고 있던 경비들이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박하나는 놈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이내 불이 켜진 창고로 들어갔다.

“…….”

창고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는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면서 잠들어 있었다.

놈이 깨지 않도록 발소리를 최대한 죽여 슬금슬금 문 옆으로 기어들어 갔다.

마치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그 은밀함은 곧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묻혔다.

‘지하 3층이라고 했어.’

창고 지하를 일일이 찾아다닐 필요 없이 일기의 지침을 따라 계단으로 향했다.

극도의 긴장감에 주르륵 흘러내리는 식은땀, 계단을 내려갈수록 점점 떨려오는 손.

하지만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왔을까, 백열등이 치직 거리는 복도 끝에는 방 하나가 존재했다.

‘찾았다.’

박하나는 날카로운 나이프를 꺼내 방 손잡이를 묶고 있던 두꺼운 밧줄을 끊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니 수많은 사람이 손발이 묶인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박하나는 그들 앞으로 다가가 기어코 키리코를 찾아냈다.

“……!”

테이프로 입이 막혀있던 키리코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을 찾아온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쉿.’

박하나는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린 뒤 입을 막고 있던 청테이프를 풀어줬다.

“여, 여길 왜……?”

안다. 그래봤자 모래알보다 못한 친분이고 구하러 올 이유 따위는 없었다는 거.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구원에 키리코는 현실을 자각할 수 없었다.

“빨리 나가자.”

하지만 박하나는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라는 듯 나이프로 밧줄을 풀어주었다.

이제 왔던 길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그녀도 자신도 무사히 밖으로 탈출할 수 있다.

“저, 저기요. 저 좀 살려주세요…….”

그런데 그 순간, 입이 막히지 않았던 한 여성이 피를 흘리며 도움을 청했다.

물론 그 여자 말고도 잠에서 깬 많은 이들이 그녀를 간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

순간 머리가 멍해진 박하나는 어떡해야 할지 몰라 자신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살려달라는 아우성을 견디기에는 그녀는 아직 완숙한 상속자가 아니었다.

뿌우우우우웅-!!

설상가상 창고 밖에선 입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반대편 항구로 떠났던 선박이 도착한 것이다.

“뭐해!”

구속에서 벗어난 키리코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박하나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녀는 어느새 나이프를 들고 주변 사람들의 밧줄을 하나하나 끊어주고 있었다.

“지하 1층에 다른 출구가 있어! 놈들이 오기 전에 그 길로 빠져나가면 안전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 걸까, 손이 떨리면서도 밧줄을 끊는 걸 멈추지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하나는 키리코를 도와 두려움에 질려있던 사람들을 구출했다.

“뭐야, 문이 왜 열려있어?”

그런데 그 순간, 지하 3층으로 내려오던 경비 하나가 열려있는 문을 발견했다.

“……!!”

밧줄을 끊던 키리코도, 서둘러 도망치려던 사람들도 모두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탁!

하지만 단 한 사람, 박하나만큼은 본능적으로 무기를 쥐고 바닥을 박찼다.

그 엄청난 속도에 안으로 들어오려던 경비는 어어? 깜짝 놀라며 당황했다.

푸욱!

날카로운 날붙이가 목을 관통한다. 놈은 꺼억, 꺽 소리와 함께 쿨럭 피를 내뱉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인 박하나는 이를 악물며 빠르게 뒤돌아봤다.

“따라와요!”

그 모습에 깜짝 놀란 키리코는 서둘러 사람들을 데리고 그 뒤를 우르르 따라갔다.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오르는 박하나의 눈동자가 밤하늘 별처럼 찬란하게 반짝인다.

.

.

.

사각, 사각, 사각.

그녀의 품속에 잠들어 있던 미래 일기는 이 상황을 단 두 마디 문장으로 서술했다.

[두 번째 상속자가 도망친다.]

[첫 번째 상속자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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