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흑막 시점 11화
아카데미 과학 기술동 112B호 연구실.
이번 스팅레이의 후원을 받는 장학생들을 평가하기 위하여 잠시 빌린 장소였다.
미유는 평가가 치러지는 옆쪽 112A호에 보낸 뒤, 경호원들의 안내를 받아 그곳에 도착했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처음 보는 남자의 잔소리였다.
“형님!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시면 어떡합니까! 네?!”
대뜸 나한테 성질을 내며 달려드는 남자.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형님’이라는 단어와 내게 남은 아론의 기억을 통해, 그가 내 동생…… ‘베네딕트 스팅레이’임을 깨달았다.
베네딕트는 나와 마찬가지로 흑발과 황금색 눈동자였다.
소설에서는 별다른 묘사가 나오진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흑발금안은 스팅레이 가문의 유전이었던 모양.
‘근데 이 인간도 꽤 미남이네.’
참으로 축복받은 유전자구만.
하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긴 하지.
그런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겼는지 베네딕트가 한층 더 언성을 높였다.
“무슨 대답이라도 해보십시오!”
“뭘 대답하라는 거지?”
“조금 전 학생들한테 보낸 공지 말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짤막한 한마디.
순간 베네딕트가 움찔 몸을 떨었다.
마리아 때와 마찬가지였다. 베네딕트 역시 티는 내지 않으려 하지만, 내심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듯했다.
딱히 싸늘하게 말한 것도 아닌데.
“그, 그런 공지 메일을 제게 상담도 없이 갑자기 보내시면 제 입장이……!”
“난처하다? 어째서?”
아까 복도에서 마주친 1학년 장학생들.
녀석들이 먼저 미유에게 부딪쳐 놓고 사과 한마디 없기에 빡쳐서 저지른 일이었다. 마리아를 통해 알아낸 담당자의 연락처로 직접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일말의 후회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빠르게 일 처리를 했던 담당자를 승진시켜 주고 싶을 정도.
“본래 내 권한이다. 너는 어디까지나 ‘대리’에 불과하지. 뭐가 문제더냐?”
어디 엑스트라 따위가 감히 내 최애캐를!
또 그걸 떠나서도 미유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내가 그 자리에서 ‘싱’인가 뭔가 하는 남학생의 목을 베어 버리지 않은 것만 하더라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내 냉정한 대답에 베네딕트는 분해하면서도 어떻게든 표정을 관리하려 했다.
나름대로 훈련을 받은 거겠지.
“……알겠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그 문제는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알고 있다.”
스팅레이 장학생 학기 외 재수행평가.
대외적으로 대충 그런 이름을 붙이긴 했으나, 실상은 이사장 자리를 두고 스팅레이 가문의 형제들끼리 내기 판이 벌어진 것이었다.
작년에 베네딕트가 선출한 17명의 장학생들과 내가 데려온 미유.
그들의 실력을 겨루어 보고, 만약 1학년들 중 한 명이라도 미유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녀석이 있다면 베네딕트에게 정식으로 이사장 자리를 넘겨주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학생들로 포○몬 배틀을 하게 된 셈이지만…… 뭐 본인들은 모르니까 상관없겠지.
“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형님이 데려온 게 저 아이입니까?”
베네딕트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112B호 연구실에서는 유리창을 통해 112A호의 내부를 관찰할 수 있었다.
현재 그곳에서는 1학년 기술부 장학생들과 미유가 곧 치러질 평가시험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SF영화에서나 볼법한 미래식 디자인의 실험실.
두 줄로 나란히 배치된 널찍한 테이블들 위에는 컴퓨터를 비롯해 시험을 치르기 위한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1학년 학생들은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 도구의 상태들을 확인해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 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서는 미유가…….
‘아니, 저 녀석 왜 저래?’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얼핏 보기엔 그냥 멍하니 서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유는 최신식 장비를 두고 가만히 있을 애가 아니다. 오히려 신나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모를까.
“……형님?”
“잠시 얘기 좀 하고 오지.”
“그게 무슨……!”
베네딕트를 무시하고 112A호로 들어갔다. 인기척을 내며 미유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나를 뒤늦게 발견하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미유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잠시 떨어져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안다.
“아, 아론 씨이…….”
“집에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군.”
“네?! 아, 아뇨! 그, 그럴 리가……!”
호흡이 거칠다.
미유는 거짓말에 서툴다.
10년 가까이 히키코모리로 살던 녀석을 억지로 끌어 앉혀다 놓은 것이다. 아까 전 아카데미 곳곳을 함께 산책하며 조금 익숙해지길 바랐건만, 그것만으로는 다소 부족했던 걸 테지.
게다가 추가로 한 가지.
“저 애송이들이 네게 뭐라고 했지?”
“아, 아니에요…… 저는 그저……!”
“내게 거짓말하지 마라.”
베네딕트와 잠시 대화하는 사이에 1학년 놈들이 자기끼리 수군거리는 걸 엿들은 걸 테지. 옛날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것이리라.
이건 마냥 다독여서 될 일이 아니지.
좀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후우.
나는 짤막하게 한숨을 쉬고 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돌아가지. 차를 불러 두겠다.”
“그, 그러실 필요는……!”
“그럼 남아서 평가를 치르겠나? 지금 그 상태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자신이 있나?”
“…….”
미유는 답하지 않았다.
실은 돌아가고 싶은 것이리라.
“억지로 강요는 하지 않겠다. 돌아가자. 대신 약속 그 네오 암…… 어쩌고는 없던 일로 하는 걸로.”
“앗! ‘네오 암스트롱 사이클론 제트 암스트롱 4 만능툴’!”
미유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원작에선 작가가 웃기라고 넣은 설정이었는데, 실제로 직접 듣게 되니 이름이 나올 때마다 헛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왜 이름에 암스트롱이 두 번이나 들어가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그것은, 뉴 발할라 시티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의 만능도구다.
그리고 평소에 미유가 무진장 갖고 싶어 한다는 설정도 붙어 있었다.
나는 오늘 아카데미에 억지로 그녀를 끌고 오는 대가로 스팅레이의 정보력을 이용해서 그 물건을 구해 주기로 약속했다.
모든 일을 매번 억지로만 시킬 수는 없으니 당근을 던져 준 것이었다.
“흐, 흐흠. 아무튼 네가 정 견디기 어렵다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다. 억지로 진행해 봤자 널 추천한 내 얼굴에도 먹칠하게 될 테니.”
“아, 아론 씨이…….”
“그러니 네오 어쩌고는 포기해라. 그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라면 지금의 네게는 과분한 것일 테니.”
“그, 그렇지 않아요오!”
그 순간 미유의 기운이 달라졌다.
그야말로 각오를 마친 자의 얼굴.
“그, 그런 귀여운 걸 포기할 수는 없어요오! 증명해 볼게요오! 믿어 주세요오!”
“그, 그래…….”
갑작스러운 기세에 밀려 버렸다.
참고로 미유에게는 ‘귀엽다=성능’이었다. 모바일 미소녀 가챠 게이머 같은 마인드를 지닌 녀석이다.
“…….”
서브 히로인이라는 녀석이 시나리오 클라이맥스신에서나 보여야 할 각오를, 그런 어처구니없는 도구를 향해 불태우는 상황이라니.
조금 참담한 기분이었다.
“각오가 됐다면 최선을 다하거라.”
“네!”
처음 만난 이래로 가장 열정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역시나 조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건 미유의 기운을 충분히 북돋아 준 뒤 112B호로 돌아왔다.
베네딕트는 아까보다도 더욱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유와의 대화를 엿듣고 자신감이 생긴 건가? 아니, 그것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이 녀석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선…….’
뭔가 수작질을 해 놨군.
반쯤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다.
‘여러 수를 고려해 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대충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서 평가를 중지하고 부정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열심히 발악해 봐라, 베네딕트.’
굳이 귀찮게 할 필요 없겠지.
오히려 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속아주는 게 훨씬 더 임팩트가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참으로 불쌍하게도.
어떻게 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절대로.
* * *
한편 112A호 연구실.
아론 덕분에 기운을 되찾은 미유가 실험실 구석에서 의욕을 불태우고 있던 그때, 다른 학생들은 그녀를 열심히 훔쳐보고 있었다.
-방금도 아론 님이랑 직접 대화했지?
-진짜 쟤 정체가 뭐야?
-뻔한 거잖아. 낙하산이겠지.
-저 기계 꼬리는 대체 뭔데?
-제기랄. 쟤 때문에 지원 다 끊기게 생겼어. 집에는 뭐라고 말해야 좋지?
인간이란 궁지에 몰리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보단 남 탓을 하곤 한다. 그들은 원인 제공자인 싱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만만한 미유만 헐뜯기 바빴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학년 1위의 싱은 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들 너무 그럴 거 없어.”
“응?”
“이번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내면 되는 거잖아? 아론 님이 데려온 애라고 해도 별거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
동기들은 그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라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남을 흉봤을 녀석이, 왜 갑자기 착해진 척?
스폰서님 앞이라고 가식 떠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이번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낼 자신이 있다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는 학생들이었으나, 물론 둘 다 정답은 아니었다.
싱의 진심은 하나뿐이었다.
‘열심히 고생해라, 떨거지들아. 나는 너희하고 다르게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 말이야~’
며칠 전.
이번 평가에 대한 공지메일이 학생들에게 전송되기도 전에, 싱은 비밀리에 누군가의 부름을 받았다.
그를 호출한 사람은 바로 베네딕트.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싱을 만난 베네딕트는, 그에게 작은 데이터칩을 하나 건네주었다.
-받거라.
-이, 이건 뭐죠?
-조만간 1학년 기술부 장학생들에 대한 재수행평가가 있을 예정이다. 거기서 유용하게 쓰일 자료를 첨부해 놨다. 미리 공부해 두도록.
-네?! 어째서 제게만 이런…….
-다른 학생들에겐 줘 봤자 활용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학년 1위인 너라면 다르겠지?
싱은 감격했다.
베네딕트 님이 자신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계셨던 거다. 혹여나 이번 일로 자신을 잃을까 걱정까지 하실 정도로.
-충분히 예습이 끝난다면 그 데이터칩은 몰래 폐기해라. 그리고 이번 건에 대해서는 절대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말도록.
-물론입니다!
그러한 일이 있었기에, 싱은 이런 평가가 있으리란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연히 시험 대비도 철저하게 해 두었다.
‘이건 나를 위한 무대야!’
그렇게 싱이 자신만만해하며 어서 평가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그때,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스팅레이 주관, 기술부 1학년 장학생 수행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평가 과목은 ‘신비모듈 제작’입니다.]
웅성웅성.
예상치 못한 평가 내용에 학생들이 당황했다. 물론 미리 내용을 알고 있었던 싱만은 여유로울 수 있었다.
이윽고 실험실 앞쪽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거대한 상자가 스르륵 열렸다.
액체질소가 내뿜는 자욱한 연기와 함께 투명한 원통형 케이스가 솟아올랐다. 케이스 안에는 검은색의 심장이 푸른빛의 액체 안에 담겨 둥둥 떠 있었다.
[이번 모듈 제작의 소재는 하급 악마, ‘임프’의 심장입니다.]
[수험생 여러분께서는 임프의 심장에서 정수를 추출하여 제시된 조건에 맞추어 모듈 제작을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신비모듈.
도시 밖을 떠돌아다니는 괴물들이 지닌 초자연적인 힘을 담은 모듈이다. 당연히 인공모듈보다 제작이 어렵지만, 성능은 훨씬 더 뛰어나고 특별하다.
신비모듈의 제작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1. 정수 추출.
2. 분석.
3. 재설계.
4. 프린팅.
처음은 정수 추출.
우선은 소재에서 ‘정수(Essence)’라 부르는, 말하자면 [신비]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특수한 물질을 추출한다.
다음은 분석.
추출한 정수를 분석기에 투입하면, 연동된 컴퓨터가 분석을 완료한 후 시각화된 자료로 화면에 띄워 준다.
제일 중요한 세 번째 단계, 재설계.
프로그램의 보조를 받아 정수의 구조를 재정립하는 과정이다. 비유하자면 블록으로 만들어진 성의 파츠를 조금씩 갈아 끼우는 일이다.
착용자에게 위험한 정보를 지닌 블록은 제거하거나 수정하고, 미흡하다 싶은 부분은 다른 블록으로 채워 넣으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 프린팅.
재설계가 끝난 정수를 금속이나 플라스틱 같은 소재와 함께 가공하여 모듈의 형태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렇게 네 가지 과정만 거치면 적응자가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신비모듈이 완성되는데, 말로는 간단해 보여도 실제론 그렇지 않다.
‘모듈러의 사소한 실수 하나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게 신비모듈 제작이다.’
모든 과정 중에서 소재에 적합하지 않은 방식을 택하면 정수 자체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망가지는 일이 부지기수.
특히나 재설계 단계에서 가장 많은 실수가 벌어진다.
지나치게 수정을 가해서 원본이 지닌 특별한 힘을 잃어버리거나, 반대로 위험한 파츠를 발견하지 못한 탓에 착용자에게 부담이 가는 경우도 있다.
‘또 호환성이나 대체율 문제도 까먹으면 안 되지.’
성능에만 치중해서 만들다 보면 막상 사용자에게 적합하지 않아서 완성해도 쓰질 못하는 일도 있다.
요컨대 인공모듈과 달리, 신비모듈은 모듈러의 실력과 센스가 결과를 좌우하는 종합예술에도 비견되는 작업이다.
‘특히 악마 소재는 더더욱 악질이지.’
태생부터가 인간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악마의 정수는 강력한 힘을 지닌 대신에 인간에겐 치명적인 악질적인 지뢰 코드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또한 정수 자체가 내뿜는 독기에 모듈러가 홀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올해 겨우 2학년으로 올라갈 예정인 학생들이 다루기에는 다소 버거운 소재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난 상관없지만.’
물론 그 역시 악마 소재는 처음 다루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임프의 정수를 다루는 노하우가 빠삭하게 들어 있었다. 그것도 세계 최대의 나노머신 기업으로부터 받은 정보가.
[평가 기준은 안정성, 호환성, 출력레벨, 대체율 총 네 항목입니다.]
[평가 시간은 총 120분입니다.]
안내방송에 맞추어 스팅레이 소속 감독관들이 임프의 심장을 각 수험생의 앞에 옮겨 주었다.
만약 모듈 제작 중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들이 개입할 것이다.
[그럼 시작해 주심시오.]
평가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학생들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각 배부된 보호 장갑과 보호경을 능숙한 동작으로 착용, 조심스레 원통형 케이스를 열어 집게로 심장을 쟁반에 옮겨 담았다.
정수 추출기를 전용 주사기에 연결하고, 컴퓨터와 연동된 분석기를 가동한다.
다들 지난 1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던 학생들이니만큼, 낯선 소재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싱의 작업 속도는 유독 빨랐다.
다른 학생들이 이제 막 정수 추출 작업에 돌입했을 때, 그는 이미 충분한 양의 정수를 반쯤 뽑아낸 상태였다.
‘역시 자료에 있었던 대로야……!’
마구잡이로 주사기를 찔러봤자 정수는 조금밖에 나오지 않으니, 정확히 혈관의 방향을 따라 바늘을 넣으라는 팁이었다.
덕분에 그는 남들보다 반 발짝 빠르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정도 속도를 유지한다면 앞으로 5분 안에 충분한 양의 정수가 모일 것 같았다.
‘이건 내가 무조건 1등이야!’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학우들은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이리저리 주사기를 찔러보고는 있지만 정수가 잘 나오지 않아 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는 듯했다.
만족스러운 결과.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추출작업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타닥.
타다닥.
타다다다다다닥.
무서운 기세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음이 너무 심해서 신경이 거슬릴 정도였다.
‘아니, 대체 누가 이렇게……!’
싱은 신경질적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았고,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그곳에서는 미유가 엄청난 속도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다른 학생들은 아직 정수 추출도 끝마치지 못한 시간.
미유는 이미 모듈제작 세 번째 단계.
‘재설계’ 작업에 돌입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