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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66화 (166/180)

<166화>

이제 겨우 두 달밖에 지나지 않은 만큼 시간적 여유를 주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미래 일기를 너무나 우습게보고 있던 내 착오이자 실수였다.

녀석은 좋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뿐, 박하나를 안전하게 성장시킬 생각이 없었다.

이제 막 튜토리얼을 깨고 나온 초보한테 보스 레이드를 돌라는 게 말이 되는가?

해도 해도 적당히 해야지, 이건 그냥 가서 죽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나마 현실적인 방안을 찾기 위해 미래 일기와 몰래몰래 협상하려고 했다.

‘저 할래요.’

하지만 이를 먼저 눈치 챈 박하나가 비장한 얼굴로 달려와 임무를 자처했다.

당황한 나는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해주어야 했다.

그렇게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너는 정말, 정말 아무것도 몰라.

이 세상엔 고귀한 영웅이 아닌 영웅을 원하는 방관자들만이 있다는 걸 말이야.

‘어차피 하게 될 일이에요.’

하지만 이 모든 설득과 노력은 짧은 대답 한 마디에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차피 하게 될 일, 상속자가 되기로 한 이상 절대 피해 갈 수 없는 고난의 운명.

이미 두 차례 과제를 풀어온 박하나는 마음 한편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처음 일기를 상속받고 삶의 방향을 정했던 누군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 앞에 처음으로 뜻을 꺾어야 했다.

이젠 혼자 고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단계는 이미 지나가 버린 듯했다.

막사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가장 믿을만한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동안 숨겨놓고 또 혼자만 알고 있던 진실을 처음으로 타인에게 밝힌 것이다.

“이거야.”

경태, 가은이, 문 상사와 송지영은 책상 위에 놓인 일기장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들에게는 단순한 백지로 보이는 이것이 무려 미래를 예언하는 일기장이다.

미친놈 취급받을 각오까지 한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게 그 미래 일기라는 거예요?”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겼는데.”

하지만 일행 중 그 누구 하나 장난을 의심하거나 깜짝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의외의 반응 앞에 도리어 멋쩍어진 나는 신기해하는 일행들을 보며 물었다.

“못 믿겠어?”

“아뇨, 믿어요.”

“근데 왜…….”

“그냥 어렴풋이 알고 있었거든요. 형님이 다른 사람이랑 좀 많이 다르다는 거.”

레드존 군락 사건이 있었던 이후, 상식 아저씨가 두 사람에게 언질을 줬다고 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조용히 따르고 또 항상 옆에서 꿋꿋하게 지켜주라고 말이다.

아마 할아버지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아저씨는 내막을 알고 계셨던 모양이다.

“언제 말해주나 궁금하긴 했어요.”

“그때 농담이라고 해서 그렇잖아, 바보야.”

나는 그동안 고민했던 나날이 바보처럼 느껴져 그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혼자 짊어진 줄 알았던 이 무거운 짐을 묵묵히 따라와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세한 내막을 듣게 된 일행들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박하나를 보내야 한다는 거죠?”

“응.”

내가 상속자라는 게 밝혀지면서 박하나의 존재 또한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됐다.

세 번째 과제가 무엇인지 전해들은 일행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일단 혼자서는 절대 무리에요.”

“아직 기초 교육도 다 안 끝난 애야.”

훈련에서 아무리 뛰어난 성과를 내는 교육생이라도 정작 실전에 돌입하면 패닉이 오거나 도망쳐버리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그만큼 감염체를 상대로 벌이는 특수전은 인간의 한계를 극한으로 몰고 간다.

이러한 시련을 이제 겨우 훈련 두 달째인 박하나가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해도 현실이라는 한계는 너무나 명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하나를 도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 고민하던 문 상사를 시작으로 송지영이 나고야 팀에 자원했다.

“저희가 함께 갈게요.”

“가능하겠어?”

“어차피 연락할 수 있다면서요. 선배 지시만 기다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본인들 능력만으로도 특수팀 하나 정도는 능숙하게 이끌 수 있는 두 사람이다.

만약 문 상사와 송지영을 박하나 옆에 붙여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상황은 없다.

나는 기꺼이 고생을 자처해준 그 둘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매번.”

“뭘요. 선배님 부탁인데요.”

이것으로 두 번째 상속자, 박하나의 나고야 행이 결정되었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오로지 훈련과 작전 계획에만 집중할 예정이다.

일행들은 내일 다시 만나자는 말과 함께 하나둘 막사 밖으로 나갔다.

“선배.”

그 순간 문밖을 나서려던 송지영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곧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나와 포옹하며 다정하게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혼자 힘들었죠?”

어쩌면 일행들을 대표할지도 모르는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사르륵 녹였다.

그동안 겪어온 모든 아픔과 고통이 지금 이 순간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이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 * *

특임대를 두 개 팀으로 나누겠다는 의사를 연합군 사령부에 전달했다.

이를 전해들은 김태하 소장은 억지로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표했지만, 곧 내가 전달한 작전 개요를 보자마자 깔끔하게 인정하고 안건을 통과시켰다.

‘전쟁이다!’

군락을 동시 타격한다는 소식이 연합군 내부에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병사들 사기는 당연히 하늘을 찔렀고 미연방 또한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했다.

쿠르르릉!

거대한 항공모함과 한반도 연합군의 기갑 부대가 간몬교 근처로 집결했다.

또한, 미국이 보낸 전술핵과 작전에 사용할 폭격기들이 속속 도착했다.

언제, 어디를 공격해야 효과적이며 또 경로는 어떻게 잡아야 특임대가 안전할까.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 모인 본부 막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야성을 이뤘고, 현재 연합군이 가진 모든 전력을 특임대 위주로 배치하며 계획을 수립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정확히 일주일 뒤, 작전명 ‘영광의 길’이 최종 결정되었다.

“뛰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박하나가 재빨리 권총을 뽑아 앞으로 달려갔다.

탕! 탕! 탕!

동시에 앞에서 튀어나오는 표적을 명중시키며 텍티컬하게 내부로 진입했다.

“더 빨리!”

그 옆을 빠르게 따라붙은 나는 연신 윽박지르며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했다.

철컥

하지만 박하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총을 스왑하더니 곧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륵! 드르륵!

단발, 점사, 연발, 능숙하게 안전 걸고 또 단발, 점사, 연발을 번갈아 사용했다.

이젠 거의 총과 한 몸이 된 그녀는 주변 표적을 순식간에 쓰러트려 버렸다.

‘0.4초 단축!’

아직 끝이 아니다. 박하나는 소총을 내려놓고 순식간에 자동 산탄총을 꺼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주변에서 표적들이 튀어나오며 진입로를 틀어막았다.

철컥, 펑!

철컥, 펑!

철컥, 펑!

박하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겨 달려드는 표적을 모조리 도살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민간인 표식은 털끝도 대지 않는 절묘한 디테일까지 보여주었다.

미쳤다.

전술 훈련장 위에서 이를 관람하던 대원들은 결국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깜짝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뒤를 바짝 따라갔다.

철컥, 철컥!

탄약이 모두 소진된 시점, 마지막으로 설정된 표적이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왔다.

후웅!

이에 박하나는 왼손으로 토마호크를 뽑더니 보이지도 않는 표적을 향해 던졌다.

콰직!

토마호크가 허공을 가른다. 순식간에 날아간 도끼날이 표적의 머리에 명중했다.

삑!

그 순간 전술 훈련장 전광판 위로 모든 표적을 처치했다는 붉은 빛이 들어왔다.

허억, 허억!

박하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전광판 위로 떠 오른 점수판을 확인했다.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1초의 벽. 그 벽을 드디어 마지막 날 넘고야 말았다.

“꺄악!”

그동안 꾹 참고 견뎌오던 박하나는 결국 흥분을 참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이는 걸로 보아 그간 훈련이 정말 힘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들고 있던 수건과 수통을 내밀었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실전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한 전술 훈련장이었다.

거기서 이 정도 성과를 냈다는 건 박하나가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는 걸 의미했다.

“잘했어, 병아리!”

“언니는 너만 믿고 간다!”

대원들은 하나둘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친근감을 표했다.

그동안 함께 훈련해오면서 귀여운 막내 포지션을 자처했던 박하나.

하지만 이 시간 이후부터는 등을 맞대고 싸울 믿음직한 전우로 취급될 것이다.

“모두 모여.”

내 목소리에 대원들은 언제 웃고 떠들었냐는 듯 진지한 얼굴로 달려와 기립했다.

그 얼굴을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훑어본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날짜가 결정됐다.”

날씨와 기상 상황, 군락의 움직임까지 관찰한 결과 드디어 디데이 날짜가 잡혔다.

나는 김태하 소장이 보내준 작전 공문을 읽으며 대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브리핑했다.

“시간은 02시 30분. 후쿠오카에서 출발해 간몬교까지 헬기로 이동한다. 엄호는 델타 팀과 정보사에서 맡아주기로 했고 히메지 시 앞까지는 함께 이동하게 될 예정이다.”

그동안 컨디션을 충분히 회복한 대원들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팀을 나누는 건 언제입니까?”

“1팀이 오사카로 진입하는 즉시, 2팀은 비와 호수를 건넌다.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는 게 확인되면 바로 공격을 요청해도 좋아.”

상위 군락은 아마 전파 방해만을 믿고 나고야 시를 비워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기적인 예언과 소통 능력을 보유한 미래 일기가 있다.

서로 도착했다는 걸 확인만 한다면 이번 작전은 별 무리 없이 진행될 것이다.

“내일은 푹 쉬어라. 이상!”

대원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를 붙이며 하나둘 전술 훈련장을 나갔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나는 조명과 전광판을 끄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삐리리리리.

그런데 그 순간 위성 전화기가 울리더니 희망 아파트 공용 번호로 연락이 왔다.

깜짝 놀란 나는 혹시 강릉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아저씨?”

-어이, 시장! 잘 있었지?

“무슨 일 있어요?”

-우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통화하나? 그냥 안부나 좀 물을 겸 한번 전화해봤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구나. 그제야 안도한 나는 간이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오랜만에 아저씨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강릉 생각이 더욱 간절하게 났다.

“별일 없으시죠?”

-강릉은 맨날 같지 뭐. 시장에서 싸우는 아줌마들 뜯어말리고 주민들 불만 사항 좀 들어주면 하루는 금방이야. 요즘은 진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다니까.

“저도 빨리 돌아가고 싶네요.”

-안 그래도 다들 보고 싶다고 그래! 언제 돌아오나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니까?

해외 체류 기간이 길어질수록 평화로운 도시인 강릉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고향 소식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떠들었다.

-이번엔 위험한 곳에 간다며?

“그렇죠, 뭐.”

-나는 우리 시장이 항상 걱정이야. 제발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부처님한테 빌고 또 비는데, 혹시 안 좋은 전화라도 올까봐 전전긍긍해. 여기 이 사람들도 다 같은 마음일걸?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몸조심해! 영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도망치라고! 남들이 비겁하다고 비난해도 우리가 항상 옆에서 지켜줄 테니까.

상식 아저씨는 아닌 척 콧물을 삼켰지만 이미 목소리가 눈물로 젖어있었다.

이를 굳이 티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래! 밥 잘 챙겨 먹고! 강릉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기나 해.

상식 아저씨는 울었다는 게 부끄러운지 곧 호탕한 웃음과 함께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전화를 끊은 나는 한동안 의자에 앉아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음속 먹구름이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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