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단 신입이 너무 잘함 154화
40장 시간제한 없는 경기(4)
에릭 맥코넬.
보스턴 레드삭스의 캡틴.
그가 타석에 들어선 것은 연습경기 스코어가 5-2로 바뀐 직후의 일이었다.
보스턴의 주전 선수들이 캐논즈의 바뀐 투수를 집중 공략, 순식간에 2점을 뽑아냈던 것이다.
‘흥, 역시 별 볼 일 없는 녀석들이었어.’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슥슥’ 타석의 흙을 골라내는 에릭 맥코넬.
사실 그는 상대 투수들의 실력을 비웃고 있는 게 아니었다.
2점 정도는 내줄 수도 있다.
보스턴의 주전 멤버들은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서도 정상급 공격력을 보유한 녀석들이니까.
에릭 맥코넬의 입장에서 어이가 없었던 건, 2점을 내준 그 상황에서 캐논즈 포수가 자신에게 건넨 말 한마디였다.
“오우, 미스터 맥코넬! 보스턴 레전드! 아이 러브 유어 플레이!”
“……왓?”
자신을 향해 엄지를 ‘척’ 들어 보이는 캐논즈의 주전 포수.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헛웃음이 나왔는데, 더 가관인 것은 마운드 위에 있던 투수의 행동이었다.
“매…… 맥코넬? 진짜 맥코넬?!”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신기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젊은 한국인 투수.
그가 별안간 모자를 벗어들더니 자신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왔던 것이다.
‘거 참, 이 자식들은 배알도 없나? 어떻게 상대 타자에게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거지? 그것도 실점한 직후에?’
에릭 맥코넬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이런 얼빠진 녀석들에게 5점이나 내준 백업 멤버들이 원망스러웠다.
5-0 스코어에 화들짝 놀라 경기에 뛰어들었던 자신의 선택이 후회스럽기도 했고.
‘쯧, 빨리 역전시키고 경기를 끝내버려야겠군. 이런 녀석들이랑 경기를 하느니, 조금 지겹더라도 훈련을 받는 게 나으니까.’
하품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내면서, ‘꾸우욱’ 두 손으로 배트를 움켜쥐는 에릭 맥코넬.
그런데,
바로 그때였지 싶다.
“플레이 온!”
주심의 경기 재개 선언이 나오던 순간, 에릭 맥코넬은 그라운드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 뭐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
규정상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에릭 맥코넬은 포수의 움직임이 달라졌다는 걸 직감했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투 아웃! 투 아웃!”
“내야 퍼스트! 내야 퍼스트!”
느슨하게 풀려 있던 수비수들의 움직임에도 어느새 실을 잡아당긴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오고 가는 눈빛은 그들이 지난겨울 얼마나 치열하게 호흡을 맞춰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이 사람.
“…….”
마운드 위의 투수였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세상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큰 눈을 끔벅이고 있던 젊은 투수.
쭈뼛쭈뼛 부끄러움을 타다가 모자를 벗어들고 꾸벅 고개를 숙이던 어리숙한 녀석.
그러나 ‘경기 재개’ 선언이 나오던 순간, 그의 두 눈에는 한 마리 독사를 보는 듯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잡는다!’
그가 투수 동작에 들어가던 순간, 에릭 맥코넬은 느낄 수 있었다.
‘저 자식은…… 내가 잡는다!’
‘에릭 맥코넬, 반드시 잡아낸다!’
딱 그런 표정으로 있는 힘껏 공을 뿌리는 캐논즈의 젊은 투수.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백에 순간적으로 기가 눌렸던 것일까.
아니면 그의 손끝을 떠난 포심 패스트볼이 몸쪽 깊숙한 코스에 제대로 짓쳐 들어왔던 탓일까.
‘이런!’
에릭 맥코넬의 스윙은 평소보다 한 타이밍 늦게 나왔고, 결국 배트 손잡이 부분으로 공을 건드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따학!
두 동강이 나서 이리저리 흩어지는 나무 배트.
상대 유격수 방면으로 힘없이 바운드되는 하얀 공 하나.
에릭 맥코넬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비, 빌어먹을!’
그렇다고 지레 포기하는 건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타구의 속도가 느려서 잘하면 세이프 판정을 받아낼 수도 있겠다 싶은 상황.
에릭 맥코넬은 이를 악물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캐논즈 유격수의 움직임이 만만치가 않았다.
공포 영화 속 유령처럼 ‘스스슥’ 타구를 향해 다가서는가 싶더니, 공을 집어 들어 물 흐르듯 1루 송구로 연결시키는 모습.
이대로라면 100% 아웃.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던 에릭 맥코넬의 다음 선택은-촤아아아악!
1루 베이스를 향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이었다.
‘파…… 판정은?’
입안으로 들어오는 흙먼지의 텁텁한 맛을 느끼며, 보스턴 레드삭스의 캡틴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도 나름 메이저리그 통산 2천 안타의 베테랑. 연습 경기에서 이 정도 열정을 보여주었다면 슬쩍 편을 들어줄 법도 하건만.
“아웃! 아아아웃!”
칼같이 판정을 내리는 1루심.
아쉬움에 ‘젠장할!’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던 에릭 맥코넬의 눈앞에, 누군가의 두툼한 손 하나가 다가온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음?”
처음엔 주루코치인 줄 알았다.
그러나 보스턴의 주루코치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흑인. 이때 에릭 맥코넬 앞에 불쑥 나타난 손은 동양인의 것.
‘그럼 누구지?’ 하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 에릭 맥코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캐논즈의 젊은 투수.
“미, 미스터 맥코넬! 아 유 오케이? 노 프러브럼?”
“…….”
에릭 맥코넬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공을 던질 때만 해도 한 마리 독사 같은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또 어리숙한 시골 청년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젊은 투수뿐만이 아니었다. 캐논즈의 유격수도, 2루수도, 살벌한 기운을 내뿜던 포수도 어느새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
‘이놈들은…… 대체 뭐지?’
에릭 맥코넬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보면 메이저리거라는 이름값에 살짝 기가 눌려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메이저리거라서 더더욱 이를 악물고 이기려 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상대가 누군지에 상관없이 그저 한판의 야구 시합을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거 참…… 묘한 녀석들이네.’
뭐라고 한마디로 딱 잘라서 표현할 수가 없는 오늘의 맞상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릭 맥코넬이었으나, 사실 그도 고민을 오래 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임 오케이, 돈 워리.”
캐논즈 투수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킬 때쯤, 에릭 맥코넬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 하나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뭐,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마치 종이에 잉크가 스며드는 것처럼, 어느 순간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된 생각.
‘상대하는 재미가 있는데? 이 한국인 친구들 말이야.’
* * *
그로부터 약 30분 뒤.
지섭은 VIP룸을 빠져나와 3루 측 관중석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잠시 전화 한 통을 받고 VIP룸으로 돌아왔더니, 서창기 단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단장님은 갑자기 어디로 가신 거…… 아아, 저기 계시는구나.’
서 단장은 3루 측 관중석 가장 아래쪽 열에 앉아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그라운드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
그는 왜 말도 없이 VIP룸을 나와 저 자리로 향했는가.
지섭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단장님, 여기 계셨습니까?”
그의 곁에 가서 앉는 지섭이었다.
“여기에 와 계셨다는 건……. VIP룸이 영 갑갑하게 느껴지셨던 모양입니다?”
“맞아, 표정 관리도 어느 정도여야지. 더 이상은 거기서 얌전 빼고 앉아 있을 수가 없더라고.”
서 단장은 그라운드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말을 이었다.
“비록 연습경기에, 2시간짜리 단축 시합이라지만……. 우리 캐논즈가 보스턴 레드삭스를 잡아내기 일보 직전이지 않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경기 시작 1시간 51분을 지나고 있는 현재, 양 팀 스코어는 5-3.
이번 이닝만 무실점으로 막아내면 KH 캐논즈의 승리였다.
“선수 출신인 김 특보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좀 긴가민가했었거든? 우리 캐논즈가 강해졌을까, 한국 시리즈를 노릴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올라왔을까.”
서 단장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보스턴 선수들을 보니까 확실히 감이 오는구먼. 우리 캐논즈는 충분히 우승을 노릴 수 있겠어.”
“보스턴 선수들을 보셨다고요?”
지섭의 질문에 서 단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확히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주전 선수들을 보고 있었지.”
“…….”
“처음에는 다들 심드렁하더라고? 한국 선수들이랑 시합을 한다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그런데 말이야.
서 단장이 지섭을 돌아보았다.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저 친구들 표정이 확 밝아지더라고.”
“표정이요?”
“그래! 저 친구들도 재미가 붙은 거 아니겠나? 우리 캐논즈 선수들을 한번 붙어볼 만한 상대로 인식한 것이겠지.”
서 단장이 가만히 턱을 쓸었다.
“물론 보스턴 주전 멤버들이 투입된 이후로는 3실점……. 조금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실력의 차이는 하루아침에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나.”
“그렇지요.”
“메이저리그에서도 알아주는 선수들이 ‘제법 하는 녀석들이다’ 인정을 했다면, 한국 리그에서도 충분한 활약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서 단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캐논즈 선수들의 실력 향상을 확인했다는 점도 만족스럽고.
다가올 시즌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도 만족스럽고.
하지만 가만히 보면 서창기 단장도 욕심이 굉장히 많은 사람.
이 상황에도 약간의 아쉬움을 품고 있는 듯했다.
“우리 선수들의 경기력이 생각보다 좋아서 그런가? 이렇게 되니 오늘 시간제한이 새삼스레 아쉽구먼그래.”
입맛을 쩝 다시는 서 단장이었다.
“2시간 경기라고는 하지만, 보스턴의 주전 선수들이 뛴 시간은 1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시간제한만 없었다면, 우리 선수들이 저 친구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좀 더 배울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사실 지섭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2시간의 시간제한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승리를 따내야겠다는 마음뿐.
그러나 보스턴의 맹공을 굳건히 버텨내는 캐논즈 선수들을 보니, 그 마음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기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은 충분히 챙겼으니, 이제는 더 나은 실력을 위해 이번 기회를 활용하고 싶은 마음.
“확실히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기회……. 그걸 2시간 만에 끝내는 건 조금 아쉽긴 하네요.”
지섭이 서 단장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단장님? 제가 지금이라도 보스턴 사람들이랑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볼까요?”
“아니야, 고작 2시간짜리 경기에도 보스턴 선수단의 반발이 심했다고 하지 않았나? 모든 일을 우리 입맛에 맞게 할 수는 없으니까.”
서 단장이 손을 내저었을 때, 그라운드 쪽에서 ‘따악!’ 하는 타격음 하나가 들려왔다.
꽤나 기세 좋게 쭉쭉 뻗어 나가는 듯했으나, 결국 중견수 류장호의 글러브 안으로 들어가고 마는 타구.
이로써 마지막 아웃카운트. 게임 종료.
“이겼구먼.”
서 단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아, 가서 선수들을 격려해주세나. KH 캐논즈가 창단한 이래,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팀을 꺾은 역사적인 순간이 아닌가?”
“예, 가시지요.”
“아아, 선수들에게 오늘 저녁 메뉴를 알려주는 것도 잊지 말고. 뭐였더라? 쇠고기 스테이크였지?”
“예, 직화구이 바비큐. 무한 제공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좋구만. 어서 가자고.”
끼이이익-
내야 펜스에 붙은 쪽문을 열고 그라운드로 향하는 지섭과 서창기 단장.
우선 아서 프리먼 감독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뒤이어 코칭 스태프들에게도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선수들에게 격려의 한마디와 함께 이날 준비된 저녁 메뉴에 대해 발표를 하려던 바로 그때.
그래, 바로 그때였을 것이다.
“잠깐만! 잠깐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하나.
별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던 지섭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에릭 맥코넬이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캡틴.
KH 캐논즈와의 연습경기를 극렬하게 반대했다던 그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지섭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맥코넬 씨,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냐고? 아니, 지금 그걸 몰라서 나한테 묻는 겁니까?”
에릭 맥코넬이 눈을 크게 떴다.
“한국 사람들은 똥 싸다가 시간 되면 그냥 끊고 나갑니까? 똥은 끝까지 싸야 하는 거고, 경기는 끝까지 해야 맞는 거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별 희한한 소리를 지껄여대는 에릭 맥코넬.
지섭은 그가 이토록 흥분하는 이유를 훤히 꿰뚫을 수 있었으나, 짐짓 모르는 척 오리발을 내밀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경기를 도중에 끊었다니요. 처음부터 2시간의 시간제한을 두고 시작한 경기 아닙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제가 알기론 그 2시간의 시간제한……. 분명 에릭 맥코넬 씨의 항의 때문이라고 들었는데요?”
“아,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이때 보스턴 캡틴의 얼굴 표정은 꽤나 볼 만했다.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굉장히 답답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혼자서 막 발을 동동 구르는가 싶더니, 결국엔 눈을 딱 감고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거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통역이 굳이 필요 없는 말이었다.
“내가 당신들 실력을 얕본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연습경기를 반대했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한창 게임이 재밌어지고 있는데 이렇게 끝내 버리면 어떡합니까!”
조금만 더 합시다!
에릭 맥코넬은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시범 경기 일주일도 더 남았습니다! 당신들 이렇게 가버리면, 우리는 또 몇 날 며칠을 따분하게 보내야 한다고요.”
“…….”
“나만 이런 생각하는 거 아닙니다! 내 동료들 생각도 마찬가지예요! 동료들만 그러나요? 우리 감독님께서도 이렇게 끝내기 아쉽다고 하시는데…….”
간절한 표정의 에릭 맥코넬.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섭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보스턴 선수들이 우리랑 좀 더 경기를 이어나갔으면 하는 모양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반짝.
캐논즈 선수들의 두 눈에 빛이 들어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