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단 신입이 너무 잘함 5화
3장 물러설 수 없다(1)
시간은 흘렀다.
[슈퍼스타 베이스볼]에서 일하게 된 지도 어느덧 한 달.
김지섭은 자신의 ‘사수’ 한민욱 코치와 함께 출근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의 집이 같은 방향이었던 것이다.
“어제 맛있는 것 좀 먹었어?”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레슨장으로 향하는 길.
한민욱 코치가 물었다.
“예?”
“어제 월급날이었잖아.”
한 코치는 백팩을 고쳐 맸다.
“대표님한테 보너스도 두둑하게 받았을 테고…….”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부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입사 한 달 만에 상담실에 쌓여 있던 글러브를 죄다 팔아넘긴 후배.
지난 몇 달간 배팅장갑 서너 장 판매한 것이 전부인 한 코치로서는 지섭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을 것이다.
“내가 너였으면 당장에 1++등급 한우를 구웠을 것 같은데?”
“저도 마음은 굴뚝같았는데요.”
어쩐지 지섭은 쓸쓸한 미소.
“그냥 가족끼리 치킨 두 마리 사서 먹는 거로 퉁쳤습니다.”
“뭐? 치킨? 겨우?”
“예.”
지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확실히 많이 들어왔는데……. 여기저기 나갈 곳이 한둘이 아니더라고요.”
카드값에, 생활비에, 청약 통장에.
거기다 지섭이 지난 10여 년간 외국을 떠돌면서 생긴 대출금도 적지 않았다.
그동안 부모님이 지원해 주시던 부분을 스스로 해결하다 보니, 그 많던 월급도 움켜쥔 모래처럼 우수수 빠져나가 버렸던 것.
물론 이런 구체적인 사정까지 밝힌 건 아니었지만, 한 코치는 ‘알 만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뭐, 은퇴한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일이지.”
“그렇습니까?”
“다들 그렇지 않을까? 현역 때야 돈 문제 같은 건 부모님이나 와이프한테 다 떠맡기니까…….”
입맛을 쩝 다시는 한 코치.
“은퇴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거지. 아, 내 앞으로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갔었구나, 이제는 진짜 허리띠 졸라매면서 살아야겠다.”
본인이 은퇴를 결심하던 시절이 떠올랐는지, 한동안 묵묵히 걸음을 재촉하던 한 코치.
저기 멀리 [슈퍼스타 베이스볼] 간판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그가 지섭을 돌아보며 말했다.
“첫 월급이 털렸다고 너무 상심하지는 마. 이제 곧 10월이니까.”
“예?”
“10월, 가을, 야구 하기 딱 좋은 계절.”
한 코치가 말을 이었다.
“사회인 야구 리그 결승전도 열리고, 단기 리그 같은 것도 열리고, 사내 야구 대회도 열릴 것이고…….”
“아하.”
대회가 많아지면 레슨장 회원들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
레슨장 회원들이 많아지면 그중에서 개인 교습을 신청하는 이도 나오고, 용병 게임을 제안하는 이도 나온다.
개인 교습과 용병 게임은 사회인 야구 코치들의 쏠쏠한 수입원.
“사회인 야구 업계의 한 해 마지막 성수기가 딱 10월이야. 겨울이 되면 아무래도 야구 하는 사람이 줄어드니까.”
그러니까 바짝 벌어두자고.
한 코치가 씨익 웃어 보였다.
“바짝 벌어서 월말에는 같이 한우도 좀 씹고 해야지.”
“흐흐, 한우 되게 좋아하시네요, 코치님.”
“뭔 소리야, 세상에 한우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그렇게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면서 ‘끼이익’ 레슨장 낡은 유리문을 열어젖히던 때였다.
“…….음?”
평소였다면 공 던지는 소리, 받는 소리, 때리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을 [슈퍼스타 베이스볼]이었다.
이날은 수요일.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레슨장 개방의 날’이라, 레슨 시작 전에 회원들이 와서 자유롭게 연습을 할 수 있었기 때문.
그런데 이날은 어찌 된 영문인지, 레슨장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
“…….”
회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십수 명의 아저씨들이 득시글득시글.
그런데 그 아저씨들이 모두 상담실 주변에 둥그렇게 서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는 지섭에게도 낯익은 남자가 하나 있었다.
“최 사장님.”
지섭에게서 ‘타보타 한정판’ 글러브를 사서 갔던 최경민 사장.
“오, 김 코치! 한 코치도 왔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최 사장.
지섭은 최 사장에게 물었다.
“레슨장에 무슨 일 생겼습니까? 왜 다들 연습 안 하시고 여기서…….”
“아휴, 지금 야구가 대수야?”
저기, 저어기.
최 사장은 손가락을 들어 상담실 안을 가리켰다.
“저기?”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슈퍼스타 베이스볼]의 오수만 대표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면서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는 모습.
그런 오 대표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은-
‘……노인?’
백발의 노인이었다.
나이는 일흔이나 되었을까.
포마드를 발라 빳빳하게 넘긴 헤어스타일에 쓰리피스 정장을 갖추어 입은 노인이 살벌한 시선으로 오 대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노인의 비서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하나 더 있는 듯했지만,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았고.
지섭은 최 사장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저 사람?”
“응?!”
바로 이 순간, 지섭은 주변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아니, 김 코치는 저 사람 몰라?”
“요즘은 좀 뜸하긴 하지만……. 옛날엔 신문에 많이 나왔던 사람인데?”
“에이, 신문에만 나왔나? 예전에 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도 나왔었다고.”
“아냐, 주인공은 아니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으로 나왔을걸? 그래서 작가한테 소송을 거니 어쩌니 말도 많았고.”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아저씨들.
지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라…… 마? 그럼 배우입니까?”
“와아, 진짜 모르나 보네. 갑자기 김 코치랑 세대 차이가 확 느껴진다.”
신기한 듯이 지섭을 바라보던 최 사장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KH그룹의 박홍주 부회장이야.”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이름보다는 별명이 더 유명했던 양반이지.”
“별명이 뭔데요?”
“사할린.”
최 사장이 말했다.
“사할린 박, 박홍주.”
* * *
지섭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레슨장 아저씨들 사이에선 꽤나 유명인사인 듯했다.
“90년대 초반이었던가? KH그룹이 망하니 마니 했던 시절이 있었어. 사업 파트너였던 러시아 기업들이 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뤄서.”
최 사장의 증언이었다.
“주가는 뚝뚝 떨어지고, 회사 건물을 판다는 둥, 회장이 집을 판다는 둥, 여러모로 흉흉했는데……. 글쎄 저 박홍주라는 양반이 일거에 문제를 해결했다지 뭐야?”
“어떻게요?”
“비행기 타고 사할린으로 가서…….”
최 사장은 마치 무림 고수의 일화를 전해주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마침 그 일대를 순방하고 있던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는 거야.”
“에이, 설마요.”
“진짜라니까? 신문에도 나왔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난 박홍주 당시 상무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러시아가 대국이라고 하더니, 지금 보니 소국도 이런 소국이 없다.
-고작 돈 몇 푼에 이딴 식으로 신의를 저버린다면, 누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겠는가.
-우리 KH는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백 년이 걸리든, 천 년이 걸리든, 우리는 당신들에게 쓴맛을 보여주고 말 것이다.
좋게 말하면 패기 넘치는 일갈이고, 나쁘게 말하면 섶을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짓.
그런데 이런 과감한 접근이 의외로 러시아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그날 밤, 박홍주와의 독대를 마친 러시아 대통령은 즉각적인 문제 해결을 지시했고, 그 결과 KH그룹은 창립 이래 최대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는 이야기.
“KH그룹의 프로야구단이 [KH 캐논즈]잖아? 사실 그 이름도 저 양반 때문에 나온 거야. 그때 러시아에서 물품 대금 대신 최첨단 무기를 잔뜩 받아왔거든.”
“그래서 별명이 사할린 박입니까?”
“그렇지.”
최 사장은 ‘이제 알겠지?’ 하는 표정이었지만, 지섭은 더 혼란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그렇게 대단하신 양반이…….”
지섭은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우리 레슨장에는 무슨 일로 오셨답니까?”
“그, 글쎄?”
최 사장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는 눈치.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지섭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사할린 박’의 [슈퍼스타 베이스볼] 방문 사유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대체 결론이 뭐야?!”
러시아 대통령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던 바로 그 목소리가 상담실 바깥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던 것이다.
“나한테는 야구를 가르쳐 줄 수 없다…… 그 말인가? 지금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야?!”
* * *
바로 그 순간.
상담실 바깥에 서 있던 아저씨들의 머리 위엔 무수히 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야구???”
“지금 야구라고 한 거 맞지??”
“사할린 박이 야구를 한다고? 나이 칠순이 넘은 노인네가?”
“아니, 야구를 해도 왜 여기서 해? 사할린 박이라면 현역 프로 선수한테서 배울 수도 있을 텐데?”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이해되는 부분이 없는 상황.
아저씨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꾸물꾸물 상담실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담실 벽에 귀를 대서라도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모양.
그러나 그런 그들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콰앙!
아저씨들이 귀를 대기가 무섭게, ‘사할린 박’ 박홍주 부회장이 상담실 문을 박차고 나왔던 것이다.
“젠장, 괜한 시간만 낭비했군!”
“죄,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박 부회장의 뒤를 따라 나온 것은 [슈퍼스타 베이스볼]의 오수만 대표였다.
“제 실수입니다. 제가 좀 더 정확히 말씀드렸다면, 이렇게 헛걸음하실 일이 없었을 텐데.”
오 대표는 쩔쩔매고 있었다.
“변명으로 들리시겠지만, 저는 부회장님께서 많아야 60대 중반이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일흔을 넘기셨을 줄은…….”
오 대표는 나름 최선을 다해 변명을 했지만,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박홍주 부회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만 갔다.
“아니, 도대체가!”
결국 또 한 번의 사자후를 터뜨리고 마는 박홍주 부회장.
“내 나이쯤은 인터넷에 두드리면 다 나와! 사업한다는 사람이 그 정도 정보도 안 알아보고 혓바닥을 놀렸다는 게 말이나 되나!”
오 대표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그리고 60대는 받아줄 수 있는데 70대는 못 받아주겠다? 그런 쓰레기 같은 규정은 누가 만든 건가? 자네들은 이런 식으로 사사건건 사람을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해야 속이 시원한 건가? 그런 거야?”
박홍주 부회장의 분노는 주변에 서 있던 아저씨들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어이, 거기! 자네가 한번 말해보게! 자네가 보기에도 내가 야구를 하면 안 될 사람인가? 타석에 서면 곧 뒈져 버릴 약골이냐고!”
박홍주 부회장이 소싯적에 러시아 대통령과 담판을 지었다는 소문은 아무래도 사실인 듯했다.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자, 아무 잘못 없는 아저씨들마저 ‘깨갱’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으니까.
그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설 생각을 못 한 채, 그저 ‘사할린 박’의 분노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는 분위기.
“…….”
그러나 딱 한 사람.
지섭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섭은 ‘사할린 박’ 박홍주 부회장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지섭에게 들려온 속마음.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도, 서울 시내 레슨장을 이 잡듯 뒤져도, 내게 야구를 가르쳐 줄 코치 한 사람을 구할 수 없다니…….]
[사실상 이 레슨장이 마지막이었는데, 여기서도 코치를 구할 수 없다면……. 젠장할, 이젠 어떡한다?]
화가 잔뜩 난 듯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꽤나 깊은 고민에 잠겨 있는 속마음.
딱 여기까지 파악한 지섭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쫙 폈다.
소리를 내어 저 노인네를 불러볼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지금은 딱 이 정도 어필이 적당하다는 생각.
그리고,
지섭의 ‘어필’은 성공했다.
“어이, 거기!”
‘사할린 박’ 박홍주 부회장이 손가락을 들어 지섭을 가리켰던 것이다.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사람을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