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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72화 (172/180)

<172화>

어린 시절 박하나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특이한 아이였다.

수업 시간이 한참일 때는 늘 멍 때리기 일쑤였고, 또래보다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 배구 동아리 활동이 아니었으면 출석하는 날보다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았을 것이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재일교포 출신에 어울리지 못하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넌 특별하단다.’

그런 특이한 아이를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건 오직 하나뿐인 친할머니였다.

어떨 때는 부모, 어떨 때는 친구나 멘토가 되어 인생을 꽃피워준 자상한 사람.

박하나는 그런 친할머니를 너무나 잘 따랐고 또 항상 의지하고 있었다.

‘할머니!’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고 감염체 사태가 발생했다.

밖에 괴물이 돌아다닌다는 사실보다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박하나는 방황했고, 오직 집안 이불 속에만 틀어박혀 시간을 허비해나갔다.

어차피 자신을 몰라주는 이 세상에서 특별한 아이는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었다.

내일이면. 그래, 내일이면 준비한 밧줄을 천장에 걸고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

사각!

하지만 그런 그녀를 붙잡은 건 사람이 아니라, 모나미 볼펜 한 자루와 공책이었다.

미래 일기는 자살하려는 그녀 앞에서 사소한 대화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절망하고 있던 박하나는 녀석들이 보여주는 모습 앞에 매료되었고 또 몰두했다.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자신은 집 밖을 나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힘들어 죽을 뻔했던 순간이 수십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역경을 딛고 일어나 첫 번째 상속자와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다.

‘할 수 있어.’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과 또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았다.

자신을 도와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친한 동료라는 것도 생기게 되었다.

누군가에는 찰나, 혹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고작 석 달이라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석 달은 박하나 인생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평생을 죽어 살던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박하나.”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박하나는 눈을 떴다.

어느새 눈앞에는 박범석이 개인 화기와 장비를 대신 점검해주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눈앞이 흔들리거나 하지 않아?”

“멀쩡해요.”

만신창이가 된 다른 대원과는 달리 비교적 가벼운 경상으로 끝났던 박하나였다.

물론 정신적인 면에선 아직 우려가 컸지만, 반쯤 강행하다시피 작전에 자원했다.

처음에는 말릴 줄 알았던 박범석도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토닥여줬다.

“좋은 녀석이었어.”

오직 앞서 달려간 전우를 위해, 또 작전 완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박하나는 문 상사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쥐고 있던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더 이상 울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건 먼저 죽어간 이들을 위해 작전을 완수하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범석은 조용히 팔을 토닥여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르르릉!

저 멀리 세상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전운 아래에서는 연합군과 상위 군락이 모든 전력을 쏟아 부으며 전투를 벌였다.

화력과 숫자의 힘겨루기,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전투가 지상을 물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운이 감도는 하늘 위로 수많은 폭격기가 지나갔다.

우우우우우웅-!!

폭격기는 우르르 몰려오는 감염체 웨이브 위로 무언가를 투하하기 시작했다.

화약 대신 다른 물질로 내용물을 채운 그 폭탄은 곧 놈들 머리 위로 쏟아졌다.

끼이이이이익!

치료제 물질로 만든 화학 무기가 그 일대를 하얀 분말과 연기로 물들였다.

감염체는 비명을 지르며 녹아버렸고, 변이종 또한 고통을 호소하며 도망쳤다.

그 대규모 반격은 각 지역으로 떠난 타격팀에게 보내는 한 가지 신호였다.

치익.

[여기는 호프 쓰리, 배치 완료했습니다.]

[호프 투 마찬가지입니다.]

미연방 델타 팀과 이제는 감염체 특수팀으로 변모한 정보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를 확인한 특임 대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은폐를 풀고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이동.”

그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본 박범석은 오른손을 살며시 들어 지시를 내렸다.

비장한 얼굴을 한 대원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어둠과 동화되었다.

* * *

“변이종! 변이종이다!”

“젠장, 이쪽으로 못 오게 막아!”

주변을 관측하던 한 병사가 우르르 몰려오는 변이종을 발견하고 소리를 쳤다.

그 목소리에 반응한 기관총 사수는 서둘러 총구를 돌려 놈들을 요격했다.

투두두두두두두-!!

그동안 여러 차례 실전 경험을 겪으며 온갖 베테랑들이 포진한 강릉 방위군이었다.

그들은 거의 기계처럼 감염체를 상대하며 연합군의 든든한 축이 되고 있었다.

“뒤져, 이 개새끼야!”

“물러나지마! 버티란 말이야!”

이에 한반도 연합군도, 미연방군도 힘을 합쳐 감염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음을 도외시한 치열한 육탄전 앞에 감염체는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후우.

사방에서 전해지는 보고에 김태하 소장은 진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전진했지?”

“반절 정도 남았습니다.”

“역시 만만치가 않아.”

현재 한미 연합군은 본인들이 지닌 모든 전력을 이번 공격에 동원하고 있었다.

덕분에 전장에선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상위 군락의 힘이 너무 강했다.

끼이이이이익!

지상을 지우개처럼 지우면 그 위를 또 다른 감염체 웨이브가 나와 그 빈자리를 메웠다.

변이종은 또 어찌나 까다로운지 지금 이 순간에도 피해를 유발하고 있었다.

휴식이 필요한 우리 인간과는 달리 끝없이 싸울 수 있는 감염체들이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리한 것은 다름 아닌 한계가 존재하는 연합군이었다.

“타격팀은?”

“지금 막 출발했습니다.”

본대가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타격팀이 후지산 군락으로 접근 중이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물러난다면 상위 군락이 그들을 발견할 확률이 높았다.

피해가 크더라도 전진해야 한다. 궤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한다.

벌써 이틀째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한 김태하 소장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나머지 예비 부대도 투입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기서 승부를 봐야 해.”

잠시 망설이던 부관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지휘부 막사 밖으로 나갔다.

곧 마이클 소장과 구 단장으로부터 연락이 오며 추가 부대가 전선으로 투입됐다.

김태하 소장은 이를 두 눈으로 바라보며 저 멀리 후지산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사람들은 오늘을 뭐라고 기억할까.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되어버릴, 어쩌면 기억 너머로 사라질 수 있는 이 순간을.

다음 봄이 찾아오거든 물어보려 한다.

너는 기억하고 있느냐고.

* * *

상위 군락의 통제가 풀린 감염체가 인간을 발견하자마자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따다다닥!

하지만 표적이 된 대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총구를 들어 달려오는 놈들을 제거했다.

수십 마리가 넘는 감염체를 제거하는 데에 이제는 1분 이상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후지산 바로 앞까지 접근하는 동안, 이런 산발적인 습격만 10번을 넘게 받았다.

그만큼 감염체 밀도가 높다는 뜻이며 또 상위 군락이 이성을 잃었다는 증거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사냥개가 마치 하이에나 같은 야수로 변모한 느낌이랄까.

기존 일반 감염체 놈들의 공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 범위를 뛰어넘고 있었다.

“장비 준비해.”

대원들은 이제 1인당 하나씩 소유할 수 있게 된 군락 교란 장치를 가동했다.

마찬가지로 준비를 끝낸 기술 대원은 탐지기를 꺼내 본격적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후욱, 후욱.

해발 고도만 3,776m에 육박하고, 그 규모는 다 암기하기도 힘들 만큼 넓다.

이곳에서 둥지 입구를 발견하는 건 사실상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를 가능케 하는 건 바로 우리 상속자들이 가진 특이한 능력이다.

찌릿!

큰 존재감을 자랑하는 상위 군락답게 감각을 조이는 강도 자체가 달랐다.

나는 찌르르 울려오는 왼쪽 눈 흉터를 더듬으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존재감을 먼저 캐치한 박하나가 파르르 떨리는 볼을 만지고 있었다.

“이쪽?”

“더 깊어요.”

탐지 범위는 내가 더 우세하고 세세한 위치까지 잡는 세밀함은 박하나가 더 뛰어나다.

여기에 탐지기까지 공신력을 더하니 사실상 네비게이션을 따라 걷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감각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후지산으로 진입했다.

쿠르르르릉!

전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지 거의 10분마다 대규모 공습이 이뤄지고 있었다.

동시에 수시로 몰려오는 여진은 완전히 세기말 그 자체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방독면을 쓸 것을 지시하며 폭우로 인해 엉망이 된 산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후욱, 후욱.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온몸이 땀으로 물들고 숨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반대로 왼쪽 눈 흉터는 그 고통이 심해지며 목적지가 머지않았음을 알려주었다.

끼이기긱, 끽.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감염체와 변이종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뒤따라오는 대원들을 재빨리 멈추게 한 뒤, 자세를 낮추고 고개를 들었다.

끼이익!

수천 마리가 넘는 감염체 웨이브가 깊은 숲속에서 나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목적지가 전선이라는 것을 직감한 나는 놈들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찾았다.’

잠시 뒤, 그 어떤 군락 둥지보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구덩이를 찾아냈다.

저곳이 바로 후지산 상위 군락의 둥지와 이어지는 수십 개 입구 중에 하나겠지.

나는 긴장감에서 오는 숨을 크게 들이켠 뒤 대원들을 향해 준비 지시를 내렸다.

철컥!

철컥!

버릇처럼 탄알집과 약실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조정간 위로 손가락을 올려두었다.

내가 은폐에서 벗어나 입구로 진입하자, 대원들이 재빨리 대열을 이뤄 뒤따라왔다.

사람이 정말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거대한 둥지 입구가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더 빨리.’

평소라면 신중과 또 신중을 기해서 통로를 찾는 작업부터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남아있지 않았기에 오직 일직선상으로만 가야 한다.

후욱, 후욱.

어둠이 계속된다. 공기는 점점 탁해지고 머리가 요구하는 산소는 더욱 많아진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어깨 위 무게와 누군가의 바람이 등을 계속 떠밀었다.

정신 차려라.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나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모든 힘을 주고 대원들을 중심지로 이끌고 갔다.

찌르르르르!

공간이 점차 좁아진다. 어둠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체감이 힘들다.

다만, 흉터가 아파지면 아파질수록 목적지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체감하게 된다.

끼이익!

끼기기기긱!

개미굴처럼 이어진 좁은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하게도 그 공간에는 수많은 감염체가 우르르 몰려 밖으로 투입되고 있었다.

감염체가 몰리는 허브다.

이는 곧 멀지 않은 곳에 상위 군락의 산란장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야간 투시경을 낀 채 놈들이 어디서 유입되고 있는지 파악하려고 했다.

‘젠장.’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음 방으로 넘어갈 수 있는 우회 통로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군락 본체가 타격받았다는 걸 학습한 놈이 둥지 구조를 개조한 것이다.

아마 본체까지 이어지는 모든 통로는 감염체와 변이종이 득실거리고 있을 터.

‘생각하자.’

나는 잠시 두 눈을 감은 채 잡념으로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미래 일기는 없다. 이제 남은 건 개척하고 돌파해야 할 앞으로의 운명뿐이다.

빠르게 결심을 굳힌 나는 뒤에서 대기 중인 대원들에게 변경된 작전을 하달했다.

‘놈들을 반대로 유인한다.’

상위 군락은 본체를 노리고 들어오는 침입자에게 광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 점을 노려 한 팀이 시선을 분산하다 후퇴하고 한 팀은 군락 본체로 진입한다.

‘해보죠.’

조금만 삐끗하면 전멸할 수도 있는 위험한 작전 앞에 대원들은 동의를 표했다.

나는 그들과 손을 맞잡는 것을 끝으로 군락의 존재감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복수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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