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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막 시점-48화 (48/117)

아카데미 흑막 시점 48화

“오늘 점심에는 아카데미 관계자들과 식사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알겠다.”

“오후에는 그분들과 함께 A홀에 있는 ‘스팅레이 밀리터리’ 부스에 방문하셔야 합니다. 이번에 출시가 중단된 V시리즈 모듈 대신 다른 걸로 어필해야 합니다.”

“그렇군.”

“3시부터는 내년부터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지급될 새로운 제복 계약 관련 회의에 참가하셔야 합니다.”

“그래…….”

“마지막으로 저녁에는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가하셔야 합니다.”

“…….”

듣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일정이었다.

……일하기 싫다.

“꼭 해야만 하나?”

나 말고 베네딕트 자식 있잖아.

걔한테 권한 이것저것 다 넘겨줬는데 왜 내가 이걸 다 해야 해? 시나리오 관련된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이름만 올려놓고 꿀 빨고 싶은데.

그런 마음으로 마리아에게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꼭 하셔야만 합니다.”

……였다.

이것도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게 보여서 최소한으로 줄인 거라나 뭐라나.

하기야 이런 대외적인 활동까지 맡겨 버렸다가는 내 위상이 흔들리고 말 테니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만 했다.

걔네가 권력을 잡으면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게 뻔하니까.

“알겠다.”

나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일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내게 남은 아론의 기억 파편과 더불어, 마리아와 다른 직원들의 보좌 덕분에 큰 탈 없이 첫날 일정은 마쳤다.

이후 참석한 저녁 만찬.

도시 최상류층의 사교모임.

전생에선 한 번도 겪어 볼 일이 없었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게.

‘저쪽에서 알아서 다가오는군.’

불치병에 걸렸던 황태자의 화려한 복귀라는 게, 저 양반들한테는 퍽 흥미로운 이슈였던 모양이다.

내가 아카데미에 복귀하자마자 이것저것 일을 터뜨리기도 했고, 그들은 어떻게든 내게 이야기를 듣기 위해 생글생글 웃는 얼굴들로 접근해 왔다.

그러면 나는 평소대로 상대에 따라 차갑고 오만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참이나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나를 평가하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론 씨, 상당히 부드러워지셨군요.

-죽다 살아나면 사람이 바뀐다잖아요?

-어쩌면 이전에 날 선 태도는…….

-네. 어쩌면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폭주했었던 걸지도요.

-황태자도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 거 아니야, 이 양반들아.

원래 아론 성격이 그랬던 거야.

다른 이들을 모두 아래로 깔아보는 듯, 냉소적이고 거만하게 구는 것이 ‘아론 스팅레이’라는 인물이었다.

나는 그저 각계 고위층들을 상대로 그런 아론의 기존 태도를 계속 유지하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했을 뿐인데.

‘이 새끼…… 공식적인 석상에서 대체 얼마나 깽판을 쳐 온 거냐.’

조금 ‘정상적’인 태도를 취했을 뿐인데 평가가 휙휙 바뀔 정도라니. 물론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인간들은 겨우 이걸로 나에 대한 인상을 바꾸진 않겠지만 말이다.

더 기가 차는 부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내가 저지른 만행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말인즉.

정작 본인에겐 잘못했다는 자각이 없다는 거겠지. 아론에겐 진심으로 아웃 오브 안중인 일이었던 거다.

‘징하다, 진짜…….’

나는 그렇게 속으로 질려 하는 한편.

겉으로는 캐릭터를 너무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시티 최대 규모 종합병원의 외동딸, 차기 시장으로 거론되는 유력 정치가, 법조계의 거물 등등.

한 명 한 명이 어쩌면 메인 시나리오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들이었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응대했다.

다만 도중에 곤혹스러운 일도 있었다.

한 무리가 나에게 호감을 사려는 건지,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어머, 아론 스팅레이 씨. 병상에서 일어나셨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네요? 건강은 좀 어떠신가요?”

“스팅레이 씨! 지난번 타이탄 사건 뉴스에서 영상을 봤어요! 학생 한 명을 위해 직접 나서는 모습이 정말이지……!”

“…….”

뭐지, 이 독화살 개구리들은…….

그나마 칼리아 같은 애들은 외모가 받쳐주니 마코니 뭐니, 이상한 화장을 해도 어느 정도 커버가 됐었는데, 평범한 이들이 하니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남자도 몇 명 독화살 개구리 무리에 섞여 있다는 게 더 소름이었다. 아무래도 여자, 남자 안 가리고 유행하는 화장법이었나 보다.

수컷 개구리 무리엔 예술계 인물이 상당수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특히나 강한 맹독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유독 무서웠다.

‘일해라, [천독불침] 모듈아……! 날 맹독에서 지켜 줘……!’

아니, 근데 진짜 제발……!

너희 돈 많잖아……!

아름다움도 돈이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세계관에서 사는 주제에, 다들 왜 그렇게 파격적인 걸 넘어서 안구 파괴적으로 사는 거냐.

시바 신이라도 믿으시나.

결국 참다못한 나는 방침을 내렸다.

그 어떤 잘나신 분이 와도 독화살 개구리 분장을 한 녀석은 완전히 투명인간 취급하기로.

그런 태도를 몇 시간 정도 유지하다 보니 무척 다행히도 ‘황태자는 마코 화장을 싫어한다.’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 나 그거 싫어하니까 제발 유행 끝내라. 연예인이든 뭐든 그딴 식으로 화장한 새끼는 방송 출연 못 하게 만들 거다.’

그렇게 다짐하던 찰나.

어딘가 익숙한 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결국 왔군요. 아론 스팅레이……!”

뿌득 이를 갈면서 말을 걸어오는 인물, 바로 블라디미르였다. 참 재수 없는 목소리이긴 해도, 이런 독화살 개구리 천국에서는 차라리 그가 낫다.

“할 얘기가 있으니, 나 좀 보시죠.”

“그래, 물ㄹ…….”

고개를 돌리며 녀석의 요구에 응하려는 찰나, 나는 그곳에 서 있던 새로운 종의 독화살 개구리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블라디미르’라는 신종(新種)을 말이다.

“…….”

“뭐죠, 아론 스팅레이?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죠? 아하, 이 얼굴을 보고 놀랐나 보군요? 아무래도 당신은 유행에 뒤떨어진 듯하니 제가 설명해 드리자면-.”

“후우…….”

나는 한숨을 크게 쉬어서.

블라디미르의 헛소리를 끊고서.

선언했다.

“……죽여 주마, 블라디미르 하리토노프.”

“예?!”

내 눈을 썩게 만들다니.

이 새끼 죽여 버릴 테야.

* * *

그런 우여곡절 끝에 어떻게든 첫날의 연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시간은 오후 9시.

공식적인 만찬은 끝났어도, 아직 사람들은 남아 교류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일찍 방으로 돌아가는 참이었다.

“먼저 빠져나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다. 아침부터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곤하군. 너도 어서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마리아.”

“알겠습니다. 방까지 모셔다드린 후, 퇴근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대로라면 나는 아직 병상에 누워 있느라 이번 G20 자체에 참가하지 못했겠지.

상황상 참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걸로 인한 나비효과는 최소화하고 싶었다.

‘뭐, 이미 원작 시나리오는 꽤 멀어졌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마리아와 함께 복도를 걸어가던 도중, 저 멀리 뒤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앳된 목소리였다.

‘어린애들……?’

수는 대충 네댓 명.

전부 남자.

나이는 십 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쉽게 말해 중고등학생들 정도.

옆에서 곧장 설명이 들어왔다.

“‘뉴라이프 사(社).’ 사장의 외손자와, ‘퓨어리티 서비스’ 회장의 손자, 그리고…….”

“누군지 설명은 됐다.”

“알겠습니다.”

요컨대 재벌가 3세들이라는 거다.

아까 연회에서 살짝 본 것 같기도 했었는데, 공식적인 일정도 끝났으니 저들끼리 밤새워 놀러 가는 모양이었다.

“방향을 보니 호텔 풀빌라를 빌린 모양이군요.”

“그렇군.”

신나게 놀 생각에 흥분한 것인지, 그들은 내가 옆에 있는데도 알아보기는커녕 큰 목소리로 잡담을 떨어댔다.

덕분에 녀석들이 오늘밤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 계획인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쯧. 어린놈들이 더럽게도 노는구만.’

술과 마약, 여자.

보아하니 저쪽 컨벤션 센터에서 공연을 마치고 온 여자 연예인들을 불러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모양.

예전에는 상상이나 매체로만 접했던 상류층의 문란한 문화에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불러서 주의를 시킬까요?”

“됐다.”

뭐, 저놈들이 어떤 주지육림을 즐기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 도시 상류층들이 썩을 대로 썩었다는 사실은 E섹터 하층 노동자까지 다 아는 사실이니.

뭣보다 내가 주의시킬 자격도 없다.

내 몸뚱이만 하더라도 취미가 살인이 아니던가?

그에 비하자면 중학생밖에 안 된 꼬맹이들이 여자 끼고 노는 건 양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태여 깊게 관련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애써 외면한 채 내 갈 길을 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녀석들 무리에서 한 녀석이 무언가를 바닥에 흘렸다. 새하얀 색에다가, 묘하게 눈을 잡아끄는 생김새까지 절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들, 뭔가를 흘렸군.”

“이건…… 정크칩인 것 같군요.”

마리아가 주워서 손에 올려놓더니 내게 보여 주었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바탕.

붉은색으로 삼각형 안에 붉은 점 두 개가 찍혀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크칩이라고?”

“네.”

“멍청한 놈들.”

이런 걸 할 생각이면 흘리고 다니지나 말든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의 어설픈 행동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합니까?”

“쯧. 난 홀로 돌아갈 테니, 전해 주고 퇴근하도록. 적당히 하라고 주의도 주…… 잠깐.”

갑작스레 전화가 와서 말을 끊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

누군지 곧장 알아채고 응답했다.

“지금은 바쁘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끊겠다.”

[여보세요? 네?! 아, 아뇨. 급한 일이에요. 드디어 정크칩 입수루트를 확보했어요!]

한동안 아카데미 밖에 내보내 놨던 시엘의 보고였다. 솔직히 큰 기대를 안 하긴 했지만, 그걸 티내지는 않았다.

“그건 잘 됐군.”

[잠깐만요. 따질 게 있는데, 확인해 보니까 진짜로 제 몸에 폭탄을 심어 놓으셨더라고요?! 진짜 제정신이에요?!]

“확인해 본 모양이군?”

[확인하고 말고요! 그것 때문에 거래 트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했더니, 다들 ‘스팅레이’ 마크에 쫄아서 해 주지도 않고!]

“그럴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어차피 못 했어요. 아무튼 운 좋게 루트는 확보했으니,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계획하신 대로 2막 시나리오를 진행할 수 있을 거예요.]

“수고했다. 그럼…….”

통화를 끊으려는 찰나.

시엘이 다시 붙잡았다.

[잠깐만요. 더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중요한 얘기?”

[요새 이 바닥에서 갑자기 이상한 정크칩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해서요…….]

“질질 끌지 말고 말해라.”

[아시타교.]

시엘이 말했다.

[아시타교 아시죠? 그 사이비 종교. 1부 3막에 일어나는 ‘안드로이드 반란’과 연관된 녀석들이요.]

“알고 있다.”

[최근 유통되는 ‘특별한 정크칩’들 중에, 녀석들이 만들어서 유포하는 게 있대요.]

“뭐라……?”

또 아시타교다.

그놈들의 이름이 또 등장했다.

[원작 소설에선 그놈들 나올 때 정크칩 얘기 없었잖아요? 그쵸? 제가 기억이 잘 안 나서 확인해 보고 싶어서 전화한 건데…….]

“전혀 없었다.”

그놈들은 어디까지나 순수주의자 사이코들이 모인 골치 아픈 집단이지, 사이버 마약까지 유통하지는 않았다.

원작에서는 그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자그마한 힌트조차 등장한 적 없다. 사일런스가 유통한 정크칩의 배후에 있던 것 역시 ‘아시타교’가 아니라, ‘신비’들이었고.

그에 시엘이 말했다.

[그럼 확실하네요. 당신이 아시타교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게 아니라면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다.”

또 다른 빙의자.

아카데미 내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그 존재가, 현재 나로선 상대하기 제일 골치 아픈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

“일단 알겠다.”

[네.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한 거라 확실하진 않지만, 주의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와 관련된 정보는 더 없나?”

[글쎄요…… 놈들이 제작한다는 그 ‘특별한 정크칩’을 구해 보고 싶었는데, 아직 저로선 신용이 부족한 거 같아서요.]

시간과 정보가 더 필요했다.

아직 섣불리 무언가를 판단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알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그때마다 보고하도록.”

[그럼 제 몸에 있는 폭탄 좀 없애주시면 안 될까요? 저 이거 때매 요새 잠 못 자는데.]

“…….”

너 원래 안 자잖아, 이 안드로이드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얼굴만 보고서 기절하던 녀석이 이렇게 당당히 요구한다고?

아무래도 내가 준 임무 때문에 블랙마켓을 전전하면서 상당히 담력이 좋아진 듯했다. 아마 이것저것 몹쓸 경험을 많이 한 거겠지.

“이번 계획이 끝나면 고려해 보지.”

[그렇게 답하실 줄 알았어요. 아, 그리고 그 ‘특별한 정크칩’ 말인데요. 듣자 하니…….]

그 순간 어째서인가.

문득 아까 주운 정크칩 쪽으로 저도 모르게 시선이 향했다. 그와 동시에 시엘이 설명하기를.

[하얀색 몸체에 붉은색 삼각형이 그려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삼각형 안에는 점이 찍혀 있고.]

“과연.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시엘이 뭔가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열심히 떠들어댔으나, 나는 듣지 않고 곧장 끊어 버렸다.

그리고…….

“마리아.”

“예, 도련님.”

나는 마리아를 돌아보며 지시했다.

“아까 그놈들 잡아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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