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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78화 (178/180)

<178화>

말은 당장 떠날 것처럼 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 은퇴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랬다.

나 하나 편해지자고 모든 걸 내팽개치기에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힘들어질 테니까.

적어도 한반도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만 자리를 지키는 게 어른의 몫이었다.

나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에서 시청 업무를 최대한 인수인계 해주었고, 복구 사업이 궤도에 올랐을 때는 태식 씨와 직원들이 세운 초안을 검토해주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겨울로 접어들어 또 한 번 눈이 내렸다.

‘드디어 종전!’

제프리가 3주를 약속했던 마지막 전쟁은 생각보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토를 수복하는 게 최우선이기도 했고, 둥지 규모가 생각보다 컸던 게 원인이었다.

결국 참다 참다 전술핵을 사용한 모양인데, 뉴스에는 온통 그 이야기뿐이었다.

아마 미국도 당분간은 정세 변화와 전후 처리로 골머리를 앓을 것 같았다.

‘새로운 대통령은 누구인가?’

반대로 안정을 되찾은 한반도는 통합과 대통령 선거에 모든 시선이 쏠렸다.

아무래도 지난 일을 겪으며 고여 있던 정치권이 아예 물갈이되어버린 탓이 컸다.

또,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걸출한 인물 몇몇이 점점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사람만큼 커다란 임팩트를 주는 후보는 없었다.

“하하하!”

“그만 좀 웃으십시오!”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출퇴근하던 태식 씨가 대통령 출마 의사를 밝혔다.

시장도 아니고 무려 대통령? 처음에는 듣는 나도 어안이 벙벙해 재차 물었다.

그도 그럴 게, 태식 씨는 야망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좀 먼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다 시장님 때문 아닙니까!”

하지만 이는 단순히 충동적인 선택이 아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내가 아무리 잘 마무리하고 떠난다 해도 정치적으로 공백이 남는 건 사실이다.

거기에 통합까지 진행된다면 강릉 연합의 영향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태식 씨는 그걸 우려한 나머지 힘이 최대한 있을 때 주도권을 잡으려 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조용조용 일만 하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나는 여전히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 태식 씨를 보며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지지 연설이라도 해드려요?”

“하하, 됐습니다.”

일 중독 공무원처럼 보여도 강릉 연합에서는 나 다음가는 위상을 가진 행정가다.

거기다 회장 조카라는 타이틀, 또 내 전폭적인 지지까지 받고 있으니 말 다했지.

정통성과 실력 둘 다 갖춘 후보인 만큼 강릉 연합도 그를 중심으로 뭉칠 것이다.

“후임도 정하셨겠네요.”

“혜지 씨가 맡기로 했습니다.”

“인물이 그렇게 없습니까?”

“들으시면 섭섭해하겠는데요.”

“농담입니다. 잘 선택하셨어요.”

번영회 말단 직원부터 시작해 팀장까지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온 혜지 씨다.

이를 결과로 입증해온 만큼 태식 씨도 그녀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코흘리개 애송이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장 대행을 맡을 만큼 커버렸구나.

나는 헤헤 좋아하고 있을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틀 남았네요.”

“시간 빠르죠?”

달력을 보니 내가 마지막 업무를 볼 날짜가 겨우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나머지는 출장 일정이니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봐도 좋았다.

다들 퇴근했나? 나는 유난히 조용한 집무실 밖을 둘러본 뒤 자리에 앉았다.

“저희끼리 잘할 수 있을까요?”

“네. 잘하실 겁니다.”

모든 이들이 피땀을 흘려 세운 곳이 바로 이 강릉이라는 아름다운 도시다.

내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했다는 걸 알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맡기고 갈 수 있었다.

“모시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시장님.”

그간 울고 웃으며 수많은 변화를 주도했던 우리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들었던 집무실도,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태식 씨도 이제는 안녕이었다.

* * *

내가 마지막 출근을 하던 날 밤, 강릉항에서는 송별회 겸 마지막 회식이 열렸다.

처음에는 함께 일했던 동료들만 불러 최대한 소소하게 진행하려고 했었는데, 점점 아는 사람이 전부 참여하더니 갑자기 마을 잔치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시장님! 저 박강수입니다!”

“귀한 산삼주거든요? 한 잔 받으세요!”

사람들은 시장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기 위해 정말 줄까지 서가며 기다렸다.

덕분에 나는 송별주, 고별주, 이별주 등등 온갖 이름이 붙은 술잔을 받아야 했다.

듣자 하니 어제 하루 배달된 술 궤짝만 트럭으로 두 대 분량이었다고 한다.

온갖 술들이 섞인 폭탄주를 생각하면 차라리 감염체와 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으으…….”

점심까지 숙취를 회복하지 못한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소파에서 녹아내렸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엠마가 직접 얼큰한 콩나물국을 끓여다 주며 타박했다.

“누가 그렇게 마시래요?”

“그럼 주는데 어떡합니까.”

“적당히 거절하고 나왔어야죠.”

“그게 말처럼 쉽나요.”

겉으로는 하하 호호 웃고 있는 거 같아도 다들 속은 말이 아닐 것이다.

특히 아쉬워하는 상식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차마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새벽 5시까지 말술을 달리며 송별회를 마무리했다.

후루룩.

평소 술을 좋아하는 엠마라 그런지 해장국을 끓이는 실력이 진짜 범상치 않다.

나는 식탁 위에 놓인 콩나물국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두 들이켰다.

“정신이 좀 들어요?”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그 모습을 혀를 차며 바라보고 있던 엠마는 곧 노트북을 가져와 화면을 켰다.

뭔가 싶어 들여다보니 내가 이전에 보여줬던 여행 엽서들이 사진으로 찍혀있었다.

“또 대책 없이 돌아다닐까봐 만들어봤어요. 생각보다 동선이 복잡하거든요.”

할아버지는 미국 동부에서부터 시작해 중부를 기점으로 서부까지 횡단하셨다.

모아온 엽서로 보아 사실상 미국 전역을 여행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사람을 찾는다고 했죠?”

“예.”

그리고 나는 거기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 한 명을 찾으러 가야 한다.

심지어 있는 단서라고는 엽서 속에 그려져 있는 관광지와 흐릿한 사진 한 장뿐이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엠마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모하다고 생각 안 해요?”

“뭐,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찾겠죠.”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상관없다. 만약 못 찾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할아버지가 남긴 엽서를 따라 한없이 떠나고만 싶은 생각이었다.

“봐요.”

하지만 엠마는 그 꼴은 죽어도 못 보겠는지 내 옆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스페이스 바를 연신 두드리자 화면 속 엽서들이 하나둘 미국 지도에 대입되었다.

“보기에는 복잡해 보여도 정해진 패턴이 있어요. 이동 경로가 동부에서 서부라는 건 알고 계실 거고, 특히 중부 지역에서 꽤 오랜 시간을 있으셨던 것 같아요. 유명하다 싶은 관광지는 전부 돌아보신 모양이네요.”

말이 좋아 유학이지 사실상 하와이안 티셔츠를 입고 방문한 관광객이신 것 같았다.

나는 무슨 철새처럼 돌아다니신 할아버지의 이동 경로를 보며 무척 난감해했다.

하지만 역시 정보전 전문가 엠마답게 특이한 점 몇 가지를 금세 알아냈다.

“이상하게 중간중간 예상 경로를 이탈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대부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나 한적한 시골 마을이에요.”

보통 관광이 목적이었다고 하면 볼 게 많은 대도시나 랜드마크를 돌아다닌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한 달마다 사람이 없거나 적게 사는 지역을 꼭 방문했다.

“배경 보이시죠?”

아니나 다를까, 알 수 없는 남자와 찍은 사진 속 배경도 그런 시골 마을 중 하나였다.

딱 오래된 미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주택 말이다.

엠마는 다시 스페이스 바를 눌러 엽서 구매처를 하나둘 추려보기 시작했다.

“줄여서 스물두 곳이네요.”

시골 마을 기념품 상점, 국도를 지나가면 보이는 주유소 등등 정말 다양했다.

이렇게 추려내니 따라가야 할 곳이 수백 개에서 겨우 스물두 곳으로 줄어들었다.

“어때요?”

“오오!”

내가 감탄하자 엠마는 이 정도는 기본이라는 듯 후후 웃으며 자기 팔짱을 끼었다.

살다 보니 전직 CIA가 여행 계획도 짜주는구나. 역시 친구 하나는 잘 둔 것 같다.

나는 콧대가 잔뜩 높아진 엠마를 칭찬해주며 기꺼이 분위기에 어울려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걱정된다는 얼굴로 마우스를 만지작거렸다.

“지금 현지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해요. 일단 중부 지역은 마땅한 교통편도 없고 치안도 안 좋거든요. 혼자 돌아다니기는 조금 그렇고 제가 아는 가이드라도 한 명…….”

“같이 가요.”

“예?”

“같이 가자고요.”

한참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엠마는 한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는 한동안 파르르 떨리더니 곧 환희와 기쁨으로 물들어갔다.

“저, 저 바쁜 사람인데요?”

“휴가 내고 가는 거죠. 싫어요?”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을 한 엠마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눈을 피했다.

그러다 결국 후다닥 의자에서 일어나 도망치더니 위성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제임스, 나 휴가니까 그렇게 알아.”

[예? 그게 갑자기 무슨…….]

“한동안 연락하지 말고. 그럼 수고해.”

졸지에 팀장 업무를 대신 맡게 된 제임스는 비명을 질렀지만, 통화는 곧 끊겼다.

전화기를 꼭 움켜쥔 엠마의 얼굴은 어느새 수줍은 웃음꽃으로 물들고 있었다.

* * *

인생이 동전이라면 한쪽은 삶이, 또 한쪽은 죽음이라는 면이 자리를 차지한다.

아무리 던지고 또 던져보아도 양면이 가깝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게도 이를 망각한 채 평생 동안 눈물을 흘리고 또 슬퍼한다.

슬피 우는 짐승, 어쩌면 우리는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잊어야 했던 건 아닐까.

“늦었지?”

강릉이 내려다보이는 추모 공원 위로 새하얀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드리운다.

언덕에는 돌아오지 못한 대원들의 묘가 빛을 받아 포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죽음의 장소가 아닌 삶의 장소. 살기 위해 모였던 이들이 여기 모두 잠들어 있다.

떠나십니까? 어디서 부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를 바람이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잘그락.

나는 환하게 웃었고 차마 묻지 못했던 대원들의 군번줄을 꺼내 손에 쥐었다.

무겁지 않았다. 그들은 이젠 자신들을 보내줄 때라며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무릎을 꿇고 앉아 대원들의 묘 아래에 군번줄을 하나하나 묻어주었다.

여기 묻고 가라.

길었던 슬픔도, 여전히 흉터로 남은 아픔도, 쓸데없던 걱정도 모두 여기 묻고 가라.

겨울이 오면 눈이 될 것이고 또 봄이 찾아오면 꽃이 피어 자리를 지킬 테니까.

나는 이젠 떨리지 않는 손을 꾹 움켜쥐며 떠나간 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더 이상 눈물은 흘리지 않겠다.

그들 모두를 내 마음속에 묻어두고 떠날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 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원 언덕을 내려갔다.

언덕 아래에는 수많은 일행이 인사를 끝내고 내려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난 세월 나를 괴롭게 했던 모든 찌꺼기와 허물이 바람을 타고 씻겨 나갔다.

손을 들어 인사한다. 안녕, 그리고 안녕. 언젠가는 돌아올 내 고향 강릉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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