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단 신입이 너무 잘함-104화 (104/167)

#야구단 신입이 너무 잘함 104화

29장 가을의 문턱에서(1)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갔다.

어느덧 9월 중순.

“…….”

오후 8시 무렵, 그는 시내의 한 칼국수 집에 홀로 앉아 있었다.

“우리 세 명인데……. 자리 있어요?”

“아유, 있지 그럼! 들어와요, 들어와!”

간판도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가게였지만, 이 근방에서는 제법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었나 보다.

이미 저녁을 먹기엔 좀 늦은 시각이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물밀듯이 들어오는 손님들.

그러다 보니 혼자서 4인 좌석을 차지하고 앉은 지섭은 자꾸만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삼촌! 어떻게…… 이제 주문 받아주면 되나?”

“아, 죄송합니다. 아직 일행들이 도착하지 않아서요.”

“그래? 괜찮아, 괜찮아. 기다렸다 일행들 오면 같이 시켜요.”

식당 아주머니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갔지만, 지섭은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

잔뜩 조바심을 내며 가게 입구만 계속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을 때, 지섭의 핸드폰이 ‘부르르’하고 울렸다.

-어어, 따오냐?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사할린 박’ 박홍주 부회장이었다.

“어디십니까, 부회장님.”

지섭은 볼멘소리를 냈다.

“저 여기서 벌써 한 시간째입니다! 10분이면 오신다던 분이……. 도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아아, 그게 말이지!

미안하게 되었구나야.

박홍주 부회장은 하나도 안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너랑 같이 밥 먹기가 좀 어렵지 싶다! 여기 노인네들이 저녁 먹고 가라고 바짓가랑이를 붙들어서 말이지…….

“못 오신다는 말씀입니까?”

지섭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럼 미리 말씀을 좀 해주시지 않고…….”

-이놈아, 나라고 별수 있겠냐? 이 노인네들 비위를 맞춰줘야 구단에 광고가 들어오는데?

이날 오후, 지역 향토업체 대표들을 만나러 갔던 박홍주 부회장이었다.

천하의 ‘사할린 박’이라도 광고를 따내기 위해선 지역 업체들과의 관계가 중요했던 것이다.

-네가 이해해라. 지금은 부지런히 벌어들일 타이밍이 아니겠냐.

사할린 박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우리 캐논즈가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한다고 생각해 봐라. 그럼 돈 들어갈 구석이 어디 한둘이냐? 니들 연봉 올려줘야지, 우승 보너스 챙겨줘야지…….

“부회장님, 저희 리그 4위입니다.”

지섭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순위가 확정된다 해도 와일드카드 결정전부터 치러야 하는데……. 한국시리즈 우승을 생각하시는 건 좀 이르지 않습니까?”

-이놈아, 젊은 녀석이 왜 이렇게 패기가 없어? KH 캐논즈에 불가능은 없다! 남자가 한 번 칼을 뽑았으면, 당연히 우승을 목표로 해야지!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박 부회장이 호언장담을 하자, 핸드폰 스피커 너머로 ‘그럼, 그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산 지역 업체 대표들도 사할린 박의 엄청난 기세에 완전히 휘말려 버린 모양새.

다른 일도 아니고, 구단주 대행이 직접 나서서 야구단에 필요한 광고를 끌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한 시간 넘게 기다린 것은 조금 억울했지만, 지섭은 이내 ‘알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는 다음에 뵙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부회장님. 그래도 약주는 조금만 하시고요.”

-그래, 그래!

‘술은 조금만 하라’는 지섭의 당부에, 사할린 박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내 근일 간에 다시 한번 자리를 잡아보마! 우리는 그때 보자고!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그렇게 ‘딸깍’ 끊어지는 전화.

지섭은 약간 기가 빨리는 것을 느끼며 옆자리에 걸어둔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혼자서 4인 좌석을 차지하고 먹는 건 좀 그렇고……. 오늘 저녁은 그냥 다른 곳에서 먹어야 하나?’

한 시간이나 자리를 차지한 건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나을 듯싶었다.

그렇게 가게 주인아주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바로 그 찰나.

“어엇……. 김지섭 씨?”

등 뒤에서 지섭을 부르는 목소리가 하나.

고개를 돌리던 지섭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 차 대리님?”

스카우트 팀 차종민 대리였다.

KH 캐논즈의 자타공인 ‘자동차 덕후’이자, 이번 시즌 충청권역 유망주들을 전담했던 스카우트.

“칼국수 먹으러 오셨구나?”

차종민 대리가 지섭에게로 다가오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 주문 안 하셨으면…… 저랑 같이 식사하시겠습니까?”

지섭이 내심 바라던 이야기였다.

* * *

보글보글보글.

세숫대야를 연상시키는 양푼이 그릇에 한가득 끓여져 나온 칼국수 2인분.

접시와 국자를 들고 각자의 몫을 나누어 담았을 무렵, 지섭이 차종민 대리에게 꺼낸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못 드렸네요.”

“예?”

젓가락으로 면발을 집어 올리다 말고 지섭을 바라보는 차종민 대리.

지섭은 국자로 칼국수 국물을 뜨면서 말을 이었다.

“팀장님께 들었습니다. 차 대리님이 다음 시즌부터는 서울 권역을 담당하게 되었다고요.”

며칠 전, 신인 드래프트가 종료된 직후에 나온 이야기였다.

주요 선수들의 해외 진출로 ‘역대급 유망주 가뭄’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던 이번 신인 드래프트.

많은 팀들이 유망주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었으나, KH 캐논즈만은 좋은 선수를 대거 뽑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었다.

‘다른 팀에서 눈여겨보지 않았던 충청권역……. 그쪽에서 좋은 선수들을 많이 확보했다던가?’

차종민 대리의 활약이었다.

‘선수를 보는 눈’ 하나만큼은 팀 내 최고라는 평가를 들었던 차종민 대리.

그가 완전히 ‘각을 잡고’ 충청권역을 열심히 뛰어다닌 덕분에 얻어낼 수 있었던 성과.

그 성과에 잔뜩 고무된 스카우트 팀장은 다음 시즌부터 차종민 대리를 서울 권역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학교도 많고, 유망주들도 많고……. 서울권역은 스카우트들에겐 황금어장이나 다름없다고 들었습니다.”

지섭이 말을 이었다.

“그런 곳에 투입되셨다는 건……. 대리님이 캐논즈 스카우트 팀의 에이스로 인정받으셨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에이, 에이스는 무슨! 그렇게 비행기 태우지 마십쇼. 어지럽습니다.”

차종민 대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후루룩’ 칼국수 면발을 끌어당겼다.

“서울권역이면 어떻고, 충청권역이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제 연봉은 거기서 거기……. 지금보다 더 좋은 차를 몰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또 그놈의 자동차 타령이로군.

지섭이 속으로 가만히 웃고 있을 때, 차 대리가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뽑은 선수들을 제대로 육성하는 부분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차 대리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기에, 지섭은 그의 얼굴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심성준 선수를 비롯해서……. 이번에 제가 충청권역에서 뽑아 올린 선수들, 진짜 괜찮은 놈들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지섭 씨가 신경 좀 써주세요.”

“제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섭.

“제가 뭘 어떻게…….”

“에이, 또 이러시는구만?”

차종민 대리가 피식 웃었다.

“지난번에 보셨잖아요? 지섭 씨 말 한마디에 다들 홈경기 입장권을 구하느라 난리법석이었는데.”

차 대리도 그중에 하나였다.

“아무나 그런 대우 받을 수 있나요? 사람들한테 인정도 받고, 신뢰도 받아야 가능한 거지.”

“…….”

“그런 지섭 씨가 이번에 뽑은 신인들에 관심을 가져주신다면, 녀석들에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차 대리는 아주 딱 잘라 말했다.

“하다못해 감독님한테 ‘쟤가 좀 열심히 하더라고요’ 한마디를 해주신다거나, 천진우 같은 베테랑에게 ‘쟤 좀 눈여겨봐 주세요’ 한마디 해주신다거나……. 어느 쪽이든 녀석들에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정말 좋은 선수들로 뽑아왔다.

그러니 신경 써서 키워달라.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부탁해 오는 차 대리를 보며, 지섭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많이 바뀌었구나, 차 대리님.’

처음 만났을 때는 선수들의 외제 차를 얻어 타는 것 이외엔 아무 관심이 없었던 ‘월급 루팡’.

그러나 지금은 ‘역대급 유망주 가뭄’ 속에서도 선수를 찾아내고, 그 선수의 성장을 진심으로 바라는 스카우트가 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이 다음 시즌부터는 서울권역을 담당하게 된다…….’

그럼 내년 시즌 드래프트도 충분히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KH 캐논즈에 좋은 유망주들이 잔뜩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을 품으면서 ‘후르륵’ 칼국수 국물을 한 모금 마셔보던 지섭.

“……음?”

그런 지섭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차 대리님.”

“예?”

“옷…… 새로 하나 사셔야겠는데요?”

지섭은 차 대리가 걸치고 있던 후드 티 소매를 가리키며 말했다.

“옷 소매가 다 닳으셨네.”

옷 소매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보풀이 올라와 있지를 않나, 모자 끈이 해져 있지를 않나.

몇 년을 입고 다닌 것인지는 몰라도, 떠나보내야 할 시기가 한참 지난 후드 티인 듯했다.

자동차에만 신경을 쓰지, 입고 다니는 옷에는 별 관심이 없는 차 대리였던 것일까.

“아아, 알고 있습니다. 이게 좀 낡기는 했지.”

별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어 보이는 차 대리.

“사실 새로 하나 사 입을까 하다가……. 그냥 좀 더 버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구단에서 새로운 후드 티를 한 벌씩 나눠줄 테니까요.”

“새로운…… 후드 티?”

“예, 조금 있으면 포스트 시즌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나오겠지요.”

“아아.”

지섭은 그제야 차 대리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가을 야구 진출 기념 후드 티를 말하는 모양이로군.’

가을 야구. 포스트 시즌.

정규 시즌 144경기가 모두 끝나면, 한국시리즈 우승을 향해서 시작되는 단기전 승부.

쌀쌀한 날씨 속에서 진행되는 경기다 보니, 구단에서는 선수들과 구단 직원들에게 새로운 후드 티를 한두 벌씩 제공하는 게 보통이었다.

“다른 팀 스카우트들이 곧잘 입고 오는데……. 나는 그게 좀 부럽더라고요?”

지섭 씨도 받아봐서 알죠?

차 대리가 지섭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말했다.

“우리 스프링 캠프 때 주는 옷은 영 별로잖아. 그런데 포스트 시즌 때 주는 건 다르더라고요. 기모가 들어가서 따뜻하기도 하고, 원단도 좋은 걸 쓰는 건지 보들보들하고…….”

단순히 옷이 좋아서 부러웠던 것은 아니지 싶었다.

그건 차 대리의 두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팀 성적이 좋아야, 그래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해야, 비로소 한 벌 얻어 입을 수 있는 품질 좋은 후드 티.

만년 하위권 팀 KH 캐논즈에서 일해온 차종민 대리에겐 그 후드 티 한 벌도 각별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건 언제 나온답니까?”

우리 후드 티 말이에요.

차종민 대리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물어왔다.

“지금쯤이라면…… 대충 스케줄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은데?”

KH 캐논즈의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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