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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80화 (완결) (180/180)

<180화>

주민들의 극구 만류로 어쩔 수 없이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다행히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좋았고, 바람 또한 선선하게 불고 있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과 푹신한 침대에서 잠들어 그런지 컨디션 또한 최상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시끄러운 불청객 한 명이 조용한 여행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네? 다음은요?”

초소에서 우연히 만난 피터라는 마을 청년이 언덕까지 길 안내를 자처했다.

물론 이를 걱정하고 따라온 교회 목사가 덩달아 함께하게 된 건 덤이었다.

한참 옆에서 떠들던 피터는 인상을 쓴 목사에게 결국 제지당하고 말았다.

“그만해라, 피터. 손님한테 실례잖니.”

“조, 조금만 더요.”

자신을 오랜 팬이자, 다큐멘터리를 수백 번씩이나 돌려본 전문가라 소개한 녀석이다.

이제 겨우 한 시간 걸어왔을 뿐인데 정말이지 엄청나게 많은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미안해하는 목사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피터와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변이종이 나온 부분이요!”

넌지시 전해들은 바로는 감염체 사태 당시에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잃었다고 했다.

녀석이 가지는 관심은 어쩌면 그 결핍에서 오는 반사적인 행동일지도 몰랐다.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는 정말 오랜만에 이야기보따리를 털어놨다.

한참을 떠들며 걷고 있는데 옆에서 따라오던 목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이렇게 가도 괜찮을까요? 총이 있다고는 해도 우린 고작 넷이지 않습니까.”

피터와 목사 둘 다 22구경짜리 단발 라이플 소총으로 가볍게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한 건 둘 다 마찬가지인지 걷고 있는 모양새가 어째 많이 이상했다.

그만큼 평범한 민간인에게 있어 감염체는 무척이나 위협적이고 무서운 존재였다.

“두 분은 길만 안내해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어차피 감염체를 직접 처리하는 건 나나 이쪽에 있는 엠마가 될 것이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목사를 최대한 안심시키고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에너지 넘치는 피터와 함께 있어서 그런지 오늘은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웠다.

“저쪽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시가지에서 벗어나 마을 외곽에 도착했다.

나는 엠마에게서 고배율 망원경을 받아 목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버려진 트레일러와 함께 폐차들이 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또 그 사이에는 더러운 오물더미와 함께 수많은 감염체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둥지는 아닌 것 같고, 인간의 흔적을 쫓다가 자연스럽게 모인 무리로 보였다.

“아예 길을 막고 있군요.”

“네. 저희도 정말 골치가 아픕니다.”

최대한 피해서 가면 좋겠지만, 놈들이 유일한 다리를 점거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빠르게 판단을 끝낸 나는 망원경을 집어넣고 가방 속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철컥!

그러자 엠마 또한 익숙하다는 듯 소총을 꺼내 탄알집을 확인하고 재장전했다.

하루에도 두어 번씩 하는 일이니 굳이 세부적인 작전을 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와 엠마는 눈을 마주치는 것을 끝으로 각자 할 일을 위해 흩어지려고 했다.

“저, 저도 도울게요!”

그런데 그 순간, 머뭇거리던 피터가 갑자기 총을 장전하고 후다닥 달려왔다.

“피터!”

이에 기겁한 목사는 황급히 앞을 막으며 의욕이 앞서는 녀석을 제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피터는 생각보다 그럴싸한 말로 나와 엠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제가 도망치면서 시선이라도 끌어드릴게요. 두 명보다는 세 명이 낫잖아요. 네?”

“녀석아! 위험한 일이라고 몇 번을 말해!”

“저놈들 때문에 반 년째 강이 오염되고 있어요! 그냥 남 일이 아니라고요, 목사님!”

서쪽 다리를 점거한 감염체로 인해 마을의 유일한 식수원인 강이 오염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나설 용기가 없어 벌써 반 년째 방치만 하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던 목사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역시 그런 사정이 있었나.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재빨리 피터의 총을 빼앗았다.

“침착해.”

“아……!”

“안전장치를 안 걸어뒀잖아.”

평소 관리를 잘했는지 약실과 노리쇠 모두 깨끗하고 개머리판은 기름기가 돌았다.

빠르게 기능 점검을 끝낸 총을 피터에게 다시 돌려주며 바로 앞 장벽을 가리켰다.

“네가 해줄 일이 있어.”

“정, 정말요?”

“저기 장벽 보이지? 저 위에서 내 뒤를 엄호해주면 좋겠어. 어때, 할 수 있을까?”

“네! 저만 믿으세요!”

사실 22구경짜리 라이플로는 감염체를 죽일만한 충분한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굳이 엄호를 맡기는 건 피터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부분이 컸다.

끓어오르는 혈기, 감염체를 향한 증오, 모두 내가 젊은 시절 겪었던 일이니까.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배려를 눈치 챈 목사는 남몰래 고개를 숙이며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물론 그걸 알 리가 없던 피터는 장벽으로 향하는 엠마를 헐레벌떡 따라갔다.

‘귀엽네.’

그 뒷모습을 웃으면서 지켜보던 나는 곧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감염체가 인간의 체취를 맡았는지 기괴한 비명을 흘리며 하나둘 다가오고 있었다.

철컥!

그대로 장벽을 넘은 나는 권총 그립을 가볍게 잡은 뒤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탕!

이젠 감염체를 쏴 죽인다는 행위는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규칙적으로 호흡을 내쉬며 리듬감 있게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한 발은 머리, 또 한 발은 머리에 명중했다. 미친 듯이 달려오던 감염체는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폐차 뒤에 숨으려고 했다.

탕!

하지만 저격 포인트에서 대기하고 있던 엠마가 그런 놈들을 노려 총을 쐈다.

타앙! 탕!

이에 함께 있던 피터와 목사도 열심히 방아쇠를 당겨 나를 엄호해주었다.

피할 각이 없는 절묘한 포지션 앞에 감염체는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사이 나는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들어 냅다 토마호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직!

날카로운 날이 머리통을 쪼갤 때마다 호쾌한 소리와 함께 핏물이 터져 올랐다.

볼 때마다 지겹다고 느끼는 놈들인데, 이 손맛 하나만큼은 정말 짜릿하기 그지없다.

끼이이익!

탕!

도끼로 찍고, 총으로 쏘고, 급할 때는 군화로 내려찍어 하나둘 도살해버렸다.

순식간에 반절 넘게 죽어버린 놈들은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군락이 사라진 이상, 감염체는 걸어 다니는 고깃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우와아아아!

장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피터가 환호성을 지르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저 몸풀기에 불과했던 싸움이 녀석에게는 무척 치열한 전투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찌릿!

“……?”

그런데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왼쪽 눈 흉터가 찌르르 울려왔다.

나는 재빨리 권총을 장전한 뒤 감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총구를 돌렸다.

철컥!

오물더미가 쌓여있던 트레일러 안에서 흉측하게 생긴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무언가는 다름 아닌, 피부가 녹아내리고 관절이 뒤로 꺾인 감염체 변이종이었다.

끼기긱, 끼익!

보통 변이종은 군락이 사라지면 함께 소멸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살아있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겨 악취를 풍기는 놈을 사살하려 했다.

끼이이이익!

하지만 놈은 이상하게도 분노가 아닌 두려움을 느끼며 장벽 쪽으로 달려갔다.

미친! 깜짝 놀란 나는 그 뒤를 빠르게 뛰어가며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피해요!”

처음부터 마을을 노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뒤로 도망치려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건 변이종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마을 장벽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으, 으아아악!”

졸지에 표적이 되어버린 목사는 피터를 감싸려다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엠마가 돕기에는 너무 늦었다. 변이종은 흉측한 아가리를 벌려 사냥감을 잡으려 했다.

“이익!”

그런데 그 순간, 함께 있던 피터가 그 앞을 가로막으며 냅다 총을 발사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자기보다 10배는 큰 변이종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었다.

탁!

좋아, 시간을 벌었다. 나는 피터가 시선을 끄는 사이 장벽을 딛고 뛰어올랐다.

순간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모든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끼익? 심상치 않은 존재감을 읽은 변이종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잘했다, 꼬마야.”

피터와 눈을 마주친 나는 그대로 토마호크를 들어 올려 힘껏 아래로 내려찍었다.

서걱!

동시에 장벽을 넘었던 변이종의 목이 잘려 나가며 머리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나는 깔끔한 착지를 마지막으로 피로 물든 토마호크를 호쾌하게 털어냈다.

이 정도면 화려한 은퇴 경기 아닐까?

목사는 어느새 손뼉을 짝짝 치고 있었다.

* * *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감염체 놈들을 처리했다.

깔끔하게 시체까지 처리한 우리는 그대로 다리를 건너 목적지인 언덕으로 향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냥 TV에서 만든 쇼인 줄 알았는데 연출이 아니었군요.”

“하하, 그거 쇼 맞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목숨까지 건졌는걸요.”

다큐멘터리가 워낙에 비현실적이라서 그런가, CG라고 믿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중에 한 명이었던 목사는 이젠 진짜 믿는다는 듯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반대로 가장 신이 나 있어야 할 피터는 이상하게 넋이 나가 있었다.

역시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나? 이럴 줄 알았으면 안전한 곳에 둘 걸 그랬다.

나는 고민이 많아 보이는 녀석을 위로해줄까 하다가, 일단은 내버려 두었다.

“저기 보이네요.”

그렇게 한참을 걸어 마을과 5㎞ 정도 떨어진 외곽 지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한참 주변을 둘러보던 목사는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엠마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언덕을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쏴아아아-.

바람이 분다. 계절을 따라 자라난 녹색 풀들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인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그 풍경 아래, 한 조그마한 집이 언덕 위를 지키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누군가와 사진을 찍었던 광활한 풍경, 이곳이 마지막 종착지가 분명했다.

나는 알 수 없는 떨림을 느끼며 언덕 위의 집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다.

“저, 저기요!”

그런데 그 순간,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피터가 황급히 달려와 나를 붙잡았다.

“도대체 왜 은퇴하시는 거예요? 아저씨는 영웅이잖아요! 영웅은 사라지면 안 돼요!”

“피터?”

“저도 당신처럼 멋지게 싸우고 싶어요! 가르쳐주세요! 그럼 부모님도 분명……!”

그동안 참고 또 참았던 울분이 터졌는지 피터는 횡설수설 다급히 외쳤다.

그것도 잠시, 녀석의 머리 위로 손을 툭 올려주자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글쎄.”

다큐멘터리로 봤던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위대한 영웅처럼 비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낯간지러운 단어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영웅들 곁에서 싸우기는 했어.”

“네?”

“대단한 건 그 사람들이었지.”

진짜 영웅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묵묵히 제자리를 지켰던 이들이다.

나는 영웅으로 기억된 수많은 이들을 떠올리며 토마호크를 꺼내 들었다.

항상 적들의 피를 묻혀왔던 녀석은 이제 드디어 날이 무뎌져 녹슬어 있었다.

“내 싸움은 이제 여기까지야.”

나는 오랜 시간 신세 진 토마호크를 영웅이 되고 싶다던 피터에게 넘겨주었다.

오늘 이 여정을 마지막으로, 무기를 드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기도하며 말이다.

바람이 분다.

옆에서 조용히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엠마가 조심스럽게 내 등을 앞으로 밀어줬다.

“가봐요.”

나는 할아버지 사진을 꺼내 풀들이 흔들리는 언덕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마침 햇살이 드리우며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4월 19일, 오늘을 기념하며.]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사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고개를 들자 묵묵한 먼지와 함께 퀴퀴한 곰팡내가 가장 먼저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집안에는 알 수 없는 온기와 따뜻한 푸근함이 감돌고 있었다.

익숙하다.

할아버지 집에서 느꼈던 그 향기와 분위기가 이곳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먼지가 쌓여있는 커튼을 옆으로 젖혔다.

펄럭!

서재에는 책이 가득했다. 또 곳곳에 액자와 함께 수없이 많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림, 엽서, 세계를 여행하며 얻어온 기념품들은 마치 박물관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책을 꺼내듯 할아버지가 남긴 사진과 엽서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인생.’

수많은 인연을 만나고 헤어졌다. 또 수많은 지역을 방문하고 아쉬운 이별을 남겼다.

기쁨, 슬픔, 방황, 교훈,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할아버지는 삶을 배우셨다.

미래 일기는 애초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내게 남기고 싶었던 건 글로는 다 쓰지 못할, 일기장 하나로는 다 담을 수 없었던 인생이라는 광활한 초원이었다.

‘찾았다.’

서재 끝자락에는 유일하게 비어있는 액자 하나가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까먹고 챙기지 못한 마지막 사진을 꺼내 그 액자에 끼워 넣었다.

드디어 퍼즐이 맞춰줬다.

그 퍼즐은 처음부터 답이 없었던, 앞으로 계속 채워 나가야 할 삶이라는 일기였다.

탁.

이제는 떠날 시간이다.

나는 강릉에서 가져온 또 다른 사진을 서재 위에 올려뒀다.

그 사진에는 나와 함께 했던 모든 동료가 행복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친구, 가족, 내 고향 강릉.

언젠가는 떠올릴 지난날을 추억하며.

.

.

.

사각, 사각, 사각.

[그동안 겪은 고통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후회는 모두 굽이진 길 아래 묻었으며 지워지지 않는 흉터는 더 이상 어루만지지 않는다. 상속자는 삶을 뒤돌아보는 것을 끝으로 길고 길었던 이 여정을 마무리했다.]

[박범석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도 계속 걸어갈 것이며 또 인생을 긴 외전으로 채우려 한다. ‘우리’는 이제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또 다른 책을 서재에서 꺼낼 차례다. 앞으로 무엇을 읽든 그 책이 당신의 이야기가 될 테니까.]

[To Be Continued.]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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