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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단 신입이 너무 잘함-121화 (121/167)

#야구단 신입이 너무 잘함 121화

33장 스포트라이트(1)

윈터미팅 개최 하루 전.

미국 샌디에이고의 한 호텔.

“…….”

지섭은 긴장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이번 미국 출장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 중의 하나가 지금 달성 직전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에이스’ 지미 모리스의 재계약.

“흐음…….”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조용히 계약서 내용을 읽어나가는 지미 모리스의 모습.

마음에 걸리는 표현이 나오면 옆에 앉은 에이전트에게 물었고, 다시 에이전트는 캐논즈 측 직원에게 해당 내용을 문의해 왔다.

“아아, 그것은…….”

“예, 맞습니다. 그런 의미죠.”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길 대략 10여 분 남짓.

이윽고 지미 모리스가 ‘탁탁’ 계약서를 탁자에 두드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꺼내 드는 한마디.

“괜찮네요.”

지미 모리스가 말했다.

“제가 말씀드린 부분이 거의 다 반영되었네요. 저는 더 이상 요청드릴 내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그렇다면…….”

KH 캐논즈의 서창기 단장이 기대 어린 눈빛을 보내자, 지미 모리스는 ‘옙!’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하겠습니다!”

맞은편에 서 있던 지섭을 향해 솥뚜껑 같은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이는 지미 모리스였다.

“헤이, 지섭! 나 펜 하나만 빌려주겠어?!”

* * *

지미 모리스의 재계약.

사실 예상치 못한 성과였다.

지난 시즌, KH 캐논즈의 에이스로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쳐 보였던 지미 모리스.

당연히 미국 메이저리그 복귀나 일본 프로야구 진출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선수가 1년 연봉 총액 180만 달러라는 ‘저렴한 금액’에 잔류를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지미 모리스 본인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던가? 50만 달러까지는 디스카운트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 같은데?”

계약서 작성과 기념 촬영이 끝난 후, 저녁 식사를 위해 호텔 로비로 내려가면서 듣게 된 한마디였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일본 구단에서 제시한 계약이 2년에 450만 달러 정도였거든.”

둘로 나누면 1년에 225만 달러.

약속대로 45만 달러 ‘디스카운트’를 해주었다는 의미.

그러나 지섭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너를 모르냐. 애초에 넌 일본 프로야구 쪽으로는 크게 관심도 없었던 것 아니었나?”

“…….”

“내가 궁금한 건 미국 쪽이야. 메이저리그 구단의 오퍼는 받아보고 결정한 것인가.”

이때만큼은 KH 캐논즈의 단장 특보로서가 아니라, 야구선수 지미 모리스의 친구로서 묻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독립리그 수준에서 그치긴 했지만, 지섭 역시 한때는 메이저리그를 꿈꾸며 공을 던졌던 사람.

야구선수에게 메이저리그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말하면,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난 다음이라 물을 수 있는 것이긴 했지만…… 뭐, 어쨌든.

“지난 시즌, 메이저리그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열심히 던졌던 거잖아. 그런데 이렇게 돌아온다고 하니,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신경이 쓰이기도 하더라…… 뭐 그런 이야기인가?”

“그런 셈이지.”

지섭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지미 모리스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하여튼 오지랖은…….”

그래도 친구의 관심이 썩 나쁘지는 않은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지미 모리스.

“솔직히 말하면…… 그래, 메이저리그 구단으로부터는 별다른 오퍼를 받지 못했다.”

“뭐라고?”

“아니, 아니지. ‘아직’ 받지 못했다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군.”

지미 모리스가 입맛을 ‘쩝’ 다셨다.

“이번 오프 시즌…… 메이저리그에는 거물급 투수 FA가 잔뜩 쏟아져 나왔거든.”

지섭도 대충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매년 수억 달러 규모의 계약이 심심찮게 체결되는 메이저리그지만, 유독 특정 포지션의 선수들이 ‘우르르’ FA로 풀리는 경우가 있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그 포지션이 선발투수였던 것이다.

“캔자스시티의 루이스, 시애틀의 에릭슨, 그리고 올해 사이영 상을 받은 루벤 아코스타까지…….”

지미 모리스가 턱을 긁었다.

“덕분에 지금 메이저리그는 꽁꽁 얼어붙어 있는 상태야. 다들 그 거물급 FA 투수들의 향방을 체크하느라 정신이 없으니까.”

그들의 행선지가 결정되어야 비로소 시장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거물급 FA들의 계약이 체결되고 나면, 준척급 FA 선수들의 계약 논의가 시작된다.

준척급 FA 선수들이 얼추 자리를 잡고 나면, 그다음 티어 선수들에게 기회가 돌아오고.

“그런 식으로 차례차례 계약이 이루어진다는 걸 고려하면……. 내가 메이저리그 구단에게 제대로 된 오퍼를 받을 수 있는 타이밍은 내년 2월 중순쯤 되겠더라고.”

“……그럼 앞으로 2개월 뒤인가.”

지섭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그랬느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미 모리스는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투수.

이런 나이대 투수가 소속팀 없이 몇 개월을 보낸다는 건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계약이 될지 안 될지도 확실하지 않고, 계약이 되어도 어떤 보직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몸을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

제대로 몸을 만들지 못해서 한 시즌을 그냥 공치기보다는, 일찌감치 소속팀을 정해서 확실하게 시즌을 보내자.

지미 모리스가 KH 캐논즈 복귀를 결정한 데에는 이런 계산이 깔려 있었던 모양.

생각이 여기까지 닿은 지섭은 지미 모리스의 어깨를 ‘툭’ 치면서 입을 열었다.

“뭐, 이렇게 된 거…… 내년에는 정규시즌 MVP를 노리는 수밖에 없겠네.”

“뭐라고?”

“아니면 다승왕, 탈삼진왕, 평균자책점 1위까지 해서…… 3관왕을 노려보는 것도 괜찮겠고.”

아니, 그렇잖아?

지섭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콧대 높은 메이저리그 구단들이라도, 네가 그 정도 성적을 올리고 나면…… 달러 뭉치 싸 들고 와서 계약해 달라고 빌지 않겠냐?”

“뭐야, 지금 나한테 위로…… 아니, 격려를 해주는 거냐?”

하하, 안 하던 짓을 하네.

단장 특보가 되어서 그런가?

지섭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어 보이던 지미 모리스.

그러나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지미 모리스가 딱 잘라 말했다.

“내년 오프 시즌까지 갈 것도 없어. 내년 7월……. 아니, 6월쯤 되면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내 등판 경기를 보기 위해서 우리 홈구장에 잔뜩 모여들도록 만들 테니까.”

다부진 각오.

끓어오르는 승부욕.

지섭은 지미 모리스를 바라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야, 그럼 네 덕분에 우리 티켓 판매 수익이 오를 수도 있는 건가?”

“당연히 오르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무조건 중앙 탁자 지정석에 앉는 거 모르냐?”

그렇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던 지미 모리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그는 지섭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너희는 어때?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 건가?”

“준비? 무슨 준비?”

“아까 언뜻 들은 것 같은데? KH 캐논즈가 이번 윈터미팅에서 메이저리그 구단과의 업무 제휴를 노리고 있다던가…….”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메이저리그 구단과의 업무 제휴.

지미 모리스의 재계약과 함께, 이번 미국 출장에서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미션 중의 하나.

그런데 그에 대해 언급하는 지미 모리스의 표정은 꽤나 심각해 보였다.

“나는 현역 선수라 자세히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어느 정도 각오는 해두는 게 좋을 듯싶다.”

“각오?”

“이번 윈터미팅에서 메이저리그 구단 관계자들을 만나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야.”

내가 말했잖아?

지미 모리스가 손가락을 꼽았다.

“캔자스시티의 루이스, 시애틀의 에릭슨, 그리고 올해 사이영 상을 받은 밀워키의 루벤 아코스타.”

“…….”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지금 거물급 FA 투수들을 영입하는 데에 온통 정신이 쏠려 있으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한국 구단과의 업무 제휴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구단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 * *

메이저리그 구단과의 업무 제휴가 그리 순탄치 않으리라는 예상.

사실 처음에 지섭은 지미 모리스의 말에 크게 마음을 쓰진 않았다.

‘지미 모리스가 베테랑이긴 하지만, 프런트 업무 쪽으로는 잘 모를 테니까…….’

실무진의 보고에 따르면, KH 캐논즈는 이번 시즌 중반부터 메이저리그 구단들과의 협상을 이어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대략적인 밑그림은 어느 정도 그려졌고, 이제 서창기 단장이 상대 구단 수뇌부를 만나 최종 담판만 지으면 되는 상황.

한두 개 구단에서 어깃장을 놓더라도, 나머지 구단과 협상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번 윈터미팅이 끝날 때쯤에는 어느 구단이든 한 군데와는 충분히 업무 제휴를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졌는데-

“허허, 이거야 원…….”

윈터미팅 2일 차.

KH 캐논즈 서창기 단장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보스턴 친구들이 다짜고짜 약속을 취소했단 말이지? 언제 다시 만나자는 말도 없이?”

“그렇습니다, 단장님.”

캐논즈 직원 하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시간 전에 확인 전화를 했을 때만 해도 아무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그야 안 봐도 뻔한 것 아니겠나? 그쪽 단장이 FA 협상에 들어간 것이겠지.”

이날만 벌써 세 번째였다.

메이저리그 구단의 일방적인 약속 취소 통보.

사유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사과의 말 한마디도 똑 부러지게 하지 않는.

아무리 잘난 메이저리그 구단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옆에서 지켜보던 지섭은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기분이었지만, 이런 쪽으로 경험이 많은 서창기 단장은 오히려 그런 지섭을 가만히 타이르는 모습이었다.

“표정 풀어, 이 친구야.”

서창기 단장은 부드럽게 웃었다.

“나랑 같이 다니다 보면 이런 일은 부지기수로 있을 텐데, 그때마다 얼굴을 붉힐 참인가? 혈압 올라. 몸에 안 좋다니까?”

“그, 그렇긴 합니다만…….”

“기억해 두게. 메이저리그 구단과의 협상에선 항상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

서 단장이 말을 이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는 저들에게 제공할 메리트가 거의 없거든. 우리가 저들에게 선수 육성 프로그램을 전수하겠나? 아니면 데이터 분석 노하우를 전해주겠나?”

“…….”

“확실한 메리트를 주고받을 수 없으니, 저들과의 협상은 항상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

자꾸 전화를 하고.

또 자꾸 만나자고 요청을 하고.

그러다 어쩌다 만남이 성사되면 함께 식사를 하고, 같이 야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렇게 정성껏 시간을 들이는 동안 어느 순간 형성되는 바로 그것.

“인맥. 인간적인 관계.”

서 단장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야구판 어디든 인맥이 안 중요한 곳이 있겠느냐마는…… 메이저리그 구단과의 협상에선 그게 결정적이라고 해도 좋거든. 기억해 두라고.”

“예, 단장님.”

지섭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창기 단장은 품 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자아, 그럼 나는 이제 그동안 쌓아둔 인맥을 박박 긁어모아야 할 것 같은데, 그동안 자네는…….”

아아, 그렇지.

서창기 단장이 손가락을 튕겨 ‘딱’하고 소리를 냈다.

“이번이 처음이었지 아마? 자네가 윈터미팅에 참가하는 것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허허, 이거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군. 우리 캐논즈 직원이 윈터미팅에 처음 참가하면, 반드시 해야 하는 미션이 있는데 말이야.”

“미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몸을 일으켜 세운 서창기 단장은 지섭의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위에 놓여 있던 자그마한 플라스틱 박스 하나를 집어 들어 지섭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우선 이걸 챙기게.”

“이건…….”

명함이었다.

이번에 단장 특별 보좌로 임명되면서 새롭게 지급 받은 지섭의 명함.

서창기 단장은 명함 박스를 가리키면서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 자네는 밖으로 나가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자네의 명함을 나누어주도록 하게.”

“이걸…… 전부 말입니까?”

“전부. 남김없이!”

누구든 상관은 없다고 했다.

지나다 만난 여행객에게 건네도 되고, 호텔 로비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나누어주어도 되고.

다만 한 가지, 제약 조건이 붙었다.

“누구에게 주든 상관은 없네만…… 대신 반드시 그 사람의 명함도 받아와야만 하네.”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서창기 단장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명함 박스를 새로 만난 사람의 명함으로 가득 채우고 나면…… 돌아와서 나와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고.”

“…….”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또 그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서창기 단장은 지섭을 강하게 키워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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