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미국 서부 수복을 끝으로 13년간 이어졌던 지겨운 전쟁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하고 있던 전 세계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기뻐했고, 곧 무너졌던 사회를 재건해 13년 전의 일상을 되찾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다.
지난 전쟁이 만들어낸 여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사회는 혼란을 빚었다.
몰려오는 난민, 기후 변화로 인한 극심한 식량문제, 또 갈수록 나빠지는 치안.
길었던 전쟁은 도시와 인프라는 물론 사회 인식마저 좀먹어 버린 지 오래였다.
‘혼란과 침체.’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하는 건 시간이 아닌,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피였다.
전쟁을 끝낸 미국은 최대한 혼란을 수습하고 본격적인 재건에 들어가려 했지만, 아직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중부 지역은 여전히 무정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총을 들어야 했다.
미국 캔자스주에 위치한 데어 필드 마을도 그런 수많은 마을 중 하나였다.
“또 라디오 듣냐?”
한참 서바이벌 라디오를 듣고 있던 주근깨 피터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릴 적 친구인 리암이라는 걸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 그러다 신부님한테 혼난다.”
“뭔 상관이야. 그냥 듣기만 하는 건데.”
서바이벌 라디오를 얻기 위해 무려 반년 동안이나 모은 통조림을 가져다줘야 했다.
피터는 이미 보물 1호로 지정한 라디오를 쓰다듬으며 자리 한구석을 내주었다.
사다리를 타고 초소까지 올라온 리암은 다짜고짜 종이봉투를 툭 던져주었다.
“자, 할머니가 너 가져다주래.”
“작년에 만드신 거네?”
항상 교대 10분 전에 찾아와 할머니가 만든 간식을 가져다주는 절친 리암이었다.
피터는 히히 웃으며 설탕이 묻어있는 마른 과일을 부지런히 입안으로 가져갔다.
달다! 역시 하루 중 낙은 할머니가 만들어준 간식을 먹는 이 시간뿐이었다.
그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던 리암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또 그 사람 소식 듣고 있었지?”
“응. 매번 똑같지 뭐.”
“지겹지도 않냐? 너도 참 대단하다.”
“신부님하고 똑같은 소리 하네.”
한때 감염체 다큐멘터리라는 3부작으로 유명했던 동양인 남성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범석. 저 멀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전쟁영웅이다.
미국에선 상위 군락을 죽여 전쟁을 끝낸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군인이었다.
물론 지금은 소리소문없이 은퇴해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데어 필드 마을의 어린 청년 피터만큼은 여전히 그의 소식을 찾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단순히 팬심을 넘어 그를 진짜 구원자라고 믿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 그 누구도 라디오 하나에 목숨 거는 피터를 나무라지 않았다.
“내 것도 먹을래?”
“응!”
피터의 부모님은 모두 감염체 사태 당시 바이러스에 걸려 돌아가셨다.
녀석에게 있어 박범석의 소식을 듣는 건 유일한 취미이자 작은 희망이었다.
좀 유별나면 어떤가, 리암은 친구와 함께 웃으며 평화로운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끼긱!
그런데 그 순간, 저 멀리 수풀에서 소름 돋는 소음 하나가 귓가를 자극했다.
깜짝 놀란 리암과 피터는 황급히 입을 다물고 내려놓은 총을 들어 올렸다.
쉿!
저 멀리 숲속 너머로 한 흐릿한 형체들이 느릿느릿 초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감염체라는 걸 눈치챈 피터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이를 악물었다.
‘감염체다.’
상위 군락이 소멸함과 동시에 통제가 풀린 감염체 놈들은 미국 전역으로 흩어졌다.
물론 미국이 매해 군대를 동원해 남아있던 놈들을 깨끗하게 청소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중서부는 가끔 이런 식으로 습격에 노출되고는 했다.
끼이익!
제발 가라. 제발 지나쳐 가라. 총구를 밖으로 내민 피터는 속으로 기도했다.
킁킁.
하지만 이미 인간 냄새를 맡은 감염체는 서서히 초소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숫자만 물경 수십. 이 작은 마을이 감당하기에는 조금 벅차 보이는 규모였다.
거리는 불과 50m. 피터와 리암은 어쩔 수 없이 총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탕! 탕!
미국 중서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총 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둘은 정확하게 표적을 명중시키며 다가오려는 감염체를 하나둘 쓰러트렸다.
끼이이익!
하지만 고작 22구경짜리 단발 소총으로는 수십 마리 감염체를 처리할 수 없었다.
제발 이 총성을 다른 어른들이 듣기를 빌며 그 둘은 쉴 틈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젠장, 피터!”
“계속 쏘기나 해!”
놈들은 2m짜리 장벽을 돌파해 초소가 있는 철조망 앞까지 순식간에 달려왔다.
콰직!
이를 악문 피터는 위로 올라오려는 감염체 한 마리를 개머리판으로 후렸다.
재빨리 올라올 수 있는 사다리를 부숴 3층짜리 초소에서 농성할 생각이었다.
“안돼!”
하지만 놈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둥을 타고 올라와 그 둘은 향해 달려들었다.
아직 재장전을 끝내지 못한 피터는 달려드는 감염체 앞에 얼어붙고 말았다.
끼이이이익!
감염체는 흉측한 아가리를 쩍 벌리고 그대로 목을 물어뜯으며 살점을 씹었다.
아니, 씹으려고 했다.
타앙!
그 순간 저 멀리서부터 날아온 총알이 감염체의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펑! 하고 터지는 뇌수와 함께 초소로 달려들던 감염체들은 갑자기 멈춰 섰다.
끼이이익!
이젠 본능밖에 남지 않은 놈들이 무려 두려움이라는 걸 느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다 결국 싸우기를 포기했는지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감염체가 도망친다고? 피터와 리암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데어 필드 마을이 어디입니까?”
그 순간, 장벽 너머에서 녹색 우비를 쓴 한 동양인 남성이 다가와 길을 물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피터와 리암은 자신도 모르게 마을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저쪽이요.”
“여기가 데어 필드에요.”
모습은 영락없는 관광객인데,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졸지에 그 남성과 눈이 마주친 피터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
1년 넘게 미국을 횡단했던 박범석은 드디어 마지막 목적지인 중서부에 도착했다.
* * *
사실 미국행을 선택한 이유 중에 반은 느긋하게 여행을 즐겨보려는 목적도 있었다.
전쟁도 모두 끝나버린 마당에 뭐 별일이야 있겠냐는 안일한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이었고, 나는 도착 일주일 만에 후회하고 말았다.
‘야 이 개새끼들아!’
그나마 치안이 안정된 미국 동부와는 다르게 중부는 무법 지대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우리가 타고 왔던 차가 털리고 여권마저 잃어버리고 말았겠는가.
1년 동안 잡은 감염체만 수천 마리요, 죽인 약탈자만 정말 수백 명이 넘는다.
특히 김치 통조림을 얻겠다고 난리친 걸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얼마 만에 먹는 음식이냐.”
“쪽팔리게 왜 그래요, 진짜…….”
내가 따뜻한 수프를 먹으며 우우우 감동하자, 엠마가 얼굴을 붉히며 속삭였다.
하지만 체면 따위는 이미 버린 지 오래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빵을 입에 욱여넣었다.
끼익!
덜컹.
그 순간 마을회관 문이 열리더니 우리를 이쪽으로 안내한 목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 뒤에는 산탄총과 둔기를 들고 온 주민들이 우리를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다들 내려놓으세요. 그들을 다시 한번 진정시킨 목사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앉았다.
“다들 외지인은 처음이라 저렇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음식까지 나눠주셨는데요.”
약탈자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처음 보는 외지인을 경계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이를 무릅쓰고 음식을 나눠준 거만으로도 이들의 착한 성향을 엿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피터 녀석이 당신 얼굴을 알아보더군요. 혹시 성함이 박범석 씨 맞으십니까?”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저 뒤에 몰려있던 주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고작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째 더 따가워졌다.
평화로운 마을을 찾아온 위험한 외지인, 그들이 생각하는 건 딱 그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목사는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죠?”
“사람을 좀 찾고 있습니다. 총 스물두 곳을 찾아다녔는데 이곳이 마지막이라서요.”
엠마가 추려낸 리스트를 보면, 할아버지는 이 데어 필드 마을 기념품 상점에서 엽서를 사셨다.
물론 지금은 문을 닫았겠지만, 이곳을 마지막으로 들리셨다는 건 분명했다.
나는 캔자스 그림이 그려져 있는 엽서와 함께 할아버지가 찍힌 사진을 내밀었다.
“혹시 아시는 분이십니까?”
목사는 앞주머니에서 돋보기 안경을 꺼내 할아버지 사진을 유심히 살폈다.
“모르겠습니다.”
“아…….”
“그런데 이 배경은 익숙하군요.”
배경이 익숙하다? 인물에만 집중하느라 그 뒤에 보이는 배경은 살펴보지 못했다.
내가 깜짝 놀라자 목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인물 뒤에 보이는 언덕을 가리켰다.
“마을 서쪽으로 가면 보이는 언덕 중 하나입니다. 근처에 목장이 몇 개 있었는데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드디어 찾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에 엠마는 진정하라는 듯 손을 꼭 잡아주며 나를 대신해서 길을 물었다.
“저희가 찾는 곳이 맞는 것 같네요. 혹시 가는 길만이라도 알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건 조금…….”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아뇨, 알려드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마을 서쪽으로 가는 길이 막혔거든요.”
“예? 어째서죠?”
엠마가 그 이유를 묻자, 목사는 곧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한 반년 전부턴가 감염체들이 강 하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단 급한 대로 장벽만 세우고 교대로 감시하고 있습니다.”
축축하고 습한 것을 좋아하는 놈들답게 물이 풍부한 강 하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하필 언덕으로 갈 수 있는 다리가 그 강을 지나야만 통과할 수 있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니. 목사는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기만 처리하면 되겠네요.”
“예?”
“놈들 말입니다. 죽이면 되잖습니까.”
아니, 감염체를 처리하는 게 그렇게 간단했으면 우리가 하지 왜 이러고 있겠냐.
목사는 너무나 쉽게만 말하는 우리를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하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깨끗하게 비운 식기를 잘 정리하고 짐을 챙겼다.
엠마 또한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주섬주섬 남은 빵을 챙겨 뒤따라오려고 했다.
“잠, 잠시만요!”
그 순간 목사와 웅성거리던 주민들은 나가려는 우리를 황급히 막아섰다.
“당신들 미쳤습니까?”
“놈들이 따라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게 바로 문화 차이인가? 강릉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반응이라 무척 신선했다.
나는 뭐라 설명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아는 영어 단어를 총동원했다.
“제가 이런 거 전문입니다.”
“예?”
“으음…… 혹시 세스코 아세요?”
주민들의 표정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어휴, 멍청이!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엠마가 결국 내 등짝을 강하게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