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흑막 시점 32화
레온 일행이 떠나간 후.
아이리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투덜댔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뚝을 툭툭 건드려댔다. 머리끝까지 솟은 화가 몸짓으로 나오고 있었다.
“……하여간 쓰레기 같은 놈들이야.”
스스로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싶어진다고?
그런 마음이 들게 해 주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웃기지도 않는 협박이었다. 그걸로 겁먹을 줄 아나?
과장을 좀 보태자면, 놈들이 얼마나 멋들어진 괴롭힘을 선보여 줄지 돈을 내고서라도 보고 싶은 기분이다.
그래 봤자 자신이 폴른 구역에서 겪었던 것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을 테지.
‘너희는 상대를 잘못 골랐어.’
속으로 한껏 비웃어 주었다.
안타깝게도 기껏 받아 온 음식들이 조금 식어 버렸다. 아이리는 화풀이라도 하듯 입에 음식들을 마구 때려 넣었다.
그러던 중.
미유의 상태가 묘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저기…… 그게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그녀의 엉덩이에 달린 기계 꼬리 역시 풀이 죽은 것처럼 고개를 픽 숙이고 있었다.
“하여간…….”
아이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론처럼 사람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능력은 없지만, 미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저런 놈들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아침이나 먹어. 어차피 저놈들 아무것도 못 해.”
“하, 하지마안…….”
“무시하라니까? 생각해 봐. 저놈들이 그리 대단한 놈들이었으면 저렇게 우르르 몰려왔겠어?”
떼로 몰려다니는 놈들치고 실력 좋은 놈을 본 적이 없다. 능력에 자신이 없으니 숫자에 의존하는 것이다.
“게다가 선택권은 너한테 있는 거잖아. 만약 네가 다른 그룹에 들어가 버리면 어쩔 거야? 그러니 너한테는 함부로 못 대할 거야.”
“으음…….”
아이리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제야 미유는 조금 안심한 듯 표정이 풀어졌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남아 있는 듯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저는 괜찮다고 해도 아이리 씨는…….”
“나? 난 상관없어. 지들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지. 내가 가만히 있나.”
자기들이 욕하던 폴른 출신의 성깔이 얼마나 더러운지 제대로 보여 줄 것이다.
“알겠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평소대로 지내면 돼. 우릴 뽑은 사람이 돌아오면 저것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앞에서 벌벌 기어 다닐걸?”
그때였다.
아이리의 시야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일이라도 도착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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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에러]
[그래? 참 대단한 자신감이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 같은데.]
[맛만 조금 보여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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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갑작스러운 상황.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기도 전, 엄청난 양의 경고 메시지들이 아이리의 시야 가득 도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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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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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으아아아앗!”
파지직!
아이리의 뒷덜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오빠의 유품인 전투 모듈이 꽂혀 있는 곳이었다. 소켓에서 매캐한 연기가 풀풀 피어올랐고, 아이리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아이리 씨이!”
웅성웅성.
갑작스런 소동에 기숙사 식당이 시끌벅적해졌다. 아이리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범인을 찾으려 애썼다.
‘부, 분명 그 자식들이야……!’
이건 분명 해킹이다.
그 스터디그룹에 속한 놈들 중에 솜씨 좋은 ‘테크노 위자드’가 속해 있는 것이리라.
‘빠, 빨리 위자드를 찾아야……!’
어서 범인을 찾아내서 제압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야는 엄청난 양의 시스템 경고 메시지에 가려진 상태였다. 앞을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
그리고-
“꺄아아아아아아아앗!”
이번엔 온몸이 뜨거워졌다.
피가 끓는 것 같았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 호흡이 점점 가빠졌고,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시야는 여전히 시스템 경고 메시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제일 위에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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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경고: 보안 취약!!]
[너야말로 잘못된 상대를 건든 거야.]
[처음부터 잘 했어야지.]
[아카데미 생활이 참 즐거워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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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제기…… 랄…… 당, 자앙……!”
“아이리 씨이! 아이리 씨이!”
미유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어딘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아이리의 의식은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 * *
“슬슬 돌아갈 때인가.”
사냥터에 입장한 지 사흘 차.
나는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판단했다.
원래라면 이곳에서 조금 더 시간을 끌 생각이었지만, 그래 봤자 더 얻을 만한 이득이 없을 것 같았다.
‘등장하는 [신비]의 종류도 그렇고, 보상도 그렇고. 애초부터 내 스펙에는 맞지 않는 사냥터였던 것 같군.’
원작의 지식을 활용할 수 없는 곳이란 점 때문에 지나치게 긴장했었는데, 막상 입장해 보니 어려움을 겪기는커녕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난이도가 너무 낮았다.
“키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엑!”
“시끄럽다.”
서걱.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옆에서 울부짖던 숲고블린의 목이 날아갔다. 내게 뭔가 전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말이 안 통하니 내게는 소음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고블린들은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넙죽 엎드렸다.
이곳, 자색 사냥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숲고블린 무리였다.
처음 놈들과 마주쳤을 때 바짝 긴장하며 전력을 다했더니 무리의 80% 정도를 단번에 죽여 버렸다.
나중에야 고블린 로드? 챔피언?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 신분이 높아 보이는 것들이 시체 중에 섞여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우두머리를 없애고 나니 놈들은 내게 복종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는 놈들이다 보니,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키기엔 매우 좋았다.
아, 게다가 살인 충동도 가라앉았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첫날부터 고블린들을 왕창 쓸어 버려서일까?
하지만 괴물들 좀 죽였다고 해서 그 충동이 가라앉을 정도면, 원작의 아론은 어째서 인간들만을 사냥했던 거지?
현재로선 알 수 없었다.
뭐, 어쨌건.
‘그러다 보니 금방 지루해졌지…….’
고블린들은 내버려 두면 알아서 음식도 구해 오고, 주변에 보이는 다른 [신비]들을 족족 사냥해 오고는 했다.
첫날 마주쳤을 때 내가 머리를 일제히 잘라 버렸던 탓에 놈들은 내가 동물의 머리를 즐겨 먹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음식을 구해 오라고 시켰더니 동물의 머리를 가져왔기에 그 녀석들을 본보기로 죽였다. 그 후로는 제대로 음식을 가져오더라.
물론 반항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자는 사이에 창으로 내 심장을 찌르려고 들었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텅스텐 스킨]이 있었고, 놈들의 무기는 내 피하장갑을 뚫지 못했다.
내 잠자리를 방해한 녀석들을 죽였고 덤으로 몇 마리를 더 죽였다. 그 후로 무기를 들고 설치는 놈들은 사라졌다.
‘그러니까 방법이 바뀌었지.’
둘째 날에는 자기들은 먹을 수 있는데 인간은 먹지 못하는 독초 같은 걸 음식이랍시고 진상하는 놈들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미를 시켜봤더니 본인들은 잘 먹었다. 그에 안심하고 먹었더니 시스템 메시지로 ‘독’이라는 경고가 떴다.
다행히 [천독불침]의 필터 덕분에 이상은 없었지만, 혀가 얼얼해졌다. 본보기로 또 한바탕 죽여 버리자, 무리의 1할도 채 남지 않았다.
‘여기는 내가 올 곳이 아니었다.’
하급 [신비]들밖에 없어서 파밍도 할 게 없었고, 고블린들이 다른 [신비]를 사냥하고 주워오는 모듈들도 전부 쓰레기였다.
‘얼마나 수준이 낮으면 왜곡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 거냐.’
[신비]가 방출하는 ‘마나’라는 물질엔 인간을 미치게 하고 현실을 뒤트는 힘이 있다.
마나는 세포 단위로 영향을 미치는 터라, 체내에 나노머신이 없는 일반인이 마나에 그대로 노출되면 온몸이 끔찍하게 변형되어 버린다.
그것이 괴물들을 상대할 때 적응자가 꼭 필요한 이유였지만, 이곳의 농도는 너무 희박해서 내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아마 민간용 나노머신을 달고 와도 멀쩡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제일 끔찍한 것은 음식과 잠자리였다. 군대에서 혹한기 훈련도 겪어본 나로선 견딜 만한 수준이었지만, 고상하신 아론 님의 육체 쪽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쨌건 아무리 잠적해서 시간을 끌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해도, 이런 생활을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겠군…….’
이곳에서 내가 얻은 건 두 가지.
하나는 모듈이고, 하나는 특별한 장치.
우선 모듈 쪽을 꺼내 확인했다.
고블린들이 동굴에 있던 ‘미믹’이라는 괴물에게 날 먹이로 바치려고 했던 오늘 아침에 얻은 물건이었다.
미믹과 고블린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나니 미믹이 모듈을 하나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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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Lv.2 미믹(Mimic)]
외견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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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있으면 굳이 사냥터에서 죽치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외견을 바꿀 수 있다면 내가 아론 스팅레이인 것을 숨기고 마음껏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민 ID를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서 행동해야겠지만, 적어도 이런 야생생활은 하지 않아도 될 터.
‘그리고 이 물건…….’
이걸 여기서 얻게 될 줄은 몰랐다.
내 손 위에는 금속 재질의 장치가 올려져 있었다. 원판에 벌레 다리를 붙인 듯한 생김새.
첫날부터 계속 고블린들을 마구 죽이다 보니 한 녀석이 떨어뜨린 물건이었다.
독특한 디자인 덕분에, 처음 보는 물건임에도 이 물건이 어디다 쓰는 것인지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리버레이터(Liberator)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리버레이터.
다른 말로는 해방자.
1부 3막의 ‘아카데미 안드로이드의 반란’ 에피소드를 일으키는 핵심 아이템이다.
‘여기 있어선 안 될 물건인데…….’
원래라면 이건 지금 내 손이 아니라 ‘아시타교(明日敎)’라고 불리는 반기술주의 사이비 종교인들의 품에 있어야 한다.
‘시나리오 순서를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 있는 물건을 왜 고블린들이 들고 있던 거지?’
이곳이 플레이어들의 메인 시나리오 대비를 위한 던전이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일단 나가서 확인해 보면 될 일이야.’
일단은 1부 1막, 아이리와 타이탄족의 문제부터 신경 써야겠지.
‘돌아가자.’
그렇게 결정하자마자.
나는 사냥터지기를 불러냈다.
아동만화에서 나올 듯한 로봇의 형상이 내 앞에 송출되었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고블린들이 시끄럽게 굴길래 죽였다. 도망치는 것들은 내버려 두었다.
[반갑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돌아가고 싶다.”
[좌표를 말씀해 주세요.]
“트리니티 아카데미. 인적 드문 곳.”
[아카데미 내부, 인적이 드문 곳 중 랜덤 좌표로 전송됩니다. 괜찮습니까?]
“그래.”
[사냥을 종료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냥터지기의 인사말과 함께.
시야가 전환되었다.
* * *
다시 눈을 뜨자, 어두컴컴한 복도가 나를 반겨 주었다. 벽면에 적힌 표시를 보아하니 일반 기숙사동 근처인 듯했다.
‘마침 잘 됐네.’
겨우 사흘 만에 돌아왔을 뿐인데 아카데미의 이런 폐쇄적인 인테리어가 이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허나 감상에 빠지는 것도 잠시.
‘이럴 때가 아니지.’
외부에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내가 이곳에서 나타나면 상당한 소란이 일 것이다.
‘아직은 내가 등장할 때가 아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고는 이번에 새롭게 얻은 [미믹] 모듈을 장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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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율: 57%
과부하율: 69%(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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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쓰지는 못하겠군.’
외견 전체를 갈아엎는 것만큼 대체율이 확 올랐다. 과부하율도 만만치 않게 상승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적에게 습격당할 위협은 거의 없을 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모듈 온라인, [미믹].”
[미믹] 모듈을 활성화하고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리자, 심장 주변부에서부터 빠르게 피부가 덧씌워진다. 키도 조금 줄어들었고, 얼굴의 골격이 달라진다.
인근 화장실로 이동해서 거울을 보자, 아론 스팅레이와 사뭇 닮은 미남이 그곳에 서 있었다. 옷차림도 평소 입던 새카만 양복 대신 조금 더 멋부림이 들어간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과 황금을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는 두 사람이 형제임을 증명해 주는 듯했다.
‘나쁘지 않군.’
체격이 바뀐 만큼 다소 어색한 감이 있었다. 이리저리 팔다리를 움직여 보며 몸에 적응해 나갔고,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내 보았다.
“아, 아.”
목소리도 바뀌어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삑사리가 났지만, 이내 굵직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내 이름은 베네딕트 스팅레이.”
스팅레이 가문의 차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