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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61화 (161/180)

<161화>

장대비가 세차게 내리던 밤, 높은 파도와 풍랑으로 인해 선박 운행이 잠시 중지됐다.

이에 사가노세키 항구 건너인 시코쿠 방면 본사도 등대를 제외한 모든 불이 꺼졌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내일 첫배가 떠나는 아침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예정이었다.

“뭐?!”

하지만 혼자 남아 장부를 정리하던 시즈키는 믿을 수 없는 연락 하나를 받았다.

“항, 항구가 공격받았다고?”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바로 밀항선이 입항 예정이던 사가노세키 항구가 누군가에게 공격받았다는 것.

이를 믿을 수 없었던 회사 사장 시즈키는 부하 직원을 닦달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새끼야!”

[진짜입니다! 나가서 한 번 보십시오!]

하지만 이미 넋이 나간 부하 직원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참다못한 시즈키는 결국 제 발로 발코니를 뛰쳐나가 서쪽 바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는 사가노세키 항구가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부하의 말대로 회사 소유 창고와 밀항선이 통째로 불타오르고 있었던 거다.

어억!

시즈키는 순간 혈압이 오르는지 뒤통수를 붙잡으며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아니, 도대체 누가? 저길 관리하는 애들은 나름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애들이었다.

경쟁 조직도 다 죽어서 없어진 마당에 저길 습격할 만한 놈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외지인, 즉 밖에서 온 세력이라는 걸 의미했다.

넋이 나가 있던 시즈키는 곧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상황 파악이 끝났으니 서둘러 짐을 챙겨 떠나야 한다.

“남은 애들 데리고 전부 넘어와!”

[예? 이대로 가만히 두시겠다고요?]

“거기 모여있는 애들만 50명이었어! 걔들이 아무것도 못 해보고 털렸는데 네가 보기엔 이게 정상 같아?! 우리 상대가 아니라고!”

시즈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바로 기가 막힌 눈치와 자기 객관화였다.

정말 분수 하나는 제대로 알고 있던 그는 오금이 저리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반격이고 뭐고 상대가 누군지 알기도 전에 이쪽이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쾅!

부하 직원을 닦달한 시즈키는 서둘러 금고로 달려가 귀금속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래, 어차피 잘 됐어. 이 짓도 슬슬 지겨운 참이었는데 손 털 때가 됐다.

이 정도 돈이랑 부하들이면 부산에서도 사장님 소리 들으며 살 수 있을 터.

순식간에 모든 짐을 챙긴 시즈키는 허겁지겁 본인 소유 선박을 향해 달려갔다.

“어이!”

마침 항구 앞에는 부하 여럿이 어슬렁어슬렁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끼익?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대답이 아닌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목을 우두둑 꺾었다.

지금 보니 얼굴이 하얗게 변해있고 옷과 몸이 시뻘건 핏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어, 어어?

시즈키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감염체가 된 부하들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다.

끼아아아아악-!!

하지만 놈들은 아가리를 쩍 벌리며 시즈키를 빠른 속도로 쫓아가 살점을 뜯었다.

그 숫자만 물경 수백, 그 뒤에는 더 많은 감염체 무리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도, 도망쳐!”

“으아아아악! 살려줘!”

시코쿠 방면 항구는 순식간에 점령당했고 일부 선원들은 배를 타고 탈출하려 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군락이 될 숙주가 변이 바이러스를 퍼트린 지 오래.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도달한 회색빛 재앙이 규슈 지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 * *

박하나를 위험에서 구해낸 나는 대기 중이던 송지영에게 즉각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5분 만에 항만 창고로 들이닥친 대원들은 순식간에 놈들을 제압해버렸고, 인신매매와 각종 범죄 현황에 대한 증거를 확보한 뒤 현장을 빠르게 정리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창고와 선박이 불타오르는 예상치 못한 헤프닝이 있었지만, 잡혀있던 생존자를 모두 무사히 구해내는 것으로 1팀은 그 실력을 입증했다.

이제 남은 것은 피난민을 후쿠오카로 호송하고 감염체 저지선을 구축하는 것뿐.

본대와 연락을 취한 우리는 주변 건물을 점거한 채 조용히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본대와 형식적인 보고를 끝낸 나는 임시 병실로 향했다.

똑똑.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보호자 자리에 앉아있던 키리코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안, 안녕하세요.”

그 옆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박하나가 새하얀 침대 위에 쥐 죽은 듯 누워있었다.

밤새 그녀를 간호해준 걸까, 대충 사정을 듣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의리 있는 친구다.

“동생 찾았어요.”

“아…!”

나는 조금 전 대원들이 수소문하며 찾아낸 어린 동생 소식부터 알려주었다.

이에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린 키리코는 두 손을 꼭 모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자리를 비워도 된다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나섰다.

나는 그 빈자리에 대신 앉아 세상모르고 잠이 든 박하나를 조용히 살펴보았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20살 소녀, 딱 그 나이대의 뽀송뽀송한 병아리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외형과는 반대로 몸에 달고 있는 상처들은 정말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용케도 버텼네.’

미래 일기가 서술하던 모습과는 반대로 박하나의 몸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못했다.

일단 탈진은 기본에 고열, 감염, 또 몸에는 온갖 생채기와 물린 상처로 가득했다.

오죽하면 허벅지를 지혈하던 베테랑 의무병이 화들짝 놀라며 들것을 찾았겠는가.

이런 몸으로 적과 싸웠다는 사실에 나는 한동안 그녀의 정체를 의심해야 했다.

물론 그 의심은 곧 미래 일기라는 절대적 개연성 앞에 무너져 내렸지만 말이다.

“으으…….”

조용히 잠에 빠져 있던 박하나가 인기척에 옅은 신음을 뱉으며 두 눈을 떴다.

그녀는 잠시 고통을 호소하더니 곧 보호자 자리에 앉아있던 나와 눈을 마주쳤다.

“몸은 좀 어때?”

“다, 다리가 너무 아파요.”

“원래 그게 정상이야.”

이제 고작 두 번 만난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그만큼 같은 상속자라는 공통점이 서로에게 유대감을 느끼게라도 해주는 모양.

나는 눈동자가 점점 초롱초롱해지는 박하나에게 가지고 온 소지품부터 돌려주었다.

“자, 네가 가지고 있던 거.”

“앗!”

가장 먼저 일기장이 든 가방과 총알이 모두 소진된 리볼버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그러다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곧 볼과 귓불을 붉히며 고개를 힘없이 숙였다.

“일기장이 그렇게 좋냐?”

“제 친구란 말이에요…….”

나는 그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트렸고 박하나는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울상을 지었다.

그래, 너도 영락없는 상속자구나. 미래 일기가 정말 보는 눈 하나는 정확했다.

그 모습을 싱글벙글 웃으면서 보고 있던 나는 곧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앞으로 계획은?”

미래 일기가 원하는 것은 박하나라는 개인의 성장과 상속자끼리의 협력이다.

하지만 녀석이 아무리 돕고 이끈다 해도 인간에게는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적어도 미래 일기를 쫓아갈 수 있는 준비, 아니 스스로를 지킬 능력을 키워야 했다.

이는 박하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계획이요?”

“네가 원한다면 강릉으로 보내줄 수도 있어. 거기서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나야 할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아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이 자리에 앉아있다.

하지만 원치 않은 상속을 받게 된 그녀에게까지 이 짐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하나는 미래 일기를 품에 꾹 안으며 웅얼거렸다.

“혹시 제가…… 방해가 될까요?”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야. 지금은 그냥 네가 좀 더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

상속자의 길은 일방통행과도 같아 한 번 발걸음을 떼면 절대로 돌아올 수 없다.

이는 살기 위해 묻혔던 피와 같았고 또 언젠가는 돌려받을 업보의 청산이었다.

이를 1년 먼저 경험해보았던 나는 박하나가 되도록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우연히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밤하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저는 살면서 뭐 하나 잘해본 기억이 없어요. 남들보다 모자랐고 또 배우는 게 항상 늦었거든요. 하지만 저희 할머니만큼은 언젠간 제 자신을 알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현명하신 분이셨구나.”

“네, 제게는 과분한 분이셨죠. 만약 그 말을 잊었다면 여기까지 절대 못 왔을 테니까요. 내가 상속자가 되는 날, 그리고 또 다른 상속자를 따라가는 이 순간 말이에요.”

더 이상 설득해봤자 의미가 없다. 박하나는 마음을 굳힌 지 오래였으니까.

기어코 확답까지 듣게 된 나는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특별대우는 불가능해.”

“그런 걸로 서운해 하지 않아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지도 몰라.”

“이미 각오하고 왔는걸요.”

나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S/W사 38구경을 뺏어 수거함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예전에 선물 받았던 콜트 파이슨을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쓸 만한 총을 잘 구했어. 하지만 가끔은 딱 한 발로 끝내야 하는 순간이 올 거야.”

“정, 정말 주시는 거예요?”

“그래. 꼭 필요할 때 써.”

박하나는 마치 곰 인형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묵직한 콜트 파이슨을 꼭 끌어안았다.

이제 그 총은 미래 일기와 함께 앞으로의 여정을 책임질 중요한 파트너가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상속자로서 살게 된 박하나를 진심 어린 마음으로 축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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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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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상속자는 필연적인 존재다. 이는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요 동시에 특권이다. 축하한다. 과제를 모두 완수한 ‘그녀’는 이제 ‘그’의 그늘에 머물며 훌륭한 상속자로서 교육받게 됐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완전히 차단했다고 생각한 진입로에는 균열이 존재했고 상위 군락은 그 틈을 정말 교묘히 파고들었다. 놈들이 심은 씨앗은 이미 숙주가 되어 아무도 몰래 규슈 지방에 도달했다.]

[이는 단순한 하위 개체가 아니다. 홋카이도를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가고 있는 또 다른 상위 군락의 탄생이 분명하다. 이를 초기에 막지 못한다면 후쿠오카를 점거했던 노력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감염의 근원지를 찾아야 한다. 이제 막 수습생이 된 ‘그녀’는 자기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선두에 나서기로 했다. 현재 감염체 오염이 예상되는 장소는 이곳과…….]

탁!

남들 몰래 미래를 예언하고 있던 일기와 모나미 볼펜을 박범석은 재빠르게 붙잡았다.

부우웅!?

그러자 녀석은 깜짝 놀랐는지 핸드폰 진동처럼 부르르 떨며 반항하려고 했다.

박하나, 박하나 어디 갔어! 분명 바로 옆에 있어야 할 귀여운 주인이 사라져버렸다.

“박하나가 널 팔았어.”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미 박범석에게 홀랑 넘어가 일기장을 넘겨준 지 오래였다.

충격적인 소식에 모나미 볼펜은 비명을 지르며 억지로 미래를 털어놓아야 했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잃어버렸던 예언이 돌아왔다. 박범석은 군락보다 한발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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