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심연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있던 의식이 불현듯 깨어나 수면 위로 끌어올려졌다.
쿨럭!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 파묻혀 있던 박하나는 몸을 버둥거리며 눈을 떴다.
우웩!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입을 벌려 돌조각을 뱉어냈다.
조르륵!
간신히 찾은 수통 속 물로 얼굴을 씻자, 흐릿하던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조용히 숨을 몰아쉰 그녀는 떠오르는 기억을 복기하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어디 갔지?’
분명 지하상가 기둥이 무너지면서 쫓아오던 감염체 무리와 함께 매몰됐었다.
하지만 통로 중앙부터 무너진 덕분에 깔리지 않고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박하나는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총기를 주워 부착품인 플래시 라이트를 켰다.
‘지하에 다른 구멍이 있었어.’
기둥과 천장이 무너지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방향인 줄 알았던 지하 둥지가 사실은 반대편과도 이어지던 양방향이었다.
아마 놈이 우리 존재를 눈치챌 수 있었던 이유도 저 구멍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쿨럭!”
그 순간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서 힘겹게 기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박하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파편과 돌조각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
그 안에는 온몸을 피로 물들인 송지영이 미약한 숨을 내쉬며 쓰러져 있었다.
“언, 언니.”
마지막 순간 자신을 감싸 안느라 떨어지는 콘크리트 파편에 깔리고 만 그녀였다.
박하나는 터져나올 것 같은 울음을 꾹 참으며 송지영을 더미 밖으로 끌어냈다.
“으으…….”
“살, 살려줘.”
그러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대원들이 하나둘 구조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박하나는 허둥지둥 잔해를 파헤치며 그들을 모두 구출해냈다.
‘문 상사님은?’
하지만 이상하게도 문 상사를 포함한 일부 대원들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근처에 계셔야 하는데 뻥 뚫린 구멍 탓에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정신없이 콘크리트 잔해를 파헤치던 박하나는 그들을 찾기 위해 나서려 했다.
찌릿!
그런데 그 순간, 왼쪽 볼이 또 한 번 찌르르 울리며 앞선 위험을 경고해왔다.
“……!”
박하나는 본능적으로 플래시 라이트를 끄며 은폐물 사이에 납작 엎드렸다.
감각이 가리킨 그 방향에는 둥지 터널로 추정되는 ‘그’ 구덩이가 있었다.
끼익, 끽!
어두운 구덩이 사이로 길쭉한 팔 하나가 올라오더니 곧 변이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인간 여성처럼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놈이 문드러진 코를 벌름거렸다.
‘침착해.’
인간을 닮은 외형, 거미처럼 길고 각진 팔다리, 분명 보고서에서 본 기억이 있다.
놈의 특성을 머릿속으로 달달 외운 박하나는 조심스럽게 총구를 앞으로 겨누었다.
철컥!
원래라면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몰래 물러나는 것이 최우선 매뉴얼이다.
하지만 자신이 여기서 도망친다면 송지영은 물론 다른 대원들까지 위험해진다.
내가 지켜야 한다.
박하나는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더니 곧 방아쇠 위로 검지를 살포시 올려두었다.
따다다닥!
이내 총구가 불을 뿜었다. 연달아 발사한 총알이 정확히 놈의 왼쪽 눈을 뚫어버렸다.
끼이이이이익!
왼쪽 머리통이 통째로 날아간 놈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변이종답게 즉사하지 않고 버둥거렸다.
따다다다다닥!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박하나는 재빨리 자세를 바꿔 미친 듯이 총을 난사했다.
날아간 총알은 정확히 급소만을 노렸고, 놈을 빠르게 코너로 몰아가고 있었다.
끼기긱!
하지만 겨우 소총탄으로 죽일 수 있었다면 변이종이라는 존재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을 차린 놈은 날아오는 총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후웅!
0.5초 만에 공간을 꿰뚫은 변이종은 급소인 머리와 목을 노려 팔을 휘둘렀다.
서걱!
박하나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이를 피해내며 재빨리 콜트파이슨을 꺼내 겨눴다.
타앙!
타앙!
복부에 한 발, 가슴팍에 한 발, 살상력보다는 저지력을 우선으로 둔 공격이었다.
이에 놈은 또 한 번 중심을 잃으며 바닥에 쓰러졌고 경사진 구덩이로 미끄러졌다.
“큭!”
하지만 하필 버둥거리던 팔 하나가 도망치려던 그녀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털썩!
상대가 넘어진 것을 확인한 변이종은 아가리를 벌려 머리를 통째로 삼키려 했다.
캬캬캭! 캬아악!
박하나는 황급히 소총을 들었다. 동시에 흉측한 이빨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변이종이 흘리는 더러운 침이 머리를 적시며 얼굴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빠드득!
하지만 힘에서 밀렸다. 최대한 버텨보려고 해도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가까워졌다.
‘한계야.’
이를 악문 박하나는 마지막 반격을 위해 허벅지 위의 토마호크를 뽑으려고 했다.
“박하나다! 엄호해!”
그런데 그 순간, 변이종이 매달려있던 구덩이 아래에서 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공격당하고 있던 박하나를 발견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총을 발사했다.
투두두두두두-!!
가뜩이나 약해져 있던 변이종은 집중포화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탕!
마지막 확인 사살까지 착실하게 한 문 상사가 재빨리 구덩이를 넘어왔다.
“상사님!”
“잘했어. 정말 잘했어, 하나야.”
이제 막 기본 훈련을 졸업한 병아리 신입이 변이종을 상대로 무려 5분이나 버텼다.
정말 기적과도 같은 혈투 앞에 문 상사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해! 빨리 도와!”
“의무병! 여기! 여기부터!”
문 상사와 함께 낙오됐던 의무병들이 투입되면서 현장은 빠르게 수습됐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안심하기에는 아직 군락의 존재가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제 어쩌죠?”
“앞으로 1시간밖에 안 남았어. 멀쩡한 인원이라도 추려서 유도기를 설치해야 해.”
절반 이상이 리타이어된 상황인지라 함께 빠져나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지금은 다친 인원을 먼저 대피시키고 남은 인원으로 작전을 속행해야 한다.
“부탁한다.”
“맡겨주십시오.”
의무병을 포함한 몇몇 인원은 다친 대원들을 데리고 빠르게 현장을 벗어났다.
이제 남은 건 문 상사와 박하나 그리고 불과 5명 남짓한 소수 인원뿐이었다.
“가자.”
그나마 다행인 건, 우연히 떨어진 구덩이 통로가 지하철역과 연결되어있다는 것.
그곳을 통해 몰래 이동할 생각이었던 문 상사는 대원들을 이끌고 이동을 시작했다.
후욱, 후욱.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작전 실패는 물론 팀 전체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이미 탈진 직전까지 간 그들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구덩이 통로를 기어 내려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버려진 지하철역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느낌이 와?”
“네. 저쪽이에요.”
가끔 인간 탐지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초월적 감각을 지니고 있는 박범석이었다.
그의 후계자나 마찬가지인 박하나라면 분명 자신이 모르는 감이 있을 것이다.
문 상사는 그녀의 감각에 의존한 채 천천히 군락 둥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찾았다.’
그동안 처리한 군락만 10개가 넘고, 또 발견한 둥지만 해도 수십 개에 육박한다.
문 상사는 지하 철로를 보자마자 저곳이 수많은 둥지 입구 중 하나라는 걸 직감했다.
‘밖으로 나가자.’
위치를 확인했으니 이제 지상으로 올라가 레이저 유도기를 설치하면 끝이다.
이에 안심한 문 상사는 군락이 접근을 눈치 채기 전에 승강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찌릿!
그런데 그 순간, 감각이 번쩍이더니 박하나의 체감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
둥지 입구, 저 어두운 입구 둥지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기어 나오고 있었다.
“피해요!”
경악한 박하나는 문 상사와 대원들을 온몸으로 밀치며 바닥에 함께 쓰러졌다.
쾅!
그러자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놈’이 벽 한쪽을 통째로 무너트리며 울부짖었다.
끼아아아아악!
진화형 군락? 한 마리가 아니었다. 깊은 둥지 속에 처박혀있던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해!”
당시 기갑부대의 도움으로 겨우 처리했던 성체인 만큼, 겨우 이 정도 인원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문 상사는 가지고 있던 확산형 폭탄을 모조리 집어 던졌다.
퍼엉!
치료제 물질이 사방으로 퍼지자, 진화형 군락은 염산이라도 맞은 듯 고통스러워했다.
서걱!
하지만 곧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오더니 도망치는 대원 하나를 끔찍이 살해했다.
투두두두두두두-!!
총성이 울린다. 총알이 빗발친다. 대원들은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그 사이 유도기를 가진 문 상사와 박하나는 계단을 미친 듯이 올라 상층으로 향했다.
“빨리! 빨리 가십시오!”
뒤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고함과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놈을 막으려는 대원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함께 웃으면서 지내던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 나갔다.
“안돼요!!!”
그동안 꿋꿋하게 버텨왔던 박하나는 비명을 지르며 대원들에게 돌아가려고 했다.
“계속 달려!”
하지만 문 상사는 그런 그녀를 강제로 붙잡고 계속 앞으로 뛰어가게 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저들의 죽음은 모두 물거품이 된다.
먼저 간 이들을 위해서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절대,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
끼이이이이익!
대원들을 모조리 사살한 진화형 군락은 매서운 속도로 추격해오고 있었다.
마침 50m 전방에는 역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늦었다.’
역 밖으로 탈출한다고 해서 진화형 군락이 사냥감을 포기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적어도 놈을 저지하고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찰나의 시간을 벌어야 했다.
“받아!”
“예!?”
문 상사는 들고 있던 유도기를 박하나에게 건네주며 마지막 탄알집을 장전했다.
깜짝 놀란 그녀가 황급히 뒤돌아보려 했지만, 이미 연막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먼저 가!”
“하, 하지만……!” “뒤따라갈 테니까, 빨리!”
여기서 실패하면 여기 있는 사람은 물론 남아있는 대원들까지 전부 몰살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박하나는 주춤주춤 망설이다가 결국 앞으로 뛰어갔다.
그래, 잘했어.
멀어지는 뒷모습을 확인한 문 상사는 피어오르는 자욱한 연막으로 들어갔다.
시선을 돌리자 분노한 진화형 군락이 연막 속으로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투두두두두두-!!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낸 문 상사는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며 총을 난사했다.
후웅!
하지만 놈은 날아오는 총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쿵, 콰직!
좁은 공간에서 벌어진 최후의 격전. 아쉽게도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퍽!
이미 체력을 모두 소진한 문 상사는 공격을 피하지 못한 채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콰직!
그 충돌 한 번으로 소총이 산산조각나더니 곧 핏물이 입 밖으로 흘러내렸다.
시야가 붉게 변했다. 흘러내린 핏물이 옷과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여기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다.
문 상사는 망가진 소총을 대신해 피로 흥건하게 젖은 권총을 뽑아 들었다.
푹!
하지만 놈은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손톱을 그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몸이 관통당한 문 상사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입 밖으로 피를 토해냈다.
쿨럭!
쉽게 죽여주지 않겠다. 군락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그가 고통 받도록 내버려 두었다.
감히 둥지를 침범한 쥐새끼! 의식을 공유 중인 군락은 다 함께 포효를 퍼트렸다.
끼이이이이익!
바닥에 흘러내리는 피가 흥건할수록 점차 의식이 흐릿해지고 떨림이 잦아든다.
이에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한 군락은 아가리를 쩍 벌려 사냥감을 집어삼키려 했다.
드리우는 그림자.
죽음이 점점 가까워진다.
핑!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던 문 상사의 품에서 핀이 뽑혀 나가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입을 쩍 벌리고 있던 군락은 사냥감의 머리 대신 묵직한 무언가를 삼켜야 했다.
퍼어어어엉-!!!
핀을 뽑은 특제 소이탄이 폭발하며 커다란 화마가 그 둘을 동시에 덮쳤다.
순식간에 불꽃으로 휩싸인 군락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미쳐 날뛰었다.
세상이 불타오른다.
모든 것을 재로 돌리는 정화의 불길이 산소는 물론 놈까지 태우기 시작했다.
쾅!
하필 지하에는 유독 가스가 차 있었고, 재수 없게도 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결국 군락은 온몸이 불타오른 채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화르륵!
둥지가 불타오른다. 감염체는 당황했고, 나고야 시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놈들은 곧 다가올 종말을 직감했는지 하나 같이 하늘을 보며 울고 있었다.
툭.
힘겹게 버티고 있던 문 상사는 타오르는 불꽃을 뒤로한 채 등을 기대앉았다.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와중, 고개만은 돌려 박하나가 뛰어간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유도기가 정상적으로 설치되어 다가오는 폭격기를 안내하고 있었다.
성공했구나.
문 상사는 피로 물든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끝까지 쥐고 있던 권총을 놓았다.
그 순간 팔과 다리에 힘이 탁 풀리며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 하나가 맺혔다.
쏴아아아아-!!
비가 내린다. 비는 곧 먹색 어둠을 지우며 회색빛 도시를 백지로 만들었다.
그 빈자리는 찬란하게 반짝이는 주황빛 여명이 세상을 유채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 이것이었구나……. 모든 후회와 아픔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툭.
그는 웃으며 아침을 맞이했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린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