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흑막 시점 76화
아론 스팅레이는 괴물이다.
그에 대해서 이 이상 무슨 말로 표현하겠는가. 그의 강함을 제대로 표현하려고 하면 종이를 꽤 잡아먹을 것이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그랬다.
1부와 2부의 경계를 담당하는 중간보스 포지션이라 그럴까. 작가는 아론의 강함에 대해 상당한 수의 페이지를 할애하여 설명해 놓았었다.
소설이 완결을 맞이할 때까지 등장한 모든 인물들 중에 단연코 그의 무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물론 주인공이 완전히 성장하기 전인 초반부 중간보스라 그럴 수도 있지만, 수많은 괴물이나 돌연변이, 폭주한 AI 등과 싸우면서도 대(對) 아론전만큼 고전했던 적은 없었다.
‘짧게 등장했지만, 그만큼 임팩트 하나만큼은 장난 아닌 악당이었지.’
순수한 스펙만 따져 보면 애초에 이겨 먹으라고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었다.
아무 모듈도 장착하지 않은 ‘퓨어스펙’ 상태만으로 어지간한 중견 적응자와 맞먹는 수준의 신체 능력을 보이는 남자였다.
장착한 전투 모듈의 종합출력 레벨은 100을 간단하게 넘고, 장착한 모듈들의 품질도 최소 Lv.3 군용급 이상의 제품들이었다.
심지어 [구름거미]와 [테크블레이드].
두 개나 되는 게임체인저급 신비모듈을 장착하고 있는 남자. 마음만 먹는다면 생산콜로니 몇 개쯤은 가뿐하게 궤멸시킬 수 있는 남자를 무슨 수로 감당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기술적’인 부분은 결국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아론 스팅레이가 정말로 두려운 악역이었던 이유는, 모듈의 성능이니 퓨어스펙이니 하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쪽에 있었으니까.
* * *
시공간이 갈라진다.
순간적으로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굉음이 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부딪치며 공기를 찢어 놓은 탓이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악-!
두 명의 아론 사이에서 돌풍이 몰아친다. 그 바람은 꼭 칼날 같아서, 주변에 닿는 것들을 사정없이 베어 버릴 정도였다.
허나 그 칼날폭풍의 틈새 속에서, 두 명의 아론 스팅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그들이 그저 몰아치는 바람 속에 서 있을 뿐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군용 안구 스캐너 모듈을 장착한 고레벨 적응자 병사들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그 두 명의 사이에서 오가는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공방을 말이다.
실과 실이 부딪친다.
한쪽이 실이 쏘아 날리면, 다른 한쪽이 그것을 실로 그것을 받아친다. 한쪽이 거미줄처럼 실을 펼쳐 내면, 다른 한쪽의 실이 그것을 걷어 낸다.
그 과정은 모듈을 장착한 적응자들이 겨우 볼 수 있을 정도.
신비모듈 [구름거미]는 본디 강철조차도 두부처럼 잘라낼 정도로 예리하면서도 단단한 실을 만들어 낸다.
그 헤아릴 수 없이 갈라지고 얽히길 반복하는 실들은, 각각이 한 자루의 칼날이 되어 주변 환경을 사정없이 난도질해 댔다.
[저, 저게 뭐야……!]
[지형이…… 바뀌고 있다……!]
실에 베인 땅이 갈라진다.
실에 베인 건물이 갈라진다.
실에 베인 자동차가 갈라진다.
실에 베인 모든 것이 갈라진다.
마치 재해를 만난 것처럼, 주변 반경 100미터 안의 모든 것들이 썰리며 두 사람을 둘러싼 지형과 환경 자체가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괴수와 괴수의 싸움.
재해와 재해의 싸움.
어째서 [구름거미] 같은 신비모듈이 ‘게임체인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마 저 모듈의 능력으로 모든 것들을 파괴하리라고 마음먹는다면, 틀림없이 중소도시 한두 개쯤은 가볍게 지워 버릴 수 있겠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목적이나 의문 따위를 전부 잊어버렸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마저 그들의 전투가 내뿜는 박력에 머릿속에서 삭제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뭣들 하는 거지?]
내부통신을 통해 들어오는, 아론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그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정확히는 ‘어린 쪽’ 아론의 목소리였다.
[거기서 가만히 구경만 할 셈인가? 오래는 못 버틴다. 다들 정신 차리고 각자 할 일을 하도록.]
[……!]
그제야 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그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임무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소년 아론의 말에 따라도 되는 걸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당장은 그가 자신들을 돕고 있었고, 지시받은 타깃은 ‘어른’ 쪽의 아론이었으니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일단 임무 수행을 위해서도 그 소년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맞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쏴라! 한 발이라도 좋으니 맞춰!]
[위자드 팀! 바이러스를 더 준비해!]
[뭐든 좋으니, 다 갖다 쏟아부어!]
적응자와 증강자 병사들은 다시금 본래의 아론에게 총구를 겨냥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아쇠를 당겨댔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
수천 발의 탄환이 일제히 아론 스팅레이에게 쏟아진다. 탄창이 벌써 비어 버린 이들은 전투 모듈을 이용한 무기를 꺼내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팅레이 제(制) ‘Lv.3 [S203 40mm 유탄발사기] 통상모듈’, 스팅레이 제(制) ‘Lv.3 [나이트메어 대전차 소총] 통상모듈’ 등, 각 병사들이 비장의 수단으로 숨기고 있던 무기들까지 등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중지원! 공중지원 바람!]
미처 꺼낼 생각도 하지 못했던 5대의 공격헬기까지 전투에 참가했다.
큰 소음을 내며 편대비행으로 날아온 헬기들은 아론을 향해 모든 화력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기체 하단부 ‘30×113mm 체인건’이 쏘아내는 고폭탄과 ‘케르베로스 70mm 비유도 미사일’까지.
과연 이것이 단 한 명의 사람을 잡기 위해 준비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화력이 모조리 투입되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헬기들이 일제히 쏘아내는 미사일들이 아론을 향해 순식간에 도달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가 있던 자리에서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귀가 먹을 듯한 소음.
거대한 화염과 연기, 분진 따위가 아론의 모습을 완전히 뒤덮었다.
채 몇 분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수십억 크레딧에 달하는 탄약과 미사일들이 오직 ‘아론 스팅레이’라는 인물을 죽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 끝날 상대가 아님을.
[……재미있군.]
내부회선을 타고 흘러나오는 아론의 짧고도 굵직한 목소리.
그와 동시에 한 줄기의 섬광이 공중에서 화력을 쏟아붓던 헬기편대를 단번에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서거어어어억-!
칼에 베인 듯, 헬기들이 일제히 가로로 갈라졌다. 연료에 불이 붙었는지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켰고, 남은 뼈대가 허공을 빙글빙글 돌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직후, 돌풍이 불며 다시금 아론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지간한 적응자라도 뼛조각조차 추릴 수 없을 화력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은 것이었다.
구태여 처음과 달라진 부분을 꼽자면 그가 입고 있던 최고급 양복이 연기와 돌풍에 상해 버렸다는 거겠지만, 정말로 의미 없는 수준의 피해였다.
[제기랄! 저 괴물을 대체 어떻게……!]
그 모습에 병사들이 다시금 사기를 잃어가려는 찰나, 어린 아론이 다시금 지시를 내렸다.
[위자드 팀. 응답해라.]
[여, 여기는 위자드 팀! 무슨 일로 그러시는……!]
[거기에 여자애 하나가 갔을 거다. 도움을 받아라.]
[……예?!]
* * *
같은 시각.
작전지역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위자드 팀의 본부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한창 사이버 스페이스에 다이브하여 아론의 보안취약점을 공략하던 위자드 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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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경고][경고]
외부 침입자 발생!
접속을 해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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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스페이스에 완전히 의식을 집어넣은 상태의 위자드만큼 외부충격에 취약한 이들도 없었다.
정신은 가상공간 속에서 숨을 헐떡거릴 만큼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도, 외부에 있는 그들의 육체는 접속 캡슐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당황한 위자드들은 빠르게 딥다이브 상태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어린 아론의 무선통신이 도착했다.
[거기에 여자애 하나가 갔을 거다. 도움을 받아라.]
[……예?!]
그들이 당황하는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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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새로운 해킹모듈이 장착되었습니다.
접속된 장치: [Lv.4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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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킹모듈?
게다가 이름은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당황하는 것도 잠시, 아론의 보안벽과 씨름을 하던 동료 위자드 하나가 괴성을 질렀다.
-오오오! 뚫렸다! 뚫렸어!
아론의 안티 위자드 보안 프로그램에 막혀 진행이 더디던 바이러스의 활동이, 급속도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적응자 팀에서도 환호성이 터진다. 그들의 시야를 통해 관측된 영상이 사이버스페이스 안쪽의 위자드들에게도 공유되었다.
놀랍게도 그 영상은.
아론이 비틀거리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 * *
[바이러스가 먹혔다!]
본체 쪽 아론의 목덜미 쪽에서 여러 번의 작은 폭발이 일었다. 그가 끼고 있던 모듈들이 하나둘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피시이이이익-!
아론은 인상을 구기며 연기가 나는 목덜미에 손을 뻗아 망가진 모듈들을 빼냈다.
그의 손에는 새까맣게 불탄 모듈들이 들려 있었다. 아까 전, 그가 저격병을 죽이고 탈취한 전투 모듈들이었다.
[쯧.]
아론이 혀를 찼고, 나는 그를 보며 떠오른 농담을 던졌다.
[떨어진 걸 먹으니 탈이 나는 거다.]
[…….]
[날 노려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이건 네 스스로 준비한 ‘계획’이 아니었나?]
내 기억에는 남아있다.
지금은 ‘아론 스팅레이’의 자아에 잡아먹혔지만, 그렇게 되기 전의 그가 악당으로 각성한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무슨 계획을 세웠었는지.
이 모든 상황이 스스로 계획한 것이다.
아이리와 사일런스, 미유 같은 조연 캐릭터들의 협력을 받는 것. 자신의 자아와 능력을 복제한 ‘레플리카’를 만들어 주인공의 역할을 맡기는 것.
드워프를 이용하여 게임체인저 모듈 두 개를 복제해 두는 것과, 나노머신의 보안프로그램을 다운그레이드해 놓는 것. 전투 모듈과 특전 포인트를 미리 전부 빼놓는 것.
심지어는 베네딕트의 병사들까지 이용하여, 원래의 ‘나’는 악당이 되어 버린 자신을 막으려 했다.
‘정확한 판단이었어.’
‘나’를 상대하면서 여실히 느낀다.
그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나’는…… 아니, 아론 스팅레이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을 것이다.
‘나’는 ‘아론 스팅레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아론 스팅레이’가 된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패턴에 대해서도 최대한 근접하게 추측하고 있었다.
‘이길 수 있다……!’
이미 스스로 양팔과 양다리를 묶어 놓고 시작한 싸움이었다. 계획과 설계 단계에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 놓은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두 가지.
‘하나는 저쪽도 이쪽의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제한 시간이 되었군.]
제한 시간.
그 단어를 읊으며 아론이 슬며시 내 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내가 활성화시킨 모듈, 드워프제 [구름거미]를 말이다.
‘제길.’
속으로 투덜거리던 순간.
녀석과 끊임없이 공방을 주고받던 내 실이 일제히 끊어졌다. 게임체인저 급 모듈의 성능을 여실히 보여 주던 그것은, 갑작스레 눈꽃이 되어 하늘에서 흩날리기 시작했다.
‘결국엔 이렇게 되는군.’
드워프제 물건의 한계였다.
마력 농도가 낮은 곳에서는 사용하기 시작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원래의 성능을 잃어버리는 것.
아니나 다를까, 한창 본체 쪽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던 타이밍에 사용기한이 끝나 버리고 말았다.
원래는 ‘본체’ 쪽이 사용하게 만들려고 했던 물건이지만, 아론의 자아가 생각보다 일찍 영향력을 발휘한 탓에 진짜 [구름거미]는 놈이 가져가게 된 듯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것도 우리 계획 중 일부였다는 걸 알 텐데.]
[멍청한 생각이었지.]
아론은 그렇게 폄하했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사실 ‘나’는 일찌감치 각성한 아론의 자아가 ‘나’가 세운 계획을 전부 폐기하고 모든 전투 모듈을 꿀꺽해 버리는 상황도 상정해 두었다.
드워프제 복제 모듈은 그를 위한 대비책이기도 했다.
단시간이나마 원본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성능을 보여 주니, 그 제한 시간이 다 되기 전까지 계획을 달성할 수 있으니까.
‘가장 골치 아픈 상황으로는 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우려스러웠던 것은 ‘나’의 자아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아론’에게 잡아먹히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론’은 기껏 쌓아 올린 플랜을 모두 백지화해 버리고 우리는 대항할 여지조차 없이 패배하고 말았을 테니까.
허나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아직 무기가 남아 있었다. [테크 블레이드]라고 하는 게임체인저급 무기가 하나 더.
그리고…….
쿠우우우우웅-!
아론이 쏘아낸 실이 순간적으로 나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그것이 내게 닿기 직전, 거대한 벽 같은 것이 나타나 아론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왜 먼저 가는 거예요! 뒤쫓아 오느라 힘들었다고요! 이거 기동장치도 없는데!]
아이리였다.
Lv.4 파워드 아머를 장착한 그녀가 방패로 아론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미유의 기술력을 등에 업은 그녀는 참으로 듬직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래, 이제 진짜 시작이다.’
지금까지가 전초전이었다면.
“이제부터 시작이다.”
내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모든 것을 베어 낼 수 있는 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