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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67화 (167/180)

<167화>

늦은 새벽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지상에는 아직 후덥지근한 공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송골송골 맺힌 이마 위의 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뒤쪽을 살펴보았다.

대원들은 하나 같이 긴장된 얼굴로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호응하듯 수송용 헬기는 꿉꿉한 새벽하늘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날아갔다.

치익!

이번에도 운전대를 잡은 조종자가 센스있게 무전기 잡음으로 신호를 주었다.

우리는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뜨며 헬기에서 내릴 준비를 시작했다.

투두두두두두-!!

저 멀리서 규슈 지방과 본토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인 간몬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주변에는 반나절 일찍 후쿠오카에서 출발한 연합군이 진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위를 보란 듯이 가로지르며 활공한 헬기는 미리 준비된 공터에 착륙했다.

“이쪽입니다!”

착륙장에서 대기 중이던 방위군 장교들을 따라 숨겨진 차고지까지 이동했다.

그곳에는 우리를 위해 특수 제작된 험비와 다목적 장갑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험난한 본토를 뚫고 들어갈 차량인 만큼 하나같이 튼튼하게 개조되어 있었다.

“교란 장치가 내장되어있는 모델입니다!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게 주의해주십시오!”

단가만 수십억 원씩이나 하는 군락 교란 장치가 차량마다 하나씩 내장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최고의 지원과 장비를 약속하겠다던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

나는 보닛에서 내려오는 기술 장교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뒤 험비에 탑승했다.

“출발!”

시동이 걸렸다. 험비와 장갑차는 차고지를 빠져나와 간몬교를 향해 달려갔다.

이에 무전기들이 시끄럽게 울리며 곧 대기 중이던 연합군 본대가 움직였다.

쿠르르르르릉-!!

가장 먼저 우렁찬 엔진음을 내뿜은 기갑 차량들이 하나둘 진격을 시작했다.

그 뒤를 보병을 태운 기계화 차량과 상륙정이 발 빠르게 따라붙었다.

연합군 본대가 드디어 간몬교를 넘어 일본 본토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끼아아아아악-!!!

현재 본토에는 규슈 지방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숫자의 감염체가 깔려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빛과 소음에 끌린 감염체 웨이브가 본대를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철컥!

하지만 연합군은 이미 침착하게 대형을 이루고 반격할 준비를 끝낸 지 오래였다.

사격! 공격 지시가 떨어지자 놈들을 조준하고 있던 포구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펑! 퍼엉! 펑!

밤하늘에 쏘아 올린 폭죽처럼 감염체 웨이브를 향해 수많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쾅! 콰르르르르릉-!!

포탄이 떨어진 대지는 격하게 흔들렸고, 놈들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분해되었다.

인류가 감행한 대대적인 반격은 감히 감염체가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치익!

[사방이 놈들 천지야! 최대한 시선을 끌어줄 테니까 외곽 도로로 빠져나가!]

상륙 작전을 지휘 중이던 김태하 소장으로부터 드디어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발 빠르게 반응한 험비들은 서서히 속력을 올려 간몬교 한가운데를 질주했다.

쾅! 콰아아앙!

폭음과 고함! 사방에서 우리를 무사히 보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간절한 염원을 온몸으로 느끼며 입 밖으로 벅찬 숨을 내뱉었다.

부아아아아앙-!!

간몬교를 빠져나온 차량 행렬은 드디어 본토를 건너 도로 외곽으로 진입했다.

앞으로 5㎞만 더 나가면 감염체 영향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끼아아아아악!

그런데 그 순간, 밀리는 것 같던 감염체 웨이브가 갑자기 빠르게 불어났다.

상위 군락의 입김이 닿았는지 갑자기 움직임을 바꿔 경로를 틀어막은 것이다.

“도로가 막혔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빠져나가기는커녕 몰려오는 놈들에게 압사당하게 생겼다.

운전대를 잡은 경태는 금방이라도 브레이크를 밟으려는 듯 어깨를 움찔거렸다.

“계속 가!”

하지만 나는 경태에게도, 뒤따라오는 대원들에게도 멈추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태하 소장은 이 정도 변수도 예측 못할 정도로 무능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도리어 속력을 올리며 저 멀리 일렁이는 감염체를 향해 질주해 나갔다.

삐이이이이!

그 순간 저 멀리 하늘에서 수많은 폭격기가 어둠을 뚫고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란 듯이 창공을 활공하더니 곧 지상에 무언가를 하나둘 투하했다.

피잉! 핑!

클러스터탄! 한국에서는 흔히 집속탄이라 불리는 살상 무기가 작렬했다.

쿠르르르릉!!

그 위력이 어찌나 맹렬한지 어둡던 하늘이 한순간 붉은빛으로 물들어버렸다.

“꽉 잡아!”

폭격 한 번으로 축구장 크기만 한 지역을 초토화할 수 있는 게 바로 집속탄이다.

그런 집속탄을 무려 수십 방이나 떨어트렸으니 놈들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감염체 웨이브는 말 그대로 쓸려나갔고, 지상 곳곳에선 성난 화염이 들끓었다.

제 할 일을 끝낸 폭격기는 마지막 무전을 끝으로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행운을 빈다, 호프 원.]

나는 무운을 빌어주는 그들에게 짧게 화답하며 쥐고 있던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온 차량은 빠른 속도로 도로를 가로질러 전장을 이탈했다.

호프 원.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콜사인에는 그들의 간절한 염원이 서려 있었다.

* * *

연합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면서 상위 군락 또한 모아둔 전력을 투입했다.

이에 시모노세키는 위성 상으로도 변화가 관찰되는 치열한 격전지로 변해버렸다.

얼핏 들리는 바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방어선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고 하는데, 그만큼 인간과 감염체 모두 사력을 다해 전면전에서 우위를 점하려 하고 있었다.

부르르릉!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목적지까지 향하는 도로는 정말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연합군 본대가 모든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본토 후방이 아예 텅텅 빈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우리는 436㎞라는 거리를 밤낮 가리지 않고 꾸준히 달렸고, 0머지않아 첫 번째 목적지였던 히메지 시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다.

덜컹!

차량에 탑재된 군락 교란 장치 덕분에 웬만한 공격으로부터는 자유로운 상태였다.

도로 근처에 차량을 주차한 우리는 잠시 밖으로 나와 주변 도시를 정찰했다.

치익!

[이상 없습니다.]

감염체 사태 당시 히메지 시는 무리한 소멸 작전으로 인해 도시가 폐허가 됐다.

그 때문인지 군락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감염체 또한 관측되지 않았다.

주변이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우리는 잠시 자리를 잡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우린 먼저 가보겠습니다.”

“본대와 합류하십니까?”

“아뇨, 아마 교토로 갈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해준 미연방 델타 팀과 정보사 요원들은 떠날 준비를 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작전 지시를 받았기에 이를 수행하는 게 우선이었다.

작전 지역이 교토라는 걸로 보아 상위 군락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유인 작전일 터.

목숨을 걸고 떠나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기꺼이 손을 맞잡아주었다.

“행운을 빕니다.”

그렇게 델타 팀과 정보사 요원들이 떠나고 도로에는 우리 특임대만이 남았다.

오랜 시간 도로를 달려온 대원들은 초콜릿을 씹으며 최대한 체력을 보충했다.

남은 시간은 30분 정도?

나는 문 상사와 송지영, 그리고 박하나를 호출해 마지막으로 당부해두었다.

“오사카 팀은 먼저 군락을 찾고 대기할 거야. 한 이틀 정도는 여유를 줄 수 있어.”

“만약 시간이 지체되면 어떡합니까?”

“그 정도는 감안해야지. 최대한 버티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늘 나와 함께 다니다가 처음으로 단독 작전을 맡게 된 문 상사와 송지영이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표정으로 드러나는 긴장감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단전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애써 감추며 미리 준비한 견장을 꺼내 들었다.

“부탁한다.”

현재 믿고 맡길 수 있는 현장 지휘관은 경험이 많은 이 둘밖에 없다.

나는 믿고 맡긴다는 의미로 견장을 하나씩 나눠 사이좋게 매달아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문제 없을 겁니다.”

“선배!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요.”

그제야 자신감이 돌아온 문 상사와 송지영은 작게 경례를 붙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박하나.”

나는 그 뒤를 따라가려는 박하나를 붙잡고 잠시 차량 뒤편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는 듯 그 특유의 동그란 눈을 뜬 그녀에게 또 한 번 당부했다.

“위험하면 언제든지 도망쳐.”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는 아니야. 알겠어?”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고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한들 본인이 죽으면 아무 소용없다.

부디 그 점을 명심하기를 바라며 제발 목숨을 아낄 것을 재차 강조했다.

“명심할게요.”

한참 망설이던 박하나는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깨를 힘차게 두드려준 뒤 문 상사와 송지영 쪽으로 등을 밀어주었다.

“다녀와.”

잠시 뒤, 정비를 끝낸 나고야 팀이 도로를 빠져나와 다른 갈림길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끝까진 지켜본 나와 나머지 대원들은 곧 오사카를 향해 출발했다.

* * *

보통 일본 제2의 도시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오사카를 말할 것이다.

그만큼 이 도시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으며 동시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았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군락이 자리를 잡기에 딱 좋은 환경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끼이이익, 끼긱!

오사카 전체는 수백만 마리의 감염체 웨이브와 그들이 내뱉은 오물로 오염이 됐다.

그것은 ‘도시’라기 보단 하나의 거대한 둥지, 곧 감염체 군체를 보는 것 같았다.

만약 인류가 패배한다면 이 푸른 지구에는 이러한 광경밖에는 남지 않을 것이다.

“배터리 출력 올려.”

“알겠습니다.”

10㎞ 넘게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왼쪽 눈 흉터가 벌써 찌르르 울려왔다.

이제는 성능이 대폭 상향된 군락 교란 장치를 꺼내 최대한 존재감부터 숨겼다.

“어디부터 봐야 할까요?”

“엠마가 집어준 곳이 몇 개 있어.”

위성사진은 땅속 깊이까지는 아니어도 지상은 어느 정도 관측이 가능했다.

이에 엠마는 밤낮 가리지 않고 연구해 제일 유력한 장소를 몇 개 뽑아줬다.

이에 감각이 보내는 지침을 따라 나는 ‘이곳’을 첫 번째 목적지로 잡았다.

“전파 방해를 발생시키는 군락 대부분은 높은 빌딩에 자리를 잡았어. 아마 이번 군락도 같은 환경을 좋아하는 녀석일 거야.”

“그럼 역시…….”

“우메다 스카이빌딩. 여길 먼저 살핀다.”

오사카에 있는 유명한 마천루로, 한때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방문했던 장소였다.

물론 지금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황폐해진 지 오래였다.

엠마도, 나도 우메다 스카이빌딩에 군락이 자리 잡았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장비 챙겨.”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드디어 오사카까지 도달한 우리는 발걸음을 뗐다.

저 멀리 갈색으로 물든 오염된 대지에는 불안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각, 사각, 사각,

[후지산 군락은 현재 스스로 연산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섰다. 이에 감염체 경계망에는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침입할 루트는 더욱 많아졌다. 아마 큰 이목만 끌지 않는다면 놈들에게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검열 거부!> 현재 ‘그녀’는 군락의 눈을 속이기 위해 호수를 건너고 있다. 상속자의 능력이라면 놈의 위치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 가장 깊숙한 곳, 가장 어두운 곳에서 치명적인 칼날을 꽂아 넣자.]

.

.

.

“응?”

한참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버릇처럼 만년필을 만지다가 깜짝 놀랐다.

늘 황금빛으로 빛나던 할아버지의 만년필이 오늘은 웬일인지 조금 녹슬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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