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아직 해가 떠 있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쏴아아아아-!
거센 장대비 속에 몸을 숨긴 나는 조심스럽게 망원경을 꺼내 바다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파도가 일렁이고 있는 해안가에 선박이 좌초되어있는 게 보였다.
사람이 탔다고 하기에는 갑판 곳곳에 남아있는 오염 물질이 유난히 눈에 뗬다.
‘찾았다.’
놈은 사가노세키 항구와 20~30㎞ 떨어진 인근 해안가에 숙주를 상륙시켰다.
또 우리가 오기 전, 인근 야산으로 이동해 성공적으로 군락을 생성해냈다.
아마 지금쯤은 둥지를 깊게 파고 감염체와 변이종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놈.
하필 주변이 나무가 우거진 야산이라 정확한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게 흠이었다.
정말 날이 갈수록 영리해지는 것은 물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허를 찌른다.
아마 미래 일기의 예언이 아니었다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공격을 당할 뻔했다.
그렇게 정찰을 완료한 나는 위성 전화기를 들어 김태하 소장과 연락을 취했다.
“예상한 곳이 맞았습니다.”
[최악이군.]
“길은 아직입니까?”
[도로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어. 차량이 이동하려면 반대 방향으로 우회해야 하네.]
놈이 상위 군락의 씨앗이라는 걸 생각하면 지금 당장 공격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하필 몰아친 폭우로 인해 연합군 본대는 발이 묶여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하루 이틀 거리면 뭐하나, 정작 지상군이 이동하지 못하고 있는데.
설상가상 태풍과 맞먹는 강풍까지 불어 헬기와 항공모함도 발이 묶여버렸다.
“곤란하네요.”
[웬만하면 후퇴했으면 해.]
만약 이 자리에 1팀만 있었다면 잠시 후퇴하거나 혹은 지연전을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사가노세키 항구에는 수백 명이 넘는 피난민이 후쿠오카로 후송 예정이었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후방으로 물러난다면 그들은 고스란히 감염체가 되어버릴 터.
“저희끼리 막아보겠습니다.
[가능하겠나?]
“예. 어떻게든 해봐야죠.”
[우리도 지원할 방법을 찾아보겠네.]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지쳐 보이는 김태하 소장과의 통화를 끊었다.
마찬가지로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덧 대원들이 알아서 모여 있었다.
다들 대충 현장을 봤으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을 터.
하지만 그 누구 하나 고립 상황을 걱정하거나 후퇴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원래 고립되는 게 일상이지. 이 정도 위험쯤은 이제 웃으면서 받아줄 수 있다.
“가자.”
나는 여유롭기 그지없는 대원들과 함께 몰아치는 폭우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우리가 있던 자리는 곧 물웅덩이가 고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흔적을 지웠다.
* * *
보통 감염체와 벌이는 전투는 선방어, 후공격이라는 정형화된 교본을 따른다.
이는 지원이 올 수 없는 고립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패턴이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반나절, 그전까지 감염체를 맞이할 준비를 끝내두어야 했다.
‘이쪽으로 모이십시오.’
일단 피난민들은 그나마 제일 튼튼한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로 전부 대피시켰다.
물론 존재하는 입구와 창문은 모조리 판자와 못으로 막아버리는 건 기본.
근처에 철조망과 바리케이드를 촘촘하게 설치해 이중 삼중으로 진입을 차단했다.
또한, 마을 입구에 차단용 폭약을 설치했으며 가지고 온 클레이모어랑 감염체 전용 부비트랩을 도로 곳곳에 잔뜩 깔아두었다.
이 정도면 감염체 웨이브는 몰라도 무리와 일부 변이종 정도는 충분히 막을 것이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방어선을 구축한 우리는 시간에 맞춰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우우우우우웅-!!
폭우와 강풍을 뚫고 활공한 군용 수송기가 고공비행을 펼치며 힘겹게 접근해오고 있다.
레이저 신호를 받은 그들은 공중 보급품을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뛰어!”
“딱 하나만 건지는 거다!”
이런 혹독한 날씨에 낙하산을 대롱대롱 매단 보급품이 제자리에 떨어질 리는 없다.
하지만 일부러 하중을 무겁게 한 덕분에 일부 물자는 인근 지역까지는 도달했다.
저게 곧 생명줄이나 다름없던 대원들은 진짜 미친 듯이 달려 보급품을 회수해왔다.
덜컹!
가장 기본적인 탄약부터 시작해서 의료품, 식량, 생수, 또 갖가지 기호식품도 있었다.
제대로 준비하겠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하나같이 정말 알찬 구성이었다.
“음?”
하지만 중간중간 저절로 물음표가 떠오르는 보급품들이 하나씩 발견되기 시작했다.
“누가 발주를 잘못 넣었나 본데요?”
“뭐, 많다고 해서 나쁠 건 없는데…….”
예비로 쓰라고 준 것치고는 보급품에 담긴 총기 수량이 과할 정도로 많다.
이 정도면 우리 대원들 한 명당 2~3개씩 돌려서 써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인원이 적은 지금으로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보급 품목 중 하나.
쯧, 가뜩이나 총기 관리가 힘든 상황에 해야 할 일거리만 늘려주고 있었다.
작게 혀를 찬 나는 예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총기를 건물 지하로 옮기려고 했다.
“저, 저기.”
그런데 그 순간 목발을 짚은 박하나가 절뚝절뚝 옥상으로 올라와 눈치를 봤다.
이상하게도 그 뒤에는 키리코를 포함한 피난민 일부가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뭐지, 불만 사항이라도 있나?
그 분위기가 자못 심각하다는 걸 느낀 우리는 본능적으로 경계부터 했다.
내가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자 우물쭈물하던 박하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두들 돕고 싶다고 하셔서요.”
“……돕는다고?”
“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나 봐요. 혹시 도울 일이 없냐고 물어봐 달래요.”
피난민은 항상 보호와 통제의 대상이었지 함께 싸운다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
이는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인지 어깨를 멋쩍게 으쓱이며 서로를 바라봤다.
현재 민간인이 해줄 수 있는 건 물자를 옮기거나 바리케이드를 보수하는 정도.
하지만 이들은 다른 생각이 있는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다가와 무어라 말했다.
“뭐래?”
“자기가 총을 다뤄본 적이 있고 동료 몇 분도 마찬가지래요. 만약 허락만 해주신다면 대원들 옆에서 함께 싸우고 싶대요.”
현재 1팀 대원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총알이 아닌 화망을 구성할 인원이다.
만약 이 피난민 중 한 사람이라도 가세해준다면 확실히 숨통이 트일 터였다.
“이유가 있나?”
“가족들과 함께 왔나 봐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에 굳어있던 대원들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졌다.
뭐, 괜한 만용을 부리려는 것이 아닌,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건물 방어라도 맡겨보시죠?”
“접근하는 것만 막아줘도 도움이 될걸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문 상사와 송지영이 넌지시 의견을 제안해왔다.
팀장급 베테랑 대원 둘이 동의를 표하자 다른 대원들도 하나둘 고개를 끄덕인다.
“가서 확인해봐.”
“예.”
이들이 진짜 총기를 다룰 줄 안다면 3층 건물에서 방어를 담당하게 하면 된다.
경태에게 기본적인 검수를 맡긴 나는 웅성거리는 피난민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게 통역이 끝났는지 그 웅성거림은 곧 묘한 떨림과 긴장감으로 번져나갔다.
“자, 일단 총을 쏴봤다. 손?”
잠시 뒤, 무장할 인원이 선별되고 그들은 임시라는 하얀 명찰을 받게 되었다.
그들을 가르치고 또 방어선을 보수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가 되어버렸다.
저 멀리 장대비가 삼킨 태양이 사라지자 세상은 짙은 어둠으로 물들어버렸다.
* * *
보통 군락은 감염체 활동이 활발해지는 밤 시간대를 노려 사람을 공격하는 편이다.
이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는지 늦은 밤이 돼서야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건물 옥상에서 드론으로 정찰 중이던 송지영이 가장 먼저 감염체를 발견해냈다.
이에 무전은 빠른 속도로 전파됐고 대기 중이던 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찬가지로 건물 옥상까지 올라온 나는 개인 화기를 챙겨 탄알집을 끼워 넣었다.
철컥!
탄알집이 부드럽게 들어가는 기분 좋은 소리가 긴장감으로 뭉친 근육을 풀어준다.
마지막으로 노리쇠를 당긴 뒤 야간투시경을 쓰고 저 멀리 산속을 바라봤다.
쏴아아아아아-.
더욱 굵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물방울을 가득 머금은 나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러운 그 풍경은 감염체가 몰려오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기현상이었다.
나는 나무가 흔들리는 산속을 살피며 놈들의 규모를 대략이나마 가늠해봤다.
‘웨이브까지는 아니야.’
우리가 조급한 만큼 상위 군락도 적을 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감염체는 생산을 채 끝내지 못한 채 무리 규모로만 몰려왔다.
좋아,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나는 무전기를 들고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관측팀 후퇴하고 나머지는 대기해.”
드론을 회수한 송지영이 잽싸게 건물 아래로 내려와 부비트랩 존을 빠져나갔다.
철컥!
대기 지시를 받은 대원들은 기관총을 거치하고 방수천을 머리 위에 뒤집어썼다.
지겹게도 내리는 비가 짙은 어둠과 만나니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찌릿!
하지만 나는 시야보다 선명한 감각을 배경 삼아 옥상 난간 위로 총구를 거치했다.
감염체 놈들과 우리 사이에 이어지고 있는 대치를 이쪽에서 먼저 깨줄 생각이었다.
끼릭.
수풀 사이로 알비노 변이종이 몸을 웅크린 채 감염체를 지휘하려고 했다.
그것을 감각으로 찾아낸 나는 배율 조준점 사이에 놈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탕!
설마 발각될 줄 몰랐던 알비노 변이종은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머리가 꿰뚫렸다.
동시에 미친 듯이 흔들리던 나무들이 멈추며 숨 막히는 침묵이 찾아왔다.
하나, 둘, 셋. 마음으로 숫자를 세고 난 뒤 곧 들려올 그 울음소리를 기다렸다.
끼아아아아악-!!
침묵이 깨졌다. 기괴한 비명을 지른 놈들이 어둠을 뚫고 마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지 불과 300m 거리를 실시간으로 좁혀 오고 있었다.
“기다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으며 반격할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렸다.
마침 표식 지대를 돌파한 감염체 무리가 마을 입구로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지금!”
쾅! 근처 골목에서 대기 중이던 경태가 내 신호에 맞춰 TNT 폭발물을 터트렸다.
콰르르르릉!
그 순간 입구 양옆에 있던 건물이 무너져 내리며 감염체 무리 위를 덮쳤다.
놈들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달려오다가 무너지는 콘크리트에 깔려 짓뭉개졌다.
가뜩이나 좁던 마을 입구는 무너진 건물과 함께 완전히 틀어 막히고 말았다.
끼아아아아악!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알비노 변이종이 비명을 지르며 감염체를 지휘했다.
놈들은 잠시 주춤하나 싶더니 다른 입구로 우회해 마을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쏴!”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대기 중이던 모든 대원에게 사격 명령을 내렸다.
투두두두두-!!
타앙! 탕! 타다다다당!
건물마다 배치된 기관총이 불을 뿜자 달려오던 감염체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그 뒤를 더 많은 놈들이 밀려왔지만, 곧 같은 운명을 맞이하며 다진 고기가 됐다.
원하는 방향, 원하는 각도, 원하는 타이밍을 노리고 한곳으로 집중되는 교차 화망.
마을 안으로 몰려오던 감염체 무리는 무언가를 해볼 틈도 없이 녹아내려 버렸다.
“와…….”
같이 건물 옥상에 있던 한 피난민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두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탄알집을 교체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전을 보냈다.
“포지션 교체!”
1파로 감염체 무리가 몰려왔으니 이제는 변이종이 포함된 2파가 공격할 차례다.
수십 번, 정말 수백 번 이를 겪어본 나와 대원들은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
[변이종 출현! 신개체입니다!]
참다못한 상위 군락이 그동안 숨겨놓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놓았다.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잽싸게 가방과 총을 챙겨 집라인으로 몸을 날렸다.
치이이이익!
곳곳에 심어둔 부비트랩이 작동하며 하늘 위로 수십 개의 조명탄이 날아올랐다.
끼익?
그제야 내 존재감을 읽은 모든 감염체가 이쪽을 향해 시퍼런 눈동자를 돌렸다.
그놈이다!
놈들은 달려가려던 움직임을 한순간 멈추고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수천 마리 감염체에 표적이 된 나는 여유로운 얼굴로 집라인을 타고 내려갔다.
찌릿!
저 멀리 숲속을 바라보니 방금 막 태어난 상위 군락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척!
나는 당당하게 중지를 들어 올려 놈과의 조우를 산뜻하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