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흑막 시점 63화
계획은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것뿐. 그때까지 최대한 준비하고 또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계획의 핵심은 미유와 아이리.
그리고 지금은 스팅레이 소유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사일런스와 아카데미로 복귀한 시엘.
머릿속으로 무대와 인물을 설정하고, 시나리오를 정리한다.
어떻게 해야 내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 면밀하게 검토한다.
그렇게 1부 보스인 나.
아론 스팅레이 전(戰)을 무사히 끝마칠 작전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한편, 나는 며칠 동안 아카데미 관련 업무로 상당히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직 어지간한 업무는 베네딕트에게 짬처리를 하고 있긴 한데, 이제 슬슬 그런 편법도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아마 동생 짬통을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은 짧으면 1학기, 길어 봤자 올해까지가 한계겠지. 다만 요새 녀석의 움직임이 심상찮은 걸 고려하면 그것보다 더 빨리 유통기한이 끝날 것 같았다.
뭐, 그건 그거고.
‘놀고 싶다…….’
마음 같아서야 진짜 다 때려치우고 베네딕트에게 통째로 이사장직을 넘기고 쉬고 싶다.
그냥 우리 애들만 케어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제는 내가 병상에서 일어나 복귀했다는 것을 세간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고, 모든 일을 베네딕트에게 맡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이쪽은 아시타 교와 관련하여 마리아 비서실장이 보낸 보고서입니다. 오늘 안에 확인하고 결정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오늘 오후 1시에 넥서스 대학 학장과 미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건설하는 스팅레이 산학협력관에 관련한 얘기가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 하반기에 열리는 뉴 발할라 시티 취업박람회 부스 예산 편성 보고서입니다.
-최근에 진행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한 모집 광고의 효과가 예측과 다르게 상당히 미흡했습니다, 그래서 마케팅 팀에서 새로운 기획안을 올렸는데, 검토를…….
‘일하기 싫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장난이 아니다.
누가 전무이사급 직책 아니랄까, 처리해야 하는 안건들이 하나같이 굵직굵직한 것들이었다.
쉴 새 없이 도시 VIP들과 만나고, 보고서를 검토해서 결재하고, 시찰 삼아 뉴 발할라 시티 곳곳의 대학을 돌아다니고.
그나마 유능한 비서진들과 아론의 기억 덕분에 처음 겪어 보는 일들도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었다.
‘힘들다…….’
원래의 아론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일들을 미뤄 두고 적당히 여유를 즐기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망할 영감탱이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니 괜히 책잡힐 일은 안 하는 게 좋아.’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
유일하게 내 진짜 정체를 알아본 그 늙은 여우가 아직 회장직에 앉아 있는 이상, 내게 원래의 아론처럼 농땡이를 피우는 행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말로는 ‘너는 이제부터 내 아들이다’라고 했지만,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원래의 아론보다 낫다’라는 인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
하지만 나 역시 숨통이 트일 구멍은 필요했기에, 종종 [미믹] 모듈을 달고 모습을 바꿔 돌아다니며 한숨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고 있다 보니 재단 직원들이 나누는 얘기도 간간이 들려왔다. 내 앞에서는 절대 하지 못할 얘기 말이다.
-아론 이사장님, 복귀하시더니 완전히 사람이 달라지셨는데?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야.
-그러게 말이에요.
-원래는 어떠셨는데요?
-무서웠지. 권위적이고, 냉정하고, 깐깐하고. 일 자체는 무난하게 잘 해도, 조금 뭐랄까. 사람이 꼬여 있다고 해야 하나,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고 해야 하나?
-신입 비서 한 명이 애가 갑작스럽게 아파서 바쁜 시즌에 연차를 썼거든? 그랬더니 ‘그렇게 가족이 소중한가? 라고 하시면서 ‘그 부서’로 보내 버리시더라.
-와…….
그런 짓까지 했던 건가.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었구나.
-하여튼 그런 걸 보면, 지금은 천사지 천사야. 한 번 사람이 아프고 일어났더니 온화해졌다고 해야 하나? 일도 되게 열정적으로 하시고.
-우리 쪽으로 사무실 옮긴다고 했을 때, 솔직히 퇴사까지 각오했는데 안 하길 잘했어요.
-그러게. 조금 조심해야 할 건 늘었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고. 오히려 복지시설은 훨씬 좋아졌고.
-그리고 잘생겼잖습니까.
-너 남자 좋아했냐…….
내가 지낼 사무실이기도 하고, 우리 애들도 사무실 종종 찾아오니까 한 달 사이에 이것저것 마련해 두긴 했다.
휴게실 비품이라든가, 간식이라든가.
하지만 대놓고 ‘내가 편해지려고.’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으니, ‘직원복지’ 명목으로 포장해서 이것저것 겸사겸사 추가했다.
그게 직원들한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었던 듯했다.
……그리고 저 남직원은 조만간 다른 부서로 보내 버려야지.
* * *
그렇게 며칠간 업무와 사투를 벌이고 나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물론 휴가를 낸 것은 아니기에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지만, 내게는 적당한 명분이 있다.
“장학생들을 보러 가겠다.”
“알겠습니다.”
학생실태 파악이라는 핑계를 대고 내 최애들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중간고사가 한창이라 아이리나 미유도 바쁘겠지만,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기쁜 일이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특별동 스팅레이 학생기숙사를 찾았다. ID 체크를 하고 기숙사 안쪽으로 들어가니, 로비에서 풍겨 오는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과연, 이게 아카데미의 중간고사인가.
지나다니는 학생들의 눈이 다들 독기로 가득했다. 그나마 일반학생들에 비하면야 조금 나은 형편이긴 했는데, 성적이 나쁜 학생은 후원이 끊겨 버리는 일도 있기에 다들 바짝 긴장하고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점심시간인데도 식당에서 공부하는 과학기술부 학생들.
식단관리랍시고 커다란 회색 가래 덩어리 같은 합성단백질을 쌓아 놓고 입에 욱여넣는 전술교전부 학생들.
‘옛날 생각나네.’
마치 고3 수능시험 직전을 방불케 하는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긴장이 될 정도였다.
학생들 몇 명이 내 얼굴을 알아보곤 어필을 위해 내게 인사를 해 왔고, 나는 그것을 적당히 받아넘기며 우리 애들의 모습을 찾았다.
‘저기 있군.’
식당 구석.
나란히 앉아 식사 중인 아이리와 미유의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그들에게 자연스레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시험 준비는 잘 되고 있나?”
응? 뭐지, 이 오랜만에 자식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아버지 같은 대사는.
왠지 모르게 밥상머리에만 앉으면 잔소리를 하는 아버지들의 기분이 이해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아, 이런 감정이었구나.
“어라, 아론 이사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 아론 씨이!?”
두 사람이 날 반겼다.
다행이다. 밥상머리에서 잔소리하는 아버지 취급은 안 당했다.
“간만에 여유가 생겨 얼굴을 확인하러 왔다. 별일은 없었나?”
“저는 딱히 없었어요.”
“저, 저도요…….”
담담히 답하는 아이리.
이번 시험에 꽤나 자신이 있는 듯했다. 아마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천근추] 사용법을 열심히 익힌 모양이다.
미유 역시 시험 자체에는 별 어려움이 없는 듯했다. 이미 혼자서 쌓은 지식량이 상당하니, 1학년 중간고사 수준의 문제야 그녀에게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두 사람 다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란다. 혹여나 필요한 게 있으면 곧장 말하도록. 금방 마련해 줄 터이니.”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한 뒤, 나는 미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얼마 전에 부탁한 ‘그것’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고 물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미유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미유.”
“ㄴ, 네에?”
“부탁하고 싶은 게 있나 보군.”
“어, 어떻게 아셨어요오……?!”
화들짝 놀라는 미유.
그렇게 표정에 다 드러내고 있는데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지 않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가 못 알아볼 리는 없다.
“말해 봐라. 일단 들어 보고 결정하지.”
“그, 그게에…….”
“중간고사에 관련된 문제인가?”
“어, 그, 그렇긴 한데요오…… 엄밀히 따지자면 시험에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할까…… 그냥 이건 제 욕심이라고 할까…… 그, 그냥 무시하셔도 좋아요오…….”
“…….”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전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반응은 분명 뭔가 갖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이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며 재차 물었다.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라. 새로운 컴퓨터가 필요한가? 아니면 구해주었으면 하는 ‘정수’가 있나?”
“그, 그게에…….”
후우.
답답해서 못 견디겠는지, 결국 참다못한 아이리가 옆에서 대신 말했다.
“중간 리포트를 써서 제출해야 하는데 그게 고민이래요.”
“아, 아이리 씨이……!”
“왜? 그냥 솔직히 말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아, 아무것도 아녜요오…….”
계속 얼버무리려는 미유를 대신해 아이리가 부연 설명했다.
“미유네 과기부 모듈과 수업 중에 하나가, 시험을 대체해서 [신비]의 생태에 관해 레포트를 제출해야 한다나 봐요.”
“계속해 봐라.”
“조사하던 중에 어떤 [신비]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것들한테 꽂혔다나 봐요. 그냥 자료 조사로 끝내는 게 아니라 꼭 한번 보고 싶은데, 혹시 방법이 없을까 고민 중이라네요.”
“…….”
내가 바라보자 미유가 부끄럽다는 듯이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용기를 내어서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스팅레이 그룹에서도 신비모듈을 생산하기 위해 괴물들을 적극적으로 사냥한다고 들었는데요오…… 혹시 거기에 참관할 수 없을까 하고…….”
“안 된다.”
나는 즉답했다.
“너도 알잖느냐.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그, 그렇겠죠오…….”
미유는 침울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미유는 적응자가 아니다.
제아무리 격이 낮은 [신비]라도, 놈들을 상대하는 일들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그런 일에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라는 이유만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들어주지 못할 부탁이군.”
“귀,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오…….”
쭈글쭈글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잔뜩 움츠러드는 미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에휴. 이 호기심을 어찌할꼬.’
뭔가에 한 번 꽂히면 앞뒤 안 가리고 탐구하려고 달려드는 미유의 성격을 모르지 않는다. 아마 지금도 굉장히 내 입장을 생각해서 절제하고 있는 거겠지.
사실 미유의 부탁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제일 걱정되는 건 그녀의 안전이었다.
[신비]를 만나려면 도시 밖으로 향해야 하는데, 놈들의 영역에선 여러모로 예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곤 하니 리스크가 너무 크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이럴 때는 단호하게 끊어야 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그 꽂혔다는 [신비]가 뭐길래? 원작에서도 미유가 그렇게 관심 보일 만한 괴물이 있었던가?’
혹시 모르니 물어보기로 했다.
“네가 한번 보고 싶다는 [신비]가 뭐지?”
“그, ‘드워프’라고 하는 종족인데요오…….”
“드워프?”
그 난쟁이들 말인가?
그렇게 묻자 미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뛰어난 기술력을 지닌 종족이라고 들었어요오…… 지성도 갖고 있고, 인간과 언어도 통하고, 어떤 기업은 그들과 협력해서 특별한 제품을 생산하는 계획까지 세운 적이 있다고…….”
“……?”
뭐지?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
원작에서 미유는 드워프를 굉장히 싫어하는 모습으로 묘사가 되었는데?
엘프나 요정 같은 종족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미유가 ‘드워프’ 얘기만 나오면 치를 떠는 장면이 있었다.
잠시 고민해 보다가 금세 답을 알았다.
‘아, 그 사이의 이야기가 생략된 거군.’
작가의 서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미 한 차례 미유는 드워프라는 종족과 만난 적이 있었던 거다. 그 경험으로 드워프의 실체를 알게 된 미유는 놈들을 극도로 혐오하게 된 것이고.
“음…….”
어떡할까?
다른 종족이라면 몰라도, ‘드워프’라면 만나게 해 주는 게 가능했다.
다른 괴물들을 보려면 도시 밖으로 나가거나 기업의 비밀 연구소를 방문해야겠지만, 드워프만큼은 별다른 위험 없이 만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해 보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다.
“별로 추천은 하지 않는다. 아마 네게는 그리 좋은 경험이 되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만나 보고 싶으냐?”
“네!? 괘, 괜찮은 건가요오?!”
“잘 됐네, 미유.”
옆에서 아이리가 함께 기뻐해 주었다.
나는 옆에 있던 비서에게 ‘괜찮지?’라고 물어보는 눈빛을 보냈고, 일정에 문제가 없다는 OK사인이 떨어졌다.
“정 신경이 쓰인다면 당장 가 보도록 하지. 어서 채비해라.”
“아, 알겠습니다아! 얼른 다녀올게요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미유는 외출할 준비를 위해 호다닥 방으로 달려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선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던 녀석이 저렇게 재빠른 움직임을 보이다니.
나름대로 이곳에 적응한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들뜬 거겠지.
다만 흥분해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음식들이 그대로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이리는 그녀가 테이블 위에 남긴 음식을 한숨을 쉬며 먹었다.
내가 물었다.
“그냥 버려도 된다만.”
“아깝잖아요. 이거 다 돈이고. 어차피 제 거 다 먹고 더 가져오려고 했으니 상관없어요.”
“그런가.”
이 녀석 성격도 많이 유해졌구나.
근데 그녀의 모습에 자식들이 남긴 잔반으로 배를 채우는 엄마의 이미지가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뭐, 내가 그런 감상을 품거나 말거나 미유가 남긴 음식을 오물오물 입으로 가져가던 아이리가 내게 되물었다.
“근데 정말 괜찮겠어요?”
“상관없다.”
사실 나도 드워프가 보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