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한참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함께 걷고 있던 경태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왜?”
“그냥 평소랑 좀 다르셔서요.”
간혹 주변 사람들로부터 둔하다, 혹은 눈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 경태다.
하지만 내가 아는 녀석은 그 어떤 동료들보다 촉이 좋고 또 섬세한 사람이었다.
오늘도 평소랑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알고 남몰래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별일 아니야.”
물론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줄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을 일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일에는 미래 일기라는 복잡한 존재가 얽혀있기 때문이었다.
‘젠장, 어디로 사라졌는지.’
일기에 쓰인 대로라면 박하나는 분명 이곳 사가노세키 항구에 먼저 도착했다.
하지만 그 뒤로는 행적 자체가 지워져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만약 이대로 본대가 도착한다면 감염체 유출로에 대한 본격적인 통제가 시작될 터.
그전까지 박하나를 찾아내야 그녀의 안전과 미래 일기의 독주를 막을 수 있었다.
후우.
나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일기 녀석을 떠올리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한데 어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힘들어지는 기분이었다.
“한 번만 더 보고 갈까요?”
말 못 할 사정이라는 걸 아는지 경태는 눈치껏 얼버무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에 가은이도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조금 전 지나쳐왔던 골목길을 가리켰다.
현재 시각은 오후 7시, 어느덧 석양이 내려앉고 하늘은 어둑해져 있다.
이제 슬슬 탐문을 끝내고 대기하고 있을 대원들과 합류해야 할 시간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대답을 기다리는 경태와 가은이를 이쪽으로 불렀다.
“복귀하자.”
“괜찮으시겠어요?”
“정찰 보고가 우선이야.”
아무리 박하나가 중요하다고 해도 공과 사를 구별 못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시간을 지체해서 정찰 임무를 망치느니 차라리 내가 고생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개인적인 탐문 조사를 끝낸 우리는 어둠이 깔린 항구를 걸어 나왔다.
치익.
때마침 인근 야영지에서 지시를 기다리고 있던 송지영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선배, 언제 오세요?]
“지금 복귀하려고.”
[안 그래도 본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소장님이 현장 상황을 알고 싶은가 봐요.]
하여튼 그 양반, 점잖은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이런 일에는 성질이 급하다.
나는 김태하 소장에게 시달렸을 송지영을 위해 금방 돌아가겠다고 말하려 했다.
타앙-!!
“……!”
그런데 그 순간 갑작스러운 총성 한 발이 적막한 항구 마을을 일깨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총성의 근원지가 항만 창고라는 걸 인지했다.
[방금 총성이에요?]
“대기하고 있어.”
[예? 그게 무슨…….]
총성은 위치, 방향, 거리에 따라 달라져 종류를 구분하기가 무척 힘든 편이다.
하지만 자주 다뤄본 총기는 그 소리만으로도 구경을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38구경, 리볼버, 매우 높은 확률로 일본 내에서 구할 수 있는 S&W사의 제품일 것이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경찰 리볼버를 구했다고 좋아하던 박하나, 바로 그녀였다.
“형님!”
내가 총성이 들린 항만 창고로 뛰어가자 경태와 가은이가 황급히 뒤따라왔다.
품속 권총으로 손을 집어넣은 것으로 보아 대충 무슨 의미인지 눈치를 챈 모양이다.
나는 묵묵히 따라주는 두 녀석을 향해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요청했다.
“찾는 사람이 있어! 얼굴은 몰라!”
“성별이랑 나이만 알려줘요!”
“여자! 이제 막 20살 성인이야!”
그걸로 끝이다. 신상 정보를 알아낸 그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콰르릉!
천둥 번개가 내리치자 장대비 속 가려져 있던 창고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사람들은 생각보다 침착했고 키리코 또한 상황판단이 무척이나 빠른 편이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다른 출구가 있다던 지하 1층까지 들키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박하나는 최대한 주변을 살피며 겁에 질린 이들을 출구까지 안내하려고 했다.
“뭐, 뭐야 너희!”
하지만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장대비처럼 위험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1층에서 졸고 있던 경비 하나가 우연히 화장실을 가려다 사람들을 발견한 것이다.
박하나의 피 묻은 칼을 보자마자 품에서 허겁지겁 무언가를 꺼내든 1층 경비.
그것이 총이라는 걸 눈치챈 박하나는 본인이 살기 위해서라도 반격해야만 했다.
철컥!
0.5초라는 짧은 찰나, 그녀는 들고 있던 리볼버를 겨눠 방아쇠를 당겼다.
탕!
동시에 총구가 불을 뿜었고 날아간 총알이 놈의 왼쪽 가슴팍을 그대로 관통했다.
만약 박범석이 이를 봤다면 손뼉을 치고도 남았을 깔끔한 사격 자세와 타이밍이었다.
“……!!”
하지만 명중했다는 기쁨도 잠시, 사람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경악했다.
한밤중 울린 총성,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가고 뭐 해요!”
하지만 박하나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정신을 되찾으며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여기 모여있다고 한들 몰려오는 놈들을 막을 수 없는 건 매한가지인 상황.
그나마 싸울 수 있는 자신이 시간을 끄는 것 말고는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가요!”
키리코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을 서둘러 지하 1층 출구로 달려가게 했다.
그 사이 박하나는 쓰러진 경비의 품을 뒤져 놈이 들고 있던 권총을 노획했다.
철컥!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식은땀이 고이는 손 때문에 총을 줍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
그 순간 바로 위층에서 고성과 함께 놈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입항하던 선박의 선원들이 갑작스러운 총성에 놀라 창고로 달려온 것이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박하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계단 위층을 향해 리볼버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지하 1층으로 내려오던 놈 중 하나가 총알에 머리가 꿰뚫려 그대로 나자빠졌다.
이에 뒤따라 달려오던 나머지 선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자세를 숙였다.
“미, 미친!”
“총이다! 뒤로 물러나!”
좁은 공간에서 발사된 총알의 위력은 모두의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일단 급하게 시간을 벌은 박하나는 총알이 모두 소진된 리볼버 대신 권총을 꺼냈다.
철컥!
시간이 날 때마다 자동권총의 구조와 구체적인 작동 방법을 배워왔던 박하나다.
물론 아무리 이론을 달달 외운다고 해도 정작 실전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박하나는 오로지 감각과 본능에 의존한 채 모든 걸 운명에 맡기려고 했다.
탕! 탕!
기회를 틈타 지하로 접근하려던 놈들이 그대로 총에 맞아 하나둘 쓰러졌다.
“시발! 민간인이라며!”
“어떤 새끼가 총을 뺏긴 거야!?”
그 귀신 같은 사격 실력에 선원들은 이를 빠드득 갈며 결국 권총을 꺼냈다.
타앙! 탕! 탕!
날아오는 총알에 깜짝 놀란 박하나는 서둘러 바닥을 기어 복도 끝에 숨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총격전으로 인해 얼굴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스파크처럼 튀는 감각은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줬다.
‘도망쳐야 해.’
고립된 복도에서 총격전을 벌여봤자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다.
빠르게 판단을 끝낸 박하나는 복도 한쪽에 놓여있던 소화기를 향해 총을 쐈다.
탕!
퍼엉!
총알에 맞은 소화기는 한쪽이 터지며 새하얀 분말을 사방으로 내뿜기 시작했다.
총을 쏘며 다가오던 놈들은 졸지에 분말을 뒤집어쓰며 시야를 잃고 말았다.
콜록! 콜록!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박하나는 지하 1층 비상구를 향해 서둘러 뛰어가려고 했다.
탕!
그런데 그 순간 바로 뒤에서 들려온 총성과 함께 오른쪽 허벅지가 뜨거워졌다.
눈먼 총알에 맞은 박하나는 그만 중심을 잃었고, 이내 형편없이 쓰러졌다.
“끅!”
아무리 상속자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도 경험이라는 건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살면서 처음으로 총에 맞은 박하나는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세상 모든 것들이 흐려지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일어나!”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 달려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자신을 부축해주었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사람들을 데리고 먼저 탈출했던 동창생 키리코였다.
“그러게 왜 돌아와서는……!”
키리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친가족조차 자식을 버리는 이 지옥에서 박하나는 왜 우리를 구하려고 하는지.
왜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남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싸우고 또 희생하는지 말이다.
“얼마 안 남았어!”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박하나를 부축하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기어코 출구를 빠져나오자 하늘에서 내리는 장대비가 온몸을 매섭게 때렸다.
“쫓아! 도망친다!”
“당장 죽여 버려! 이 개 같은 년들!”
사람들이 빠져나갔던 숲속 근처에는 이미 수많은 손전등이 반짝이고 있었다.
동시에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고성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려줬다.
첨벙!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했던 키리코는 돌부리에 걸려 그만 흙탕물 위에 쓰러졌다.
졸지에 더러운 진창을 뒤집어쓴 박하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꾹 안았다.
그 안에는 자신을 구원해준, 또 상속자로 만들어준 일기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미안해요.’
누군가를 향해 사과한 박하나는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결국 두 눈을 감았다.
방구석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렸던 겁쟁이의 최후는 너무나 허무하고 또 쓸쓸했다.
타앙!
하지만 이상하게도 총성은 놈들이 들고 있던 권총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
갑작스러운 총성에 깜짝 놀란 선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뒤쪽 출구를 바라봤다.
털썩!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던 동료 중 하나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다.
탕!
탕!
탕!
그게 끝이 아니었다. 출구 방향에서 총성이 울리더니 다른 놈이 또 총에 맞았다.
“이, 이게 무슨……!”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놈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침입자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
하지만 어둠 속에서 뛰쳐나온 그림자는 총구보다 빠르게 그 사이로 녹아들었다.
콰직! 우드득!
그림자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살과 뼈를 부서트리는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빠르고 거침없는지 놈들은 적의 위치조차 알지 못했다.
끄아아아악-!!
살, 살려줘!
압도적인 수준 차이. 이는 양 떼 사이에 풀어놓은 한 마리 늑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두 눈을 크게 뜬 박하나만큼은 그 그림자를 직시하고 있었다.
“아……!”
아름답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고, 또 맹렬하다는 말로도 수식할 수가 없다.
적을 학살하는 그 모습은 마치 장대비 사이에서 추는 왈츠를 보는 것 같았다.
박하나는 허벅지 고통조차 잠시 잊은 채 그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서걱!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근처에 있던 모든 적들이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반대로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그’는 터벅터벅 다가와 그녀를 마주 봤다.
“박하나?”
첫 번째 상속자 박범석은 두 번째 상속자인 박하나를 향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일기 속 그 사람…… 당신 맞죠?”
“그래.”
이에 그녀는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손을 붙잡았다.
얼굴조차 모르던 선배이자 일기 속 조언자는 아포칼립스의 위대한 상속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