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단 신입이 너무 잘함 37화
11장 믿을 수 있는가(4)
야구 규정상, 투수는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게 되어 있다.
마운드의 높이는 대략 10인치, 25.4㎝ 정도.
중계 화면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지만, 실제로 가서 서 보면 그 10인치라는 높이가 꽤 된다.
우리 팀 포수도 내려다보이고, 상대 팀 타자도 내려다보이고, 당연하겠지만 스트라이크와 볼을 판단하는 심판도 내려다보이고.
그런 ‘작업 환경’ 속에서 일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투수라는 족속들은 기본적으로 싸가지가 없다.
콧대가 높고, 자존심도 강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는 거 싫어하고.
독립리그에서 만났던 투수들도 대부분 그랬는데,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80승을 거둔 투수라면 더 볼 것도 없지 않을까.
그래서 지섭이 내린 결론이었다.
“어쭙잖은 협박은 통하지 않을 겁니다.”
KH 캐논즈의 새로운 외국인 투수, 지미 모리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가 위에다 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방송 자체는 그만두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본인에게 간섭을 했다는 이유로 더 기상천외하게 농땡이를 칠 가능성이 높지요.”
“……그러고도 남을 놈이긴 하지.”
알겠다.
고창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1월 28일부터 2월 8일 사이…… 지미 모리스의 행적에 대해 한번 조사해 볼게.”
스프링 캠프 기간이라 언론 기사도 쏟아져 나오고, KH 캐논즈 인트라넷에는 매일 훈련 일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쪽을 살피면 어떻게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게 고창덕의 의견이었다.
“다만…….”
입맛을 쩝 다시는 고창덕.
“그렇게 되면 지미 모리스의 통역 업무는 지섭이 너 혼자서 도맡아 해야 할 텐데…… 그건 괜찮겠냐?”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지섭이 어깨를 ‘으쓱’했다.
“새벽 3, 4시까지 방송을 하다가 잠드는 녀석입니다. 낮에는 졸려서 정신없이 해롱해롱할 텐데, 남들이 자기한테 뭐라고 하든 귀에나 들어오겠습니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지섭.
“제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통역을 해도, 그 자식은 ‘아아, 그러냐’ 고개 한 번 끄덕이고 말걸요?”
“……하긴.”
고창덕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그렇다?”
* * *
지섭의 예상은 이번에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8시, 호텔 2층 식당에서 다시 마주한 지미 모리스.
“뭐야, 오늘은 너 혼자냐?”
과장 살짝 보태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드리운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지섭을 보자마자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가득.
그러나 그것도 잠시, 따뜻한 아침 식사가 뱃속에 들어가자 지미 모리스는 금세 꾸벅꾸벅 ‘병든 닭’ 모드가 되어버렸으니까.
“모리스 씨, 어젯밤에 제가 모리스 씨의 방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은…….”
“…….”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모리스 씨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게 되어…….”
“…….”
“……모리스 씨?”
“…….”
“야, 자냐?”
물론 훈련에 전혀 참가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훈련 시작 전 워밍업을 할 때는 나름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었고, 그라운드에서 감독이 미팅을 주관할 때도 게슴츠레하게나마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간단한 컨디셔닝 훈련이 끝나고, KH 홈구장을 방문한 한국 프로야구팀과의 연습경기 준비가 시작될 즈음엔-
“……드르렁.”
지미 모리스는 거의 숙면 모드.
평범한 선수였다면 누구라도 하나 나서서 불호령을 내렸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미 모리스는 메이저리그 통산 86승의 베테랑 투수.
코치들은 잔소리를 퍼붓기보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혀를 끌끌 차는 모습이었다.
“아이고, 저 녀석…… 어젯밤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양이로구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부상이 올 수도 있는데…… 큰일은 큰일이다, 정말.”
코치들이 굳이 깨우려 들지 않으니, 선수들도 ‘쟤는 원래 저런가 보다’하고 내버려 두는 분위기.
덕분에 지섭은 ‘전담 통역’이라는 역할에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한가로운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따아악!
3회 초였던가, 4회 초였던가.
이날 상대팀의 4번 타자가 캐논즈 선발 투수의 공을 받아쳐서 좌중간을 완전히 갈라놓는 2루타를 때려내던 그때였다.
“젠장, 이 타이밍에 변화구 승부를 들어가면 뭐 어쩌자는 거야. 상대 타자가 빠른 공 타이밍에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하여튼 이 팀 포수들의 볼 배합은 정말 못 봐주겠군. 저런 실력으로 어떻게 연봉을 받아가고 있는 건지…….”
지미 모리스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까지 흘리면서 자고 있던 녀석이 어느 순간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는지, 지섭을 돌아보면서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지미 모리스.
“왜?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아닙니다.”
지섭이 손을 내젓자, 가볍게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돌리는 지미 모리스.
여전히 거만하고 싸가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본 결과 들려온 속마음은 조금 묘했다.
[이 자식 이거, 투수 출신이라기에 말이 좀 통하려나 기대를 했더니…… 역시 이놈도 별생각 없는 놈이었나.]
이놈도 별생각 없는 놈이었나.
밤을 세워 인터넷 방송이나 하다 온 투수치고는 꽤 뻔뻔한 속마음을 품고 있었다.
‘뭐야,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지미 모리스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지섭.
다음 순간, 지섭은 고창덕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하나의 실마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따분하군.]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이럴 줄 알았으면 에드윈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에드윈.
에드윈이라.
* * *
지미 모리스의 속마음에 떠오른 ‘에드윈’이라는 이름.
여차하면 모리스 본인에게 ‘그게 누구냐’고 물어볼 생각까지 하고 있던 지섭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에드윈, 에드윈 곤잘레스.”
그날 저녁, 하루 종일 모리스의 행적을 조사하던 고창덕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던 것이다.
“지미 모리스의 개인 인스트럭터 자격으로 캐논즈에 합류했던 사람인데…… 지섭이 네가 말한 그 시점에 미국으로 돌아갔다더라고.”
“개인 인스트럭터라고요?”
“응.”
고창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제업무팀 선배들의 말로는 모리스의 공을 받아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대충 그런 일을 하던 사람이라고 하던데.”
“하던데?”
“내가 조사해 보니까, 단순히 ‘인스트럭터’라고 하기에는 좀 더 뭐랄까…… 깊은 관계인 것 같더라고.”
고등학교 동창이었단다.
고창덕은 쓴웃음을 지었다.
“모리스가 마이너리거였을 때는 오프 시즌 때 훈련을 도와주는 정도였다가…… 그놈이 메이저리거가 되면서부터는 그놈 곁에서 온갖 잡다한 일을 다 돌봐줬던 모양이야.”
훈련을 돕는 건 기본.
모리스를 대신해서 에이전트와의 협상에 나서기도 했단다.
여기에 세금 문제, 숙소 문제, 팀메이트들과의 트러블부터 여자관계에 이르기까지.
표면적인 직함은 ‘개인 인스트럭터’였지만, 실제로는 메이저리거 지미 모리스의 ‘엄마’와도 같은 사람이었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엄마 같은 친구였다…….”
지섭은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 호흡을 맞춰온 친구.
야구만 아는 멍청이를 사람 노릇 하도록 도와주었던 친구.
그런 친구가 하필이면 낯선 한국 프로팀에 합류했을 때 곁을 떠나버렸다.
‘지미 모리스가 뜬금없이 방송을 재개했던 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어졌기 때문인가?’
말도 잘 안 통하는 한국의 팀 동료보다는 인터넷 화면 너머의 ‘시청자’들이 모리스에겐 더 다정한 친구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낯선 환경에서 오는 불안감도, 친구가 곁에 없다는 외로움도, 방송을 하다 보면 조금 잊히기도 했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지섭은 살짝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미 모리스는 그 친구를 왜 미국으로 돌려보냈답니까? 그 친구의 도움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지금 아닌가요?”
“아니, 모리스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게…….”
고창덕이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한 번 훑었다.
“그 에드윈이라는 친구한테 미국 현지에서 좋은 제안이 들어왔다는 것 같아.”
“좋은 제안?”
“지섭이 너도 알지 않아? 미국에는 에이전트 회사에서 운영하는 트레이닝 센터 같은 곳이 있잖아.”
“제법 있죠.”
독립리그를 전전하던 지섭은 꿈도 꿀 수 없는 곳이었지만, 유명한 메이저리거들은 그런 트레이닝 센터에서 훈련을 하곤 한다.
“미국에서도 제법 규모 있는 트레이닝 센터에서…… 에드윈에게 멘탈 부문 코치 자리를 제안해 왔대.”
“…….”
“이렇게 되면 모리스도 말리기가 좀 애매했지 않을까?”
고창덕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트레이닝 센터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 장차 메이저리그 구단에 들어가는 것도 꿈은 아니니까.”
“모리스 그 자식도 참…… 운이 없는 놈이네요.”
지섭의 감상이었다.
“하필이면 자기가 한국 프로팀에 합류하는 타이밍에, 친구한테 그런 제안이 들어올 건 또 뭐랍니까.”
“뭐 그렇긴 한데…….”
고창덕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이제 지미 모리스의 컨디션을 어떻게 끌어올리느냐는 것 아니겠냐?”
고창덕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지만, 이를 대하는 지섭의 얼굴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방법이야 나와 있는 것 아닙니까?”
“나와 있다?”
“예.”
고개를 끄덕이는 지섭.
“핵심은 모리스 그놈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새로운 팀이 낯설어서.
새로운 동료들이 어색해서.
조금이라도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을 찾아 헤매다 보니, 기어들어 가게 된 곳이 바로 인터넷 방송.
“그럼…… 모리스한테 적당한 친구 하나 붙여주면 끝나는 거지요.”
“적당한 친구라.”
고창덕이 턱을 쓸었다.
“조건이 꽤 까다롭지 싶은데.”
“그렇습니까?”
“너도 봐서 알잖아. 모리스 그놈.”
고창덕이 손가락을 꼽았다.
“일단 싸가지가 X나 없고.”
“그렇죠.”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맞습니다.”
“게다가, 지섭이 너도 캐치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고창덕이 입맛을 쩝 다셨다.
“모리스 그놈, 야구 못하는 선수는 사람으로도 안 본다고.”
“예, 저도 오늘 겪어보니까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더라고요.”
하지만 말입니다.
지섭의 입가에 묘한 미소 하나가 떠오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서…… 모리스랑 비슷한 녀석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모리스랑 비슷한 녀석?”
“친구는 닮는다고 하니까, 역으로 비슷한 녀석끼리 붙여두면 의외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잠깐만, 너 지금 누굴 말하는…….”
기본적으로 싸가지가 없으면서.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또 야구를 못 하는 선수는 사람으로도 안 보는 몹쓸 인간.
“……아아.”
지섭을 바라보면서 씨익 미소를 짓는 고창덕의 모습.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건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여보세요.
핸드폰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고창덕이 상대방에게 인사를 건넸다.
“응, 그래. 나 창덕이 형인데…….”
고창덕은 지섭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장호 너, 내일 시간 좀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