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176화 (176/180)

<176화>

일본 열도를 멸망으로 몰고 갔던 후지산 군락은 연합군의 손에 의해 소멸당했다.

당연히 그 일대를 오염시켰던 감염체 무리와 변이종은 완전히 모습을 감췄고, 불안전하던 후지산과 지하 지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전투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살, 살려주십시오!”

“여기 생존자다! 의무병 불러!”

상위 군락의 홋카이도 침공으로 인해 일본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감염체를 피해 숨어있던 수많은 생존자가 나오며 한순간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연합군은 즉각 물자와 병력을 파견해 그들을 모두 시설에 수용하는 한편, 각지로 흩어진 감염체 무리를 쫓아 토벌하고 소거하며 지역을 하나둘 수복했다.

한번 오염된 도시가 옛 모습을 되찾으려면 적어도 수년이 걸린다는 게 상식이다.

인프라는 없고 사람만 많은 열도는 한동안 연합군의 골칫거리로 남게 되었다.

“자, 자! 천천히 타세요!”

“자리 아직 많습니다! 모두 줄을 서세요!”

후속 부대가 바삐 전후 처리를 하는 사이, 상위 군락과 치열하게 싸웠던 원정군은 바다를 건너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갔다.

비록 돌아오지 못한 자도, 그런 자들을 남겨두고 와야만 했던 자들뿐이었지만, 그리운 가족과 연인의 품은 전쟁이라는 상처를 아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참전했던 이들의 마음에는 작은 떨림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여름의 끝, 불가능이라 여겼던 일본 원정은 막을 내렸다.

[정말 종전이 다가온 겁니까?]

[대통령 각하!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내게 배팅했던 미합중국 대통령 제프리는 역대, 가장 위대한, 신이 내려주신 등등의 화려한 칭호와 역대급 지지율을 갱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는 건 그리 흔한 공적은 아니었으니까.

전 세계가 주목하는 기자회견에서 제프리는 너무도 당당하게 선언해버렸다.

[3주. 앞으로 3주 약속드리겠습니다. 다음 기자회견은 LA에서 진행하도록 합시다.]

후지산 군락이 소멸하며 LA 군락 또한 회복하지 못할 데미지를 입고 말았다.

들리는 바로는 감염체 웨이브가 벌써 돌파당해 파죽지세로 밀리고 있다는데, 사실상 한쪽 상위 군락이 소멸하는 것을 끝으로 놈들의 운명은 정해졌다.

제프리가 호언장담한 대로 감염체가 소멸하는 건 3주가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무리는 그들에게 맡기고 한미 연합군을 해산, 드디어 강릉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이 땅은 관심이 없다.

여름이 지나고 세상을 갈색으로 물들이는 가을이 시나브로 찾아오고 있었다.

“식량 상황은 어때요?”

“한창 수확기라 자급자족까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준비한 보람이 있네요.”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한때는 식량을 전량 수입해야 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시청과 강릉 주민들의 노력으로 올해 가을은 나름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

나는 우상향을 그리는 그래프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계속 서류를 살폈다.

“발전소가 새로 들어선다고요?”

“매년 전력 소비량이 늘고 있습니다. 슬슬 부지를 선정하고 예산을 확보 중입니다.”

시내 인구는 물론 여러 정착촌까지 생겨나며 점점 전력 소비량이 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충분하다고 해도 훗날 전력이 부족한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강릉은 당장 1년이 아닌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며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얼추 잘 진행되고 있네요.”

“시장님 덕분입니다.”

그 외에 이민법 완화, 의무 교육, 민간 병원 신설과 여러 복지 사업 선정까지, 쌓여있는 서류만 해도 4층탑을 쌓고도 남았다.

거의 3개월간 업무에만 전념했던 나는 그제야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집무실 풍경은 늘 그대로인데 창밖으로 보이는 강릉은 벌써 낙엽이 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소식 들으셨습니까?”

“예?”

“김태하 소장 말입니다. 올해까지만 직무 대행을 하시고 곧 은퇴한다고 들었습니다.”

군부가 정권에 개입하는 것을 정말 죽는 것보다 싫어하던 김태하 소장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달 전 연락한 대로 직무 대행을 마무리한다고 발표한 모양이다.

세상은 이에 놀라면서도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통합 이야기로 시끄럽겠군요.”

“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한반도는 강릉 연합과 서울 요새라는 두 개의 세력이 양분하고 있다.

하지만 나누어져 있다기에는 왕래가 자유롭고 협력하고 있는 사업 또한 많았다.

말마따나 강릉과 서울 이 두 집단은 이제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지경까지 왔다.

통합은 필연적이다.

어쩌면 김태하 소장이 물러나는 내년이 통합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접견 날짜 잡으시겠습니까?”

그래서일까, 최근 서울의 정치인들이나 사업가들이 강릉을 찾아오는 일이 많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울 시민조차 아닌 내가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이다.

태식 씨와 강릉 사람들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 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저명인사들이 많습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됐습니다.”

“예?”

“관심 없으니까, 다 돌아가라고 하세요.”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나는 그들과 조금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자, 선선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은퇴할 겁니다.”

쨍그랑! 한참 커피를 마시고 있던 태식 씨가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렸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서 세상을 장식하고 떠나려는 늦가을을 바라보았다.

* * *

우연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청 직원을 통해 은퇴 소식이 밖으로 퍼져나갔다.

그날 아무 생각 없이 퇴근했던 나는 10초마다 한 번씩 울리는 전화기에 놀랐다.

‘아니, 직접 연락하지 마시라니까요?’

‘예, 예! 가짜 뉴스입니다.’

김태하 소장을 시작으로 미합중국 대통령 제프리까지 온갖 전화가 왔다.

나는 조금 뒤늦게 연락을 돌리며 아직 결정된 건 없다고 밤새 해명해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앞으로 겪을 일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장님! 은퇴하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제발 저희를 두고 떠나지 마세요!”

아침이 되자 평화롭던 아파트 정문은 수많은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특종 냄새를 맡은 기자, 소문을 들은 강릉 주민들이 전부 여기로 몰려온 것이다.

그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문을 지키던 베테랑 경비조차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할아버지 집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젠장, 이럴 줄 알고 조용히 있었던 건데 그새 소문이 퍼졌을 줄이야.

창문 밖으로 빠끔히 고개를 내민 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민들 마음이야 모르는 건 아닌데, 은퇴는 일본 원정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가 울고 보챈다고 해서 바꿀 거였으면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물러나십시오!”

“해산해요! 이게 뭐 하는 짓들입니까!”

결국 보다 못한 강릉 순찰대가 나서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내일이면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올 것이다.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하나.

모두 사실대로 말하자니 주민들이 느낄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거짓말을 하자니 앞으로 지키지 못할 책임감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할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덜컹.

서재는 여전히 따뜻한 온기와 포근한 나무 냄새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미래 일기가 놓여있는 책상 앞에 앉아 전등이 깜빡이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손주 보기 안쓰럽지도 않습니까?”

정말 얼떨결에 동장을 맡고, 정말 등 떠밀리듯이 강릉 시장 자리에 앉았다.

그 과정에서 싸우고 죽이고 또 다치고 쓰러지고 정말 어찌나 힘이 들었는지…….

그동안 해온 개고생을 생각하면 24시간을 투덜거려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얼굴에는 찡그림이 아닌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정도면 몇 점이에요?”

기나긴 여정을 지나 이제는 은퇴를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종착지까지 왔다.

이 순간 가장 먼저 듣고 싶었던 건 최선을 다했다는 그 짧은 한마디였다.

“어휴, 됐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상대로 뭐 하는 짓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 넣어둔 황금 만년필을 꺼내 손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았다.

“너도 고생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여정은 여기서 마지막이다.

마지막 미련마저 가볍게 내려놓은 나는 책상 위로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앞으로 녀석이 쓸 이야기는 박범석이 아닌 박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미 빛을 잃은 녀석은 다른 만년필처럼 먼지 낀 책상 위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치익!

그렇게 짐을 정리하고 나오려는데, 상식 아저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동장! 좀 나와봐야겠는데?]

“무슨 일 있어요?”

[지금 아파트 주민들까지 난리가 났어!]

“아씨! 금방 갈게요!”

아까부터 밖이 시끄럽더니, 아파트 주민들까지 시위 인파에 합류한 모양이다.

안팎으로 난리가 난 상황에 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곧 가겠다고 답했다.

그래, 어쩌겠어.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해서 설득하는 게 최우선이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빛을 잃은 일기장만 대충 치우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팔락.

“……?”

그런데 그 순간, 일기장이 놓여있던 책장 사이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나는 얼떨결에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종이와 사진 한 장을 주워들었다.

“캔자스?”

관광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여행 엽서다.

세월이 느껴지는 그 엽서에는 오즈의 마법사로 보이는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누가 보낸 것일까? 관광 엽서에는 보내는 사람의 주소만 덩그러니 쓰여 있었다.

‘한 장이 아니야.’

캔자스를 포함해 미국 중부를 여행한 기록이 관광 엽서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엽서를 한 장 한 장 전부 확인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그리고 곧 머지않아 이 엽서를 보낸 인물이 내 할아버지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엽서 가장 마지막 장에는 젊은 시절 그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었으니까.

[4월 19일, 오늘을 기념하며.]

건장한 체격인 할아버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안타깝게도 상대 쪽은 흐려진 사진 상태 탓에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4월 19일, 오늘을 기념하며. 도대체 이 둘은 무엇을 기념하고 싶은 걸까.

나는 나도 모르게 젊은 시절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물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미래 일기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금 서재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낡디낡은 미래 일기였다.

역시 할아버지도 누군가에게서 이 녀석을 상속받아 지금까지 물려준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들고 있던 여행 엽서를 조용히 챙겼다.

[동장! 아직도 멀었어!? 경태랑 가은이 이놈들까지 합류해서 아주 난리통이여!]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급히 밖으로 나섰다.

은퇴 이후 찾아올 빈껍데기 같은 삶에 또 다른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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