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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74화 (174/180)

<174화>

언제부턴가 찾아와 자리를 잡았다.

이 흉측한 왼쪽 눈 흉터도, 또 군락의 존재를 알려주는 예민한 감각도 말이다.

원래부터 타고난 것이었을까, 아니면 미래 일기가 가져다준 특별한 능력일까.

가끔은 이게 지울 수 없는 낙인과 무게가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군락을 쫓는 이 감각이 나를 놈들의 천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끼이이익!

알비노 변이종 한 마리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흉측한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나는 숨을 쉬듯, 다가오는 위험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응하고 있었다.

투두두두두-!!

발을 뒤로 빼 공격을 피하고 놈의 안면과 급소만을 노려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불을 뿜자 알비노 변이종은 안면과 입안이 피떡이 된 채 주저앉았다.

콰직!

나는 그런 놈을 짓밟아 완전히 숨통을 끊은 뒤, 참고 있던 숨을 후욱 내뱉었다.

차마 방독면도 여과하지 못한 뜨겁고 맹렬한 숨이 정화통을 통해 빠져나갔다.

두쿵 두쿵.

심장이 폭발할 것 같다. 온몸의 근육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분노였을까. 오늘따라 반응속도, 컨디션, 또 감각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나는 방독면에 튄 핏물을 닦으며 다시 통로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치이익, 칙! 치지직!]

그런데 그 순간 신호가 미약하던 무전기에서 거친 잡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는 경태와 다른 대원을 애타게 부르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경태! 가은아! 대답해!”

하지만 들려오는 거라고는 총성과 비명, 미약한 신호가 보내는 잡음뿐이었다.

무전이 닿지 않은 걸까?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나는 달려가는 뜀박질에 속도를 더했다.

‘예상이 맞았어.’

타격팀은 사냥에 실패했고, 상위 군락의 본체는 현재 다른 곳으로 도주 중이다.

아마 경태와 대원들은 군체가 있는 고치 속에 고립되어있을 확률이 높았다.

간다고 해서 구할 수 있을까?

아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타격팀을 구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상위 군락을 처리해 감염체 통제를 무너뜨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나는 통신 신호가 제발 닿아주기를 빌며 싸우고 있을 경태에게 간절히 외쳤다.

이젠 앞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통로를 미친 듯이 달려가며 피를 털어냈다.

끼이이익!

“꺼져!”

중간중간 감염체가 앞길을 막았다. 하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고 토마호크를 휘둘렀다.

콰직!

한 방.

총을 뽑을 것도 없이 목을 잡아 넘어트리고 또 머리를 찍어 숨통을 완전히 끊었다.

콰직!

또 한 방!

나는 경쾌하게 터지는 뇌수와 놈들의 비명을 배경 삼아 공간을 가로질렀다.

마치 누군가 내 어깨와 팔 위에 실을 매달아 정해진 왈츠를 추게 하는 기분이었다.

지나간 자리에는 머리가 터지고 뜯긴 감염체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피를 흘렸다.

찌릿!

하지만 안타깝게도 도망치는 상위 군락의 존재감은 아주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이 둥지를 만든 놈들답게 어디로 가야 제일 빠른지를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제발, 닿아라.

이를 악문 나는 그동안 숨겨놓고 있어야 했던 모든 감각과 존재감을 터트렸다.

찌지지직!

고통이 정도를 넘어 격통이 된다. 왼쪽 눈이 뽑혀 나갈 것 같은 압박이 몰려왔다.

그 다음, 늘 어둠으로 휩싸여있던 반쪽짜리 시야가 회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세상을 볼 수 없었던 왼쪽 눈이 이제는 다른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찌릿!

찾았다. 회색 세상 사이로 검은색 실 한 가닥이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젠 익숙해져 버린 격통조차 밀어내며 그 가닥을 따라 달려갔다.

삐이이이익!

그 순간 상위 군락이 내 존재감을 읽었는지 비명을 질렀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으며, 지금도 실시간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가.

그동안 이어져 오던 종의 역전,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변한 인간이 말이다.

그간 다른 군락이 느꼈던 공포를 꼭대기에 있던 놈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후욱, 후욱.

그동안 묻혀왔던 감염체의 피가 뜨거운 숨결과 진땀 아래 묻어 내렸다.

달리면 달릴수록 놈을 향한 증오, 분노, 집착, 처절함이 하나로 뭉쳐졌다.

나는 끝낼 준비가 되었다.

잠시 뒤, 저 먼 통로로 달빛이 드리우며 미약한 빛이 실체를 드러내게 했다.

그곳에는 변이종 수십 마리가 무언가를 둘러싼 채 밖으로 급히 도망치고 있었다.

‘찾았다.’

죽는다는 공포가 이미 분노를 집어삼킨 지 오래다. 아마 놈은 어딘가 깊은 곳으로 도망쳐 또 한 번 그 씨앗을 뿌릴 것이다.

투두두두두두-!!

숨어드는 게 특기인 만큼 여기서 상위 군락을 놓치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총구를 들어 도망치는 놈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끼이이이익!

이에 깜짝 놀란 변이종이 광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며 온몸으로 총알을 막았다.

원래라면 반격을 해왔을 놈들이 군락 본체를 보호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속도는 놈들이 더 우위. 하지만 모든 상황은 어디까지나 계산 아래 있다.

나는 존재감을 더욱 퍼트리며 상위 군락의 마지막 남은 이성마저 찢어버렸다.

삐이이이익!

수많은 동족을 죽이고 새끼를 죽인 증오의 대상이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공포를 넘어 이제 히스테릭까지 느낀 상위 군락은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다.

변이종들은 군락 본체를 끌어안고 결국 후지산 둥지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여기는 호프원! 유도하는 곳으로 화력 지원을 요청한다! 현재 놈이 도주 중이다!”

CAS 절차고 나발이고 지금은 그런 것 하나하나까지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공중을 날고 있을 아군을 믿고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조명탄을 발사했다.

삐이이이이- 퍼엉!

그동안은 어둠이 이 땅을 지배했었다. 하지만 하늘로 떠오른 조명탄이 오늘을 밝혔다.

내가 그 빛을 조용히 올려다보자 무전기를 통해 아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다, 호프 원.]

주변을 날고 있던 AC-130이 이번에도 지원 요청에 응답하며 크게 선회했다.

쾅!

하늘에서 떨어진 하나의 빛줄기를 시작으로 이 일대가 쑥대밭이 되기 시작했다.

쾅! 콰앙!

콰르르르릉-!!

폭발, 폭발, 또 폭발. 빛은 폭발을 만들었고 폭발은 타오르는 불꽃을 만들어냈다.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태어난 상위 군락은 타오르는 불꽃 앞에 비명을 질렀다.

‘갈 수 없다.’

이 지역을 빠져나가려면 죽음의 천사가 선사하는 거친 화망을 뚫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나는 상위 군락을 토끼몰이하기 시작했다.

삐이이익!

뒤는 나, 앞은 본대, 본체가 떨어져나옴에 따라 감염체 통제력도 약해지고 있었다.

상위 군락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결국 자신의 둥지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철컥!

이제 내 차례다. 놈들이 주저하는 사이 100m 안쪽으로 거리를 좁혔다.

재빨리 치료제 유탄을 장전하고 도망치기 시작하는 변이종 무리를 조준했다.

포옹!

포옹!

포물선으로 날아간 치료제 유탄이 한 발, 한 발 놈들에게 명중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총알이었으면 몸으로 막겠으나, 유탄 안에 들어있는 건 극독인 치료제.

변이종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군락이 다치기라도 할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끼아아아악!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일본 변이종 두 마리가 결국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놈들은 쫓아오는 추격자를 막기 위해 목숨을 불사하고 내게로 달려들었다.

퐁! 퐁!

퐁! 퐁!

유탄이 작렬한다. 치료제 물질을 맞은 놈들은 피부가 녹아내리고 근육이 뒤틀렸다.

하지만 군락을 호위하는 놈들답게 크기도 크고 그 맷집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100m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들었고, 나는 재빨리 들고 있던 유탄을 내려놨다.

탁!

시간이 느려진다. 좁아 드는 공간과 함께 놈들이 그 사이를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서걱.

하나는 피하고, 하나는 흘렸다. 탄띠에서 재빨리 확산탄 하나를 꺼내 뽑았다.

퍼어엉!

품에서 터트리자 하얀색 분말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그 틈을 이용한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미쳐 날뛰는 변이종 위로 뛰어들었다.

콰직!

놈의 무릎을 밟고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아가리로 총구를 구겨 넣어 발사했다.

끼에에에에엑!

흉측한 이빨과 식도와 이어지던 내장이 곤죽이 되다 못해 피가 솟구쳤다.

순식간에 모가지를 따버린 나는 쓰고 있던 방독면을 벗고 떨어져 내려왔다.

푸욱!

그 순간 두 눈이 붉게 변한 또 다른 변이종이 내 왼쪽 복부를 찔렀다.

탁!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관통한 손을 붙잡아 토마호크를 뽑아 들었다.

서걱!

관통한 팔을 그대로 내리쳐 끊어버렸다. 또 한 번 피가 솟구쳤고 놈이 비명 질렀다.

타앙! 타앙!

마치 기계처럼 몸을 돌려 부무장인 대구경 권총의 탄환을 놈의 머리통에 모조리 꽂아 넣었다.

하얀 연기 속에서 퍼지는 비명은 하모니가, 움직임은 모두 왈츠로 변해버렸다.

그 사이에서 빛을 내는 건 오직 붉게 물들어있는 내 눈동자뿐이었다.

콰직!

비틀거리는 놈에게 달려가 밀쳐 넘어트리고 들고 있던 토마호크를 내리찍었다.

마지막 변이종까지 깔끔하게 처리한 나는 도망치는 군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쿠르르르릉!

더 이상 쫓을 필요도 없다. 감염체 통제가 약해진 시점에서 본대는 이미 전장을 돌파하고 이쪽으로 빠르게 접근 중이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헬리콥터를 보며 변이종들은 도망칠 곳을 잃고 말았다.

동시에 상위 군락도 함정에 빠졌다는 걸 직감하고 나를 향해 비명을 질렀다.

삐이이이이익!

너는 도대체 뭐기에 우리 동족을 살해하고 이젠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려고 하는가.

분노는 공포, 공포는 절망으로 변해 기어코 놈을 증오하는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까드득, 까드득!

군락을 지키던 변이종이 갑자기 옆에 있는 변이종을 물어뜯고 삼키기 시작했다.

놈들은 마치 하나로 증식하기 위한 곰팡이처럼 서로가 얽히고 또 잡아먹었다.

끽!

마지막으로 군락 본체까지 삼킨 놈들은 하나의 살덩이가 되어 변형되어갔다.

형체를 갖춘 그것은 내가 그동안 상대했던 개체인 진화형 군락이 분명했다.

크아아아아아-!!!

온몸이 붉다. 놈은 시뻘건 몸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커다란 고함을 내질렀다.

피어라는 게 이런 걸까. 피부가 찌르르 울리고 고막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아마 일반인이 이를 봤다면 지옥이 도래했다며 정신을 놔버렸을 것이다.

까닥까닥.

하지만 나는 그런 놈에게 도리어 중지를 들어 올려주며 여유롭게 도발했다.

크아아아아!

이미 이성이 사라진 상위 군락은 바닥을 쿵쿵 가로지르며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속도와 힘. 그동안 봐왔던 어떤 개체보다 놈을 압도하는 감염체는 없을 것이다.

쿵!

마치 전차를 연상케 하는 그 모습에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해냈다.

쿵쿵쿵! 놈은 연이어 네 발로 기어 오며 도망치는 내게 연신 공격을 가해왔다.

타앙!

타앙!

피하고 또 바닥을 굴렀다. 물론 중간중간 권총을 쏴 끝까지 신경을 건드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라. 나는 놈을 나무가 없는 크레이터로 유인했다.

[상위 군락 발견! 즉각 대응하겠다!]

그 순간 내 무전을 듣고 쫓아온 헬기들이 군락을 향해 조명을 비추었다.

끼익?

고스란히 노출되어 버린 상위 군락은 순간 멍청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사태를 파악하고 도망치기에는 이미 주변이 포위돼버린 지 오래였다.

투두두두두두-!!

미니건이 돌아가며 수백 발, 수천 발이 넘는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아무리 최종 진화한 상위 군락이라 해도 생물학적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놈의 질긴 피부도, 순식간에 회복하는 재생력도 여기선 모두 의미가 없었다.

쿠르르르릉!

공중 지원이 더 추가되었다. 저 멀리 기갑 차량도 속속히 도착하고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무전기는 이 질긴 전쟁의 마지막 피날레를 터트리고 있었다.

콰앙!

후두둑!

AC-130에서 발사된 105㎜ 포탄 하나가 상위 군락의 등판을 강타했다.

쿵!

머리를 가리며 고통스러워하던 놈은 그게 치명타가 됐는지 무릎을 꿇었다.

끼긱, 끽! 인간을 모두 죽이겠다는 기세는 어디 가고 미약한 울음소리만 울린다.

죽기 싫어!

이대로 죽기 싫다고!

드디어 최후를 직감한 상위 군락은 자신의 둥지가 있는 후지산을 향해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려고 했다.

스릉!

둥지 입구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모습을 드러내며 앞길을 틀어막았다.

놈이 달려오고 나도 달려갔다. 그렇게 서로 충돌하기 직전 그대로 힘을 풀었다.

치이이이익!

양쪽 무릎을 꿇고 미끄러졌다. 놈이 휘두른 공격은 머리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있던 자리에는 핀이 뽑힌 확산탄 더미가 데구루루 굴러오고 있었다.

퍼엉!

푹푹 찌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나는 시간을 넘어, 또 기억을 넘어 그런 새하얀 세상을 가로질렀다.

그때도 눈이 왔었지.

강릉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던 그날의 겨울도 말이다.

탁!

버둥거리는 상위 군락의 등을 타고 올라가 왼쪽 팔로 목을 붙잡았다.

반대편 팔에는 날카롭게 빛나는 토마호크가 마지막 복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콰직!

어깨를 밟고 힘을 주었다. 아직 재생하지 못한 상처 사이로 도끼날을 찍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찍고 또 찍으며 근육과 살, 힘줄과 뼈를 부서트렸다.

콰직!

콰직!

피가 튀긴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지난날의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속에는 이제 돌아오지 못할 이가, 또 만나고 싶은 이들이 가득했다.

오늘로써 끝낸다.

그동안 짊어졌던 상속자의 의무도, 과거가 붙잡았던 이 지긋지긋한 인생도 말이다.

그리고 내일은…….

“죽어, 이 새끼야.”

박범석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콰직!

나는 토마호크를 높이 들어 반쯤 너덜거리는 상위 군락의 목을 내려찍었다.

끼익…….

한참을 버둥거리던 놈의 시커먼 눈동자가 곧 빛을 잃었고, 쿵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그 위에 함께 주저앉으며 이쪽으로 몰려오는 헬기를 올려다보았다.

호프 원.

우리 모두 임무를 완수했다.

서늘하게 빛나는 달빛 아래, 전우들의 군번줄이 하나둘 잘그락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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