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하루 이틀 타오르고 말 줄 알았던 은퇴 사태가 생각보다 너무 커져 버렸다.
본격적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시청과 아파트로 찾아오는 인파가 더 많아진 것이다.
시끄럽다며 민원을 넣어야 할 아파트 주민까지 가세하고 있으니 말 다하지 않았나.
오죽하면 일주일째 출근도 못 하고 은서한테 도시락만 겨우겨우 받아먹고 있었다.
그래, 문제가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슬퍼하는 주민들을 어떤 말로 설득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상식 아저씨께 SOS를 치고 조언을 구하고자 했다.
“가끔은 말이여, 솔직해야 할 때도 있어.”
“솔직하게요?”
“저 사람들한테도 생각할 시간을 좀 줘봐.”
당장 기자회견을 열어도 모자랄 시간에 잠깐 시간을 주고 기다려달라니.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상식 아저씨의 조언을 받아들여 긴 휴가를 냈다.
그렇게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던 칩거 생활이 일주일 정도 더 지난 시점이었다.
“동장, 이제 나와도 돼.”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아파트 정문에는 이제 기자들밖에 남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시청으로 연락해보니 어제부터 민원실도 무척 조용해졌다고 했다.
아저씨가 마술이라도 부린 걸까?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별 거 없어. 그냥 시간만 조금 준거여.”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 몰랐는데 그동안 상식 아저씨가 부지런을 조금 떨었다.
아파트로 찾아오는 그들을 막는 대신, 매일매일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돌린 것이다.
물론 한참 성내고 슬퍼하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충 마시고 무시하기 일쑤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우러나는 찻물처럼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일까.
그동안 고생한 사람을 안아주기는커녕 제발 떠나지 말라고 아우성치고 있다니.
우리는 항상 의지만 하고 있었을 뿐, 그 누구 하나 버팀목이 되어준 적이 없었다.
비로소 생각을 정리한 주민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격한 흙탕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흙이 가라앉아 맑은 물만 위로 올라오게 된다.
상식 아저씨 말대로 그들에게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동장도 이제 솔직하게 말하는겨.”
나는 특종 냄새를 맡고 몰려온 서울과 외신기자들을 전부 돌아가게 했다.
대신 강릉 사람들이 즐겨 듣는 희망 FM으로 가서 소소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짧은 과거사, 그간 겪었던 일, 몸 상태 등등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것은 내 회고록이자 강릉과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솔직한 고해성사였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방송 이후 강릉에는 씁쓸함, 아쉬움 등 여러 감정이 혼재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응어리진 채 남아있던 찝찝함은 후련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났다. 강릉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아침과 함께 일상을 시작했다.
어느덧 가을은 모두 지나고, 1년을 마무리하는 초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진품이네?”
“예. 미국에서 구한 거예요.”
지난번 일에 대해 보답도 할 겸 상식 아저씨에게 질 좋은 양주 한 병을 대접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자리에 앉은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누었다.
물론 내가 이런 자리를 만든 진짜 이유는 궁금한 과거사를 묻기 위해서였다.
“박 동장이?”
“예, 혹시 아시나 해서요.”
아버지가 본가와 일찍 의절한 탓에 할아버지와 관련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같은 동향 사람인 상식 아저씨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으음, 그렇다고 듣기는 했어.”
“정말요?”
“응. 실제로 영어도 꽤 유창했지.”
평생 강릉에만 사셨을 줄 알았는데 무려 미국에서 공부하신 유학파 출신이다.
당시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상을 생각하면 정말 의외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얼굴이 붉게 변한 상식 아저씨의 잔에 연거푸 양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혹시 뭐 다녀오신 이후로 사람이 갑자기 변했다거나 그런 일은 없으셨죠?”
“일이야 많았지. 근데 평소에도 워낙에 특이한 양반이어서 별로 특별한 것도 없었어.”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자 상식 아저씨는 옛날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꽤나 유명한 영어 번역가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처음 듣네요.”
“아버지가 이야기를 안 해줬구먼.”
어쩐지 서재에 영문 책들이 가득하더라니. 우리 아버지도 참 무관심하셨구나.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만 쿡쿡 쑤셨다.
그러자 상식 아저씨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근데 그 양반이 연락을 잘하는 양반이 아니거든? 근데 이상하게 엽서를 자주 보내더라고. 무슨 친구가 생겼다나 뭐라나.”
어? 친구라는 말에 나는 순간 사진 속 할아버지와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순간 입에 머금고 있던 양주를 내뿜으며 다급히 아저씨의 손을 붙잡았다.
“그, 그 엽서 혹시 버렸어요?”
“응? 찾아봐야 알겠는디.”
“지금 저랑 같이 가요! 당장!”
양주를 절대 놓지 않으려는 상식 아저씨를 억지로 이끌고 104동 아파트로 달려갔다.
다행히 창고에는 그날 할아버지가 보냈다던 여행 엽서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모든 엽서를 시간 순으로 정리하자 미국을 횡단했던 할아버지의 행적이 그려졌다.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이 합쳐졌다.
그것은 꼭 내게 따라오라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만 걸어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 *
내가 은퇴 의사를 밝힘과 동시에 강릉 방위군 내부에서도 변화가 시작됐다.
그동안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특임 대원들이 하나둘 자신의 거취를 정한 것이다.
그중 누군가는 군에 남아 특수 교관이 되기로 했고, 또 누군가는 전역을 신청했다.
아마 올겨울이 끝나면 다들 각자의 길을 걷기 위해 정들었던 해변을 떠날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모두 떠난다고 해서 강릉 특임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더 크게!”
“으아아아아악!”
전쟁이 끝나가는 마당에 감염체 특수팀을 더 이상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강릉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새로운 특수팀을 꾸릴 필요가 있었다.
이에 전 특임 대원들의 지휘 아래 수많은 지원자가 차출되어 해변으로 끌려왔다.
“선착순 한 명!”
수십 명이 넘는 병아리 신병이 노을이 진 해변의 모래사장을 미친 듯이 달려갔다.
하지만 호랑이 교관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교관은 무척 실망했다!”
그 호랑이 교관은 다름 아닌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고 있는 박하나였다.
자기도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병아리였으면서 후배들 앞이라고 잘난 척하기는.
나는 한참 훈련 중인 녀석을 부를까 하다가 그냥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얼굴이 많이 밝아졌어요.”
“그러게.”
PTSD가 가장 무서운 것은 치료할 수는 있어도 완치가 힘들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우리 같은 베레랑 대원도 막바지에는 전역을 논하고 있겠는가.
끝내 자살하는 사람을 많이 봐온 만큼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한 바퀴 더!”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하나는 강릉에 잘 적응해 두 번째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뭐, 앞으로 일이야 송지영이 총책임자로 남기로 했으니 별 걱정은 없었다.
“너희는 순찰대로 간다고?”
“예. 전공을 살려야죠.”
“특채 이런 거 안 해줄 거다.”
“필기시험만 어떻게 해주면 안 돼요?”
분신처럼 붙어 다니던 경태와 가은이는 군을 나와 강릉 순찰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무래도 상식 아저씨가 있기도 하고, 둘 다 연고지가 희망 아파트였으니 말이다.
“참나.”
둘이 순찰대에 가거나 말거나 어엿한 어른이니 이제 알아서 잘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부끄러워하는 경태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배알이 꼴렸다.
“진짜 결혼한다고?”
“그게 어쩌다 보니…….”
“야! 네가 먼저 프러포즈했잖아!”
“진, 진정해 가은아!”
전 여친, 전 남친 관계인 줄 알았던 그 둘이 나 몰래 비밀 연애를 하고 있었다.
올해 봄부터 정식으로 사귀다가 이제 슬슬 결혼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다.
나는 또 투덕거리며 싸우는 그 둘을 갈라놓은 뒤 주머니에서 열쇠를 던졌다.
“강릉항에 조그마한 집 하나 얻어놨어. 너희 명의로 돌렸으니까, 관리 잘하고.”
“형, 형님?”
“이것밖에 못 해줘서 정말 미안해. 둘이 서로 도우면서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아.”
그동안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왔던 경태와 가은이다.
모아둔 돈도 없을 텐데 이 정도 신혼집과 자금은 내가 해주는 게 당연했다.
조용히 열쇠를 받은 그 둘은 고개를 푹 숙이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찰칵!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물고 저 멀리 파도가 철썩이는 강릉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침 지고 있던 석양이 껄끄러웠던 마지막 짐마저 모두 털어내게 하는 것 같았다.
“형님.”
“응?”
“정말 떠나실 거예요?”
“아마 그럴 거 같아.”
지난 상식 아저씨와의 대화 이후 흔들렸던 마음을 반쯤 굳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할아버지가 남긴 행적을 따라 저 멀리 미국까지 가는 것 말이다.
동부에서 서부, 온갖 지역은 다 들르셨으니 사실상 횡단이라는 말이 맞겠지.
진실을 찾는 데에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사실 나조차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돌아오실 거죠?”
“당연하지.”
하지만 분명한 건 마지막 여행이 끝나는 종착점은 바로 이 강릉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경태와 가은이의 어깨를 한 번씩 툭 쳐준 다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앞으로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얘들 결혼식까지 봐주려면 해야 할 일투성이였다.
“어?”
“충, 충성!”
그 순간 코를 킁 삼키던 경태와 가은이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얘들이 또 장난치는 건가 싶어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고 고개를 돌렸다.
“팔자 좋군.”
“엥?”
그런데 이상하게 몹시 낯이 익은 사람이 미간을 찡그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김태하 소장님?”
“이젠 예비역이지.”
“설, 설마 전역하셨습니까?”
“그래, 누가 강릉으로 오라길래 왔다.”
과거, 강릉을 찾아왔던 김태하 소장과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기는 하다.
훗날 전역하시거든 강릉으로 와서 아무 걱정 없이 노후 생활을 즐기시라고.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낚시랑 술이나 마시면서 신선처럼 지내시라고 말이다.
“근데 뭐? 은퇴한다고?”
하지만 내가 시원하게 은퇴해버린 덕분에 그의 노후는 금이 가버리고 말았다.
“소, 소장님, 잠시만요!”
“그냥 딱 한 대만 맞자.”
짐까지 모두 챙겨온 김태하 소장은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물론 깜짝 놀란 경태와 가은이가 애걸복걸하며 달려든 덕분에 맞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두 손으로 싹싹 빌며 그의 거처를 마련해야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간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결국 화를 푼 김태하 소장은 나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며 담배를 태웠다.
이젠 백발이 무성한 그도, 눈가에 주름이 선명한 나도 너무나 멀리 와버렸다.
“겨울에도 철새가 있다는 거 아냐?”
“이 추운 겨울에요?”
“저 북쪽 시베리아에 있다가 그나마 덜 추운 한반도로 내려온대. 걔들한테는 여기가 그나마 따뜻한 휴식처라는 거야. 웃기지?”
겨울이라고 철새가 없는 건 아니다. 그들도 추운 겨울을 피해 겨울인 한반도로 온다.
사람도 같다. 아무리 지겨운 세상이라도 포기 하지 말고 남쪽으로 날아야 한다.
더 따뜻한 곳을 찾아.
함께 나는 철새들을 따라서 말이다.
김태하 소장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피우고 있던 담배꽁초를 조용히 비벼 껐다.
“다녀와라.”
“예.”
나는 그와 함께 담배를 비벼 끄며 이 씁쓸한 입맛과도 영원히 작별 인사를 했다.
겨울이 온다.
이제 남쪽으로 날아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