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지난 홋카이도 침공 당시 발생했던 대규모 지진은 역시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후지산 상위 군락이 미쳐 날뜀에 따라 일본 전역에서도 똑같은 징후가 발생했다.
쿠르르르릉!
크고 작은 지진이 여러 차례 일어난 것은 물론 수시로 여진이 반복되고 있었다.
또 통제를 잃은 감염체들이 밖으로 쏟아져나와 주둔 중인 연합군을 공격해왔다.
갑작스럽고 또 동시다발적인 공격 앞에 지휘관들은 잠시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곧 포위망 배치를 촘촘하게 좁혀서 몰려오는 감염체를 최대한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놈들과는 달리 우리에게는 시간이 몹시 부족했다.
“그럼 공격하지 말라 이 말인가?”
김태하 소장이 언성을 높이자, 미연방에서 온 전문가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공, 공격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현재 탑재된 B61이 둥지로 떨어지면 어떤 반발 작용을 보일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원래 감염체 군락이라는 것 자체부터가 현실적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지금은 모든 경우를 따져 봐야 한다.
한참 말을 이어가던 전문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영상 하나를 출력했다.
“후지산이 언제 어떤 형태로 분출할지는 예측이 어렵습니다. 다만, 마지막 분출이 300년 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내부에 강력한 힘이 응축되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분출 기록으로는 1707년도 호에이 대분화가 마지막이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명백히 활화산으로 분류된 만큼 언젠가는 폭발한다는 게 학계 정설이었다.
그 300년 주기를 촉진한 것이 바로 후지산에 자리 잡은 상위 군락으로 추정됐다.
“터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만약 후지산이 폭발한다면…….”
이미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는지 화면 속 영상은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후지산에서부터 시작된 화산재는 그 일대와 일본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0에서 8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번 폭발을 8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일본은 물론 가까운 한반도까지 영향을 받겠죠.”
편서풍이 부는 계절이라면 모를까, 현재는 습한 동풍이 불어오는 여름이다.
만약 화산재가 한반도로 상륙한다면 그 후폭풍이 어떨지 감히 예측하기 힘들었다.
“…….”
다들 할 말을 잃었는지 침통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놈이 미래를 인질로 잡았다.
곧 끝나리라 예상했던 감염체 전쟁은 더욱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김태하 소장이 드디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미국 본토 상황은 어떻습니까.”
“좋다고는 못하는 상황이오. 아마 여름이 끝날 때쯤이면 슬슬 한계를 보이겠지.”
현재 미국은 본토와 일본 양면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동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미연방이라도 전력이 약해진 시점에서 100% 힘을 낼 수는 없다.
모든 지휘관이 예상하였듯 앞으로 주어진 시간은 절대 우리 편이 아니다.
“……빌어먹을.”
전술핵을 쓸 수 없다면 결국 연합군 본대를 동원해 둥지를 소멸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발생할 수많은 희생과 피해를 떠올린 지휘관들은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건만, 점점 늘어나는 주검이 그들을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뭘 망설입니까?”
그런데 그 순간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범석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
그가 강릉으로 떠난 줄 알았던 김태하 소장과 구 단장은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시켰다.
“핵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죠.”
“다른 방법 말이오?”
“예. 우리가 잘하는 거 있잖습니까.”
미연방 지원이 있기 전까지 그들이 군락을 상대하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바로 놈들이 만든 둥지로 들어가 본체에 직접 감염체 치료제를 주사하는 것.
이보다 간단하면서 또 군락을 죽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이 세상에 없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범석아, 제발…….”
하지만 이번 경우는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는 후지산 군락이 그 상대다.
과연 소수 인원이 둥지로 들어가 살아나올 수 있을지가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지휘관들은 부정적인 이견을 보였고 부관들 또한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잘그락.
그러자 박범석은 주머니 속 묵직한 군번줄을 꺼내 조용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여태 현장에서 전사한 또, 현재 살아있는 모든 대원의 군번줄이 하나로 엮여있다.
“제가 시작한 일입니다.”
차마 지우지 못한 피와 그을림이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왔는지를 증명했다.
특임대가 걸어온 길이 곧 역사였고, 이 길고 긴 전쟁을 종식할 마지막 지침이었다.
이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박범석은 지휘관들과 눈을 마주치며 담담히 말했다.
“직접 끝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누가 막으리오. 행동으로 논리를 대변하고 결과로 과정을 입증해온 그들을.
망설이던 지휘관들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곧 연합군의 방침은 정해지게 됐다.
진격.
그동안 콘크리트 장벽 뒤에 숨어 살던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 * *
번쩍! 조명 스위치를 켜자 칠흑같이 어둡던 격납고 내부가 한순간 밝아졌다.
“이쪽이에요.”
나는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엠마를 따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격납고 내부에는 방금 막 도착한 물자들이 포장조차 뜯지 않은 채 놓여있었다.
덜컹!
엠마가 힘껏 고정 틀을 풀자,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신무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현장에는 없는 시제품이에요.”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제가 힘 좀 써봤어요. 어때요, 고맙죠?”
감염체와의 전쟁이 길어지며 무기 개발도 점점 그쪽으로 가는 추세라고 들었다.
특히 치료제 물질이 효율적이라는 게 밝혀지며 온갖 신무기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온갖 무기를 둘러보다 곧 우리가 쓸 개인 화기를 발견했다.
“이건 뭡니까?”
“확산형 폭탄을 유탄으로 만들어봤어요. 기존에 쓰시던 발사기 규격과 맞췄으니까, 연발로 사용하면 그 위력이 상당할 거예요.”
항상 손으로 직접 던져야 했던 확산 폭탄은 그 지속력 면에서 무척 아쉬웠다.
하지만 유탄 발사기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이러한 단점을 모두 커버하고도 남았다.
“한번 쏴보실래요?”
나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다연장 유탄 발사기를 꺼내 격납고 벽을 조준했다.
퐁! 퐁! 퐁!
조금 맥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하얀 거품과 분말이 격납고 벽을 하얗게 물들였다.
하지만 그 범위와 지속 시간만큼은 기존 제품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일단 군락 교란 장치를 소형화했고, 기존에 쓰시던 탐지기도 시각화할 수 있도록 개량했죠.”
우리가 단점이라고 느꼈던 모든 부분이 개발자들 손을 거쳐 하나둘 보완되었다.
특히 교란 장치와 탐지기는 대원들의 생존율과 연관된 만큼 더욱 공을 들인 게 보였다.
나는 이에 감탄하면서도 가슴 깊이 차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고마워요, 정말로.”
“어울리지 않게 왜 그래요?”
시제품을 먼저 들여오는 것에 있어 아마도 엠마의 입김이 강하게 닿았을 것이다.
한반도와 미국을 정신없이 오고 갔을 그녀를 생각하면 고맙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요즘 이상하게 감정적이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범석 씨.”
“예?”
그런데 그 순간 가만히 웃고 있던 엠마가 갑자기 다가와 옷깃을 꾹 잡았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늘 웃는 상이었던 얼굴이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돌아오실 거죠?”
평소 프라이드가 강해 남에게 감정과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엠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참고 있던 감정을 모두 드러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돌아오겠다는 그 쉬운 대답조차 지금 내게는 지킬 수 없는 약속 중 하나였으니까.
“미안해요.”
“그런 말 말고요!”
“정말 미안해요.”
결국 엠마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리며 붙잡고 있던 옷깃을 꾹 잡아당겼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슬픔이 길다.
그 슬픔이 어찌나 긴지 아무리 울고 울어도 마음속 응어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격납고에는 엠마의 작은 울음소리만이 한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 * *
[일상이 사라진 지도 벌써 12년이 지났다. 인류는 여전히 폐허 위를 배회하며 살고 있으며 차가운 콘크리트 장벽 아래 비참한 삶을 연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나를 더욱 절망케 하는 건 상황이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어두운 앞날이었다.]
[제군들 눈에서 두려움을 보았다. 이는 오늘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너의 용기보다 하찮다면 총을 내려놓아라. 하지만 그것이 삶보다 고귀하다면 기꺼이 총을 들어라!]
[숨을 쉬는 인간만이 살아있는가? 아니! 우리에겐 그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 싸우자! 빼앗겼던 이 땅을 되찾고 우리 후손에게 그토록 바라던 평화를 선물하자! 죽어간 이들을 위해! 앞으로 살아갈 이들을 위해서!]
김태하 소장의 마지막 연설을 끝으로 묵념하고 있던 병사들은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투모를 뒤집어쓴 채 하나둘 전선으로 달려갔다.
부르르릉-!!
기갑 부대가 우렁찬 엔진음을 내뿜었다. 수많은 헬기와 항공기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깜짝 놀란 감염체는 그런 그들을 막기 위해 우르르 몰려왔지만, 금세 뚫리고 말았다.
갑자기 반격이라니?
이러한 변화는 한 곳만이 아닌 전선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저 멀리 보이는 후지산, 상위 군락의 마지막 둥지였다.
[최대한 멀리 우회해서 접근하겠습니다! 현재 난기류가 심하니 움직이지 마십시오!]
하필 날이 좋지 않아 수송 헬기를 운용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베테랑 조종사는 능숙하게 조종간을 붙잡고 거친 폭우를 뚫기 시작했다.
전장을 떠난 헬기가 바다로 접어들었다.
나는 안전띠로 몸을 단단히 고정한 채, 함께 앉아있던 대원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
경태와 가은이, 박하나를 포함해 살아있는 모든 대원이 이번 작전에 자원했다.
군번줄까지 모두 내려놓고 온 그들은 자리에 앉은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끝까지 함께 오지 못한 다른 대원들의 빈자리가 있었다.
‘우리가 완수하는 거야.’
어쩌면 마지막 작전이 될지도 모르는 오늘, 특임대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치익.
그 순간 목이 다 쉬어버린 김태하 소장으로부터 다급한 무전이 왔다.
-이번 전투는 유인이 아닌 총력전이야. 궤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선을 붙잡고 있을 테니까, 최대한 들키지 말고 침입해.
“알겠습니다.”
그간 즐겨 사용했던 양동작전이 아닌, 모든 연합군 병력이 동원된 총력전이다.
만약 우리가 실패하면 본대가, 본대가 실패하면 우리가 척살 당하게 될 것이다.
나는 긴장감에서 오는 숨을 훅 내쉬며 김태하 소장과 마지막으로 대화했다.
“끝나고 봅시다, 소장님.”
-……살아서 만나자.
무전을 끊자 저 멀리 폭우 속에 가려진 후지산 둥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헬기는 한 마리 새처럼 창공을 가로질러 그 둥지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이젠 내가 유산을 남길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