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모두 내 잘못이다. 상위 군락이 도망칠 수도 있다는 걸 먼저 예상했어야 했다.
나 때문에, 내 잘못된 판단 하나로 형님이 믿고 맡긴 동료를 위험에 빠트렸다.
극심한 자괴감. 지금 당장이라도 총구를 머리로 돌려 용서라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박범석이 해주었던 과거의 조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넘어졌으면 다시 일어나.’
인간은 실수를 반복한다. 후회는 언제나 남으며 완벽이라는 단어는 멀기만 하다.
형님은, 아니 박범석은 그런 고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하나 알려주었다.
‘네 실수를 바로 잡으라고.’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할 때 인간은 비로소 삶의 굴레를 벗고 고귀해질 수 있다.
그것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희생이라면 모든 두려움은 곧 용기로 변하게 된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삶이라는 장작을 불태우는 것처럼.
콰직!
경태는 대원들에게 달려드는 감염체를 붙잡고 턱 아래로 대검을 찔러 넣었다.
끄그그극!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미쳐 날뛰던 감염체는 공포를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놈은 곧 숨통이 끊겼고, 경태는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경태야!”
돕기 위해 달려왔던 가은이는 얼굴이 사색이 된 채 황급히 부축해주었다.
“괜찮아.”
“네 꼴을 봐! 뭐가 괜찮아!”
갈비뼈 여럿이 나갔고, 그 뼈가 폐를 찌르는지 숨을 쉴 때마다 피를 뱉어냈다.
특히 오른쪽 복부에 난 상처는 당장 출혈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경태는 그런 그녀를 제지하며 땅에 떨어져 있던 개인 화기를 주웠다.
“출구는?”
“……아직 못 찾았어.”
대원들 대부분이 다쳤고, 남아있던 탄약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지금은 몰려온 놈들을 어떻게든 막아냈다 해도 그 다음은 보장할 수 없다.
온몸이 피와 진창으로 범벅이 된 가은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재차 물어보았다.
“진짜 들은 거 맞지?”
무선 통신이 불안정한 상황이라 그 어떠한 보고도, 지원요청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잡음 사이에서 들려온 한 미약한 목소리가 그들을 밖으로 이끌었다.
조금만! 조금만 버텨!
바로 유인을 맡았던 박범석으로부터 조금만 버티라는 무전이 전해진 것이다.
“확실해.”
경태는 피로 범벅이 된 방독면 유리를 닦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전이야말로 엉망진창이 된 경태를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또 와요!”
통로에서 한참 감염체와 교전하던 박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미끄러졌다.
이제 좀 멀어졌나 싶더니 기어코 여기까지 웨이브가 밀고 들어온 것이다.
“장비 챙겨!”
그나마 군락 교란 장치가 멀쩡히 작동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진즉 죽었을 터.
살아남은 대원들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통로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그 사이 빠르게 거리를 좁힌 감염체들이 좁은 통로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투두두두두두!
박하나를 포함한 대원들은 황급히 총구를 돌려 따라오는 놈들을 저지했다.
하지만 아무리 넉넉히 챙겨왔다 해도 들고 다닐 수 있는 탄약에는 한계가 있다.
철컥, 철컥!
결국 마지막 탄알집까지 전부 써버린 박하나는 이를 악물며 권총을 꺼냈다.
이는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인지 하나같이 최후를 직감하며 이를 악물었다.
거의 100m 가깝게 벌려놓았던 놈들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오기 시작한다.
쿠르르릉!
그런데 그 순간, 좁은 통로가 파르르 흔들리며 반가운 폭음이 들려왔다.
두 눈을 크게 뜬 가은이는 바람이 정면에서 불어오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출구다!”
“얼마 안 남았어! 달려!”
폭음이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그 말인즉슨 본대가 있는 출구가 있다는 뜻이다.
대원들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저 멀리 바람이 불어오는 통로를 향해 뛰어갔다.
아니, 뛰어가려 했다.
끼기긱?
그런 희망도 잠시, 바로 앞 갈림길에서 일본 변이종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무리에서 벗어나 있던 놈은 대원들을 발견하자마자 길게 울부짖었다.
끼아아아아악-!!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9㎜짜리 부무장 권총과 기껏해야 대검 한 자루뿐이다.
중무장을 해야 겨우 처리할 수 있는 변이종은 사실상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서걱!
그런데 그 순간 앞으로 뛰쳐나간 경태가 놈을 막고 힘껏 자동소총을 휘둘렀다.
끼이이이익!
착검 되어 있던 대검이 관절을 관통하며 일본 변이종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동안 박범석을 보며 배웠던 전투 방법이 경태에게도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뭐해! 빨리 나가!”
맨몸으로는 얼마 못 버틴다. 버텨주는 사이 대원들을 이끌고 밖으로 도망쳐야 한다.
탕!
타앙!
권총을 뽑은 박하나와 가은이는 놈을 향해 미친 듯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그 사이 나머지 대원들은 다친 동료를 등에 업고 출구를 향해 뛰어가려 했다.
끼이이이익!
그 순간 일본 변이종이 길게 울부짖으며 날카로운 팔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서걱!
그 공격에 경태가 들고 있던 자동 소총과 오른쪽 팔이 함께 잘려 나가 버렸다.
“경태야!!!”
솟구치는 피, 쓰러지는 몸,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닌 악몽으로 다가왔다.
경태는 달려오는 동료들과 변이종을 보며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 순간, 경태가 보던 것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주마등이었다.
그립다.
아파트를 거닐면 만나는 길, 듬성듬성한 가로수, 웃는 사람들, 먹먹한 벽지와 이불에서 전해지는 푸근한 사람 냄새까지…….
그립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특히 그 기억 속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건 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이경태 씨죠?’
존경하는 형이었고, 친구였으며, 어떨 때는 돌아가신 아버지만큼 따르던 사람이었다.
최후를 맞이하기 직진인 지금, 그의 잘했다는 말 한마디가 너무나 그리웠다.
‘이제, 됐어.’
피로 범벅이 된 시야 사이로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전부 떠올렸다.
주마등의 마지막을 장식한 경태는 서서히 다가오는 어둠 앞에 몸을 맡기려 했다.
.
.
.
끽, 끼익?
“……?”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황급히 뛰어오던 박하나와 가은이도, 흉측하던 변이종도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는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닌,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난 극의 마지막 장이었다.
쿵!
변이종이 짧게 울부짖더니 피부와 뼈, 살점과 근육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금방이라도 덮칠 듯 달려오던 나머지 변이종과 감염체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종말.
막을 내리는 것은 인간이 아닌 이 땅을 차지하고 오염시켰던 상위 군락이었다.
‘형님.’
눈꺼풀을 파르르 떤 경태는 몰려오는 어둠 아래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그것은 외롭고 추운 죽음이 아닌, 누군가가 선사한 따뜻하고 나른한 잠이었다.
* * *
평화로운 오후, 강릉 순찰대 사무소에선 시끄러운 고성이 오고 가고 있었다.
“이 양반이 먼저 시작했다니까!”
“아니, 이 새끼가 지금!”
그 원인은 시장 바닥에서 시작된 노점상 상인들의 사소한 다툼 때문이었다.
둘 다 벌써 한 번씩 치고받았는지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기세였다.
어휴.
상식 아저씨는 서로 으르렁거리는 노점상 상인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로 쌍방 아니여?”
“난 때린 적 없어!”
“증인이 다 있어, 김 씨. 보니까, 먼저 물건을 던져서 이 지경이 난 거 같은디?”
“그건 실수야!”
“박 씨라고 잘한 거 아니야. 김 씨 아버지 아픈 거 알면서 부모님 욕은 왜 혀?”
“크흠!”
워낙에 드세고 악착같은 상인들이 몰리는 강릉인지라 이런 싸움 정도야 흔했다.
상식 아저씨는 능숙하게 둘 사이를 중재하며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사용했다.
“서로 얼굴 보고 산 지 10년이여, 10년! 앞으로도 계속 싸울 거면 그냥 따로 보고.”
따로 보자는 말에 으르렁거리던 두 상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말았다.
“아니, 그런 건 또 아니고…….”
주변에선 친근하고 좋은 사람으로 불려도 그는 어디까지나 강릉 순찰대 서장이다.
화가 나면 무척 무섭다는 걸 알기에 그 둘은 빠르게 화를 풀고 화해했다.
후우.
그렇게 사소한 다툼이 끝이 나고, 상식 아저씨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순찰대 창설 초기만 해도 살인범, 강도, 마약 사범을 잡아넣느라 난리였다.
하지만 한반도가 안정된 지금은 이런 사소한 사건이 하루에 몇 개 정도 있을 뿐이었다.
일이 없어지는 걸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상식 아저씨는 피식 웃었다.
토독, 톡.
하늘을 올려다보니 짙게 낀 검은색 먹구름과 함께 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는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일주일째 온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 동장님은 밥은 먹고 일하려나? 날씨 때문인지 마음마저 울적한 기분이다.
“아저씨.”
그 순간 아저씨라는 부름에 혹시 박범석이 돌아왔나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김태식이 우산을 쓴 채 터벅터벅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태식이 왔어?”
“예. 잠시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요.”
현재 일본으로 원정 간 인원이 많아 대부분의 행정 일은 김태식이 맡아 해결하고 있었다.
덕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는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또 강릉항까지 갔다가 온겨?”
“오늘 수요일이잖아요.”
하지만 그런 김태식도 수요일만 되면 추모 장소가 있는 강릉항을 다녀오고는 했다.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는 그곳은 이제 주민들이 드나드는 공원과 다를 바 없었다.
김태식은 상식 아저씨가 건네주는 담배를 받아 오랜만에 연기를 내뿜었다.
“벌써 여름도 끝이네요.”
“그러게. 시간이 참 빨리 가.”
박범석을 처음 만났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번째 여름이 훌쩍 지나버렸다.
한때 불모지라 불렸던 강릉은 어느새 하나의 거대한 연합으로 발전되어 있었고, 이제는 서울 요새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반도를 사이좋게 양분하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다음 통합 대통령이 박범석이라고 거의 반쯤 확신하고 있다던데, 어쩌면 이 땅 위에 재건될 새로운 국가는 그의 손에서 시작될지도 몰랐다.
“소식은 없지?”
“예. 어제가 마지막이었어요.”
하지만 그 둘에게 있어 그런 영광, 권력, 명예 따위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몇 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일본 원정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무사할겨.”
전장으로 떠난 수많은 젊은이와 이젠 강릉의 기둥이나 다름이 없는 박범석 시장.
그 둘은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전쟁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아저씨.”
“응?”
한참 처마 밑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김태식이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물었다.
“정말 그 소문 사실일까요?”
“무슨 소문?”
“시장님이 미래를 본다는 소문이요. 요즘 주민들 사이에서 좀 시끄럽거든요.”
언제부턴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문이 한반도 이곳저곳에 돌고 있었다.
바로 강릉 시장 박범석이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언자라는 소문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고 넘기는 그런 시시한 우스갯소리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의 행적을 알고 있던 일부 사람들은 혹시? 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물론 내막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상식 아저씨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예?”
“정말 미래를 볼지도 모르잖여.”
인간이라는 존재는 미래를 걱정하고 또 다가오는 운명 앞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다.
그 굴레는 어떨 땐 너무나 깊고 어두워 간혹 우리를 절망으로 밀어 넣고는 한다.
어쩌면 사람들도 그것이 두려워 그를 예언자라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하지만 자신이 봐왔던 박범석은 예언자가 아닌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이었다.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또 그 누구보다 희망을 믿었던 그런 인간 말이다.
“지금까지 잘해 왔는데.”
그의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것은 정해진 예언이 아닌 바꿀 수 있는 미래였다.
“비가 그치려나 보네요.”
“그러게.”
토독토독 지붕을 때리던 비는 어느새 그치고 늦은 일몰이 드리우고 있었다.
상식 아저씨는 어느새 먹구름이 가신 고즈넉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따라 보고 싶네, 우리 시장님.”
계절이 지나고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그가 돌아올 때쯤이면 흉터처럼 남았던 과거는 모두 저 일몰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내일은…….
내일은 비가 오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