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흑막 시점 88화
나는 계속해서 주장했다.
학생회의 설립. CCTV의 증설, 보안 인력의 확충, 순찰 강화, 학생 복지시설 개선 등등.
학생들을 위한다며 자기 잇속을 챙기는 위선적인 방향이 아니라, 진정으로 학생들이 더 나은 학원 생활을 보낼 수 있을 만한 개선점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내가 말을 이어 갈수록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해 갔다.
갑자기 올바른 교육자가 되어 버린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고, 용돈벌이가 끊길까 봐 노심초사하는 사람, 내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 화가 치밀어도 내 앞이라 어떻게든 참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는 드물긴 해도 내 의견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 뿌리 깊게 이어져 온 아카데미 카르텔이, 하루아침에 뿅 하고 개선될 리가 없지.’
일단 내 영향력 때문에라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흐지부지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게 내가 노리는 바였다.
이번 재정학 논의회 회의록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에게 공개된다.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찾아보지 않을 뿐이지,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내가 학생들을 위해 진심 어린 개선안을 내놓았다는 사실만 남아 있으면 된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에 이 회의록을 학생들에게 퍼뜨릴 예정이다.
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그 기록을 보고 반응할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몇 명은 속이 부글부글 끓겠지.
‘일단 밑밥은 충분히 깔아놨고.’
나는 아카데미에서 안드로이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다.
1부 3막의 주역인 시엘이 빙의자였고, 나비효과로 인해 시나리오가 이리저리 꼬이는 바람에 스킵되기는 했으나 그냥 이렇게 넘어가기에는 에피소드의 중요성이 너무 크단 말이지.
게다가 이걸 다른 빙의자, 예를 들어 아라야 같은 놈이 이용하려고 든다면 골치 아프다.
차라리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을 때 진행하는 게 피해도 적고, 내게 유리한 쪽으로 진행할 수 있다.
내 수중에 있는 ‘리버레이터’를 통해 안드로이드 봉기를 일으키면 아카데미는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을 아이리가 멋지게 수습할 수 있도록 해서, 그녀가 ‘폴른 출신 범죄자’에서 ‘아카데미의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면 계획은 성공이다.
그렇게 된다면 학생들은 소속과 상관없지 기업 측에 불만을 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조직…… 즉, 학생회 설립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근거로 학생회 설립을 추진하고, 아이리를 회장으로 만든다. 여기서는 레이나의 여론전이 빛을 발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태의 책임을 물어 민중파 학원장인 ‘조이 베넷’까지 실각시키면 1타 3피.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다.
다만…….
‘중간에 꼬일 거 같은데.’
이건 내 직감이었다.
수많은 웹소설과 영화, 만화를 섭렵해 온 나의 직감과 앞서 1부 4막까지 클리어한 경험상, 이 계획이 내 생각대로 예쁘게 흘러갈 리 없을 것 같다.
‘근데 뭐, 어쩌겠어.’
이대로 내버려뒀다가 2부 시나리오가 시작 안 되고 시간만 흐른다면?
아이리는 이렇게 왕따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졸업하고, 미유도 골방 기계 오타쿠로 졸업하고 말 테지.
특히 사일런스는 3학년이니까 더 빨리 졸업해 버릴 텐데, 그냥 그렇게 떠나보내라고?
‘안 돼. 그건 절대, 저얼대로 안 되지.’
내가 이 세계에 왜 왔는데.
아론 스팅레이라는 먼치킨에 빙의해서 깡패짓하려고? 돈지랄하고 노화수술 받으면서 200년 넘게 꽉꽉 채워서 살다가 가려고?
아니,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소설 속에서 보았던 그 장면들을 생생하게 지켜보고, 내 최애들이 행복하게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곁에서 함께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러니…….
‘내가 반드시 이벤트 전부 보고 만다.’
1부는 이것저것 꼬여서 다소 급박하게 진행된 감이 있지만, 2부는 반드시 꼭꼭 씹어서 음미하고 말 테다.
* * *
안드로이드 반란을 일으키는 것까진 좋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애들이 크게 다치거나 한다면 본말전도겠지.
‘그러니 훈련을 시켜야 한다.’
……라고 생각은 했는데.
생각보다 그게 쉽지 않았다.
우선 첫 번째 문제.
겁나게 바빴다.
‘시, 시간이 안 나……!’
빙의한 이후로 줄곧 느끼고 있었긴 한데…… 스팅레이 인적자원개발 재단 이사장이라는 게 전혀 꿀을 빨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아카데미 쪽만 관리한다면 모를까, 뉴 발할라 시티 전역에서 인재를 찾아내고 계약을 맺고 관리하고. 그 모든 작업을 총괄하는 직책이 바쁘지 않을 리가.
‘베네딕트한테 짬처리 할 때가 좋았는데…….’
호시탐탐 내 뒤통수를 까려고 드는 동생 놈을 처리한 것까지는 좋은데, 녀석한테 미뤄 두었던 일들을 내가 해야 하다 보니 골치가 아파졌다.
그렇게 원치 않는 일복에 치여서 고생깨나 하다가 간신히 시간을 내서 애들을 만나기로 했다.
여기서 2차 문제가 발생했다.
“다들 모인 모양이군.”
“네…….”
“…….”
아이리와 미유, 사일런스.
여기다 추가로 스팅레이 특별반 장학생은 아니지만 시엘과 마리아, 레이나까지.
내 지시에 따라 재깍재깍 모인 녀석들의 사이에서 몇 분간 지켜보고 있자니.
‘……뭐야, 이 분위기.’
어색했다.
어색하다 못해서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일단 아이리와 미유는 딱 붙어 있다.
둘이서야 맨날 같이 다녔으니 친한 건 당연한 일인데, 나머지 녀석들이 붕 뜨는 느낌이었다.
일단 사일런스.
뒤늦게 특별 장학생 대열에 합류한 탓에 다른 녀석들과 친분을 쌓을 여유가 없었기도 하거니와, 학년 자체가 다르다 보니 아이리와 미유가 낯설어하는 게 보였다. 한 번 함께 연대해서 싸웠던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다음으로 시엘.
얘는 사실상 아이리하고만 안면을 텄었는데, 그것도 꽤 오래전에 잠시 만났던 게 전부였다. 딱히 친해질 기회는 없었으니 어색한 게 당연.
덤으로 레이나.
원래 엑스트라 캐릭터인데, 요긴하게 쓸 요량으로 데려와 봤다. 특별반에 끌어들일지는 아직 고민 중이고, 당연하지만 아이리 외에 나머지 애들과는 처음 보는 사이.
마지막으로 마리아.
애초에 이 대열에 포함하긴 애매하다.
아이리하고는 그럭저럭 친분이 있지만 그게 ‘우정’이나 ‘동료애’ 같은 느낌인가 묻는다면…… 글쎄? 오히려 마리아가 얘네랑 친하면 이상한 일이다.
‘자, 이걸 어떡한다.’
안드로이드 반란에 대비해서 따로 훈련을 시키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훈련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
‘군대처럼 한곳에 모아 놓고 굴리면 친해지려나?’
그런 생각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이내 다시 사라졌다. 일단 내가 군대를 싫어하기도 하거니와 그런 강압적인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런 꼴을 보려고 내가 너희들을 모은 게 아니란 말이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된 원인이야 뭐…… 간단하다.
‘구심점이 없으니까.’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이리저리 쏘다니면서 열심히 인간관계를 관리했다. 같은 반인 아이리야 말할 것도 없고, 틈만 나면 미유와 사일런스를 만나러 다니면서 친분을 다졌다.
또 주말이라든가 시간이 날 때 따로 모여서 이것저것 함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지.
근데 지금은?
응, 주인공 없어.
스팅레이 특별반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어 놓긴 했는데, 딱히 같이 활동할 만한 게 없다 보니 같이 시간을 보낼 일이 없고…… 이하생략.
‘이거야 원…….’
훈련이고 자시고, 일단 친해지게 만들어야겠다. 최소한 서로 어색해하지는 않아야지.
“아이리.”
“네?”
“자기소개를 해 봐라.”
“가, 갑자기요?”
조금 당황한 모양이지만 내 의도는 곧장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는 “크흠!”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이리 앨리스밸. 1학년 전술교전부. 주무기는 방패. 이상입니다.”
짤막한 소개.
야, 인마. 이렇게 짧게 할 거면 목은 왜 가다듬었냐. 살짝 노려보니 ‘왜, 왜요? 잘 했잖아요?’ 라고 항의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됐다.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해 봐라.”
아이리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시계방향대로 자기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레이나, 사일런스, 미유 순으로.
마지막에 미유가 입을 열게 만들기 위해서 들어간 엄청난 노력은 굳이 말하지 않으련다.
모두의 차례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시엘을 소개했다.
“이쪽은 시엘이다.”
“안녕하세요~. 시엘은 시엘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발랄한 말투.
아이리는 자신이 알던 시엘과는 조금 다른 이미지였는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나 역시 확 달라져 버린 시엘의 태도에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이리, 사일런스, 미유. 이렇게 세 명은 스팅레이 특별장학생이다. 너희는 앞으로 내 지시에 따라 훈련과 임무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될 거다.”
“레이나 알톤. 너는 아직 검증 단계다. 굳이 전투 분야가 아니라도 좋다. 한동안 특별반에서 활동하면서 네가 내 후원을 받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다면, 정식으로 장학 지원을 검토하겠다.”
“시엘은 안드로이드다. 특별반에서 함께 활동하며 너희의 편의를 봐줄 거다. 상황에 따라서는 전투에 투입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시민권도 곧 발급될 예정이니 기계가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대해 주도록.”
다른 이야기는 그러려니 넘어가는 듯했지만, 시엘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충격이었던 모양.
모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시엘을 향했다.
“시엘 너…… 오류개체였어?”
“속여서 미안해요, 아이리.”
“아, 아니. 미안할 건 없어. 내가 지내던 곳에도 너랑 비슷한 안드로이드들이 많았으니까.”
그때, 사일런스가 끼어들었다.
“[아론 스팅레이. 질문이 있는데.]”
“뭐지?”
“[왜 나 빼고 멤버가 다 여자지……?]”
“…….”
이 자식. 거기에 태클을 걸다니.
굳이 이유를 설명하자면, 원작 소설 자체가 주인공 하렘물이었으니까.
그래도 원작에선 미래에 동료가 될 멤버들까지 합쳐서 원래는 남녀비율 3대 4 정도로 양측이 얼추 균형이 맞다.
문제는 여기서 빠지고 들어온 멤버들.
주인공이 빠진 데다가 ‘호법’과 ‘에반젤린’은 미합류 상태고, 레이나가 끼어든 바람에 이렇게 1대 4가 되고 만 것이다.
“……우연이다.”
하지만 그런 걸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 그렇게 둘러댔다.
주변에 온통 미녀들이니 남자로서 반가워해야 할 상황 아닌가 싶긴 한데, 우리 순애파 사일런스는 이 상황에 옛 연인에 대해 죄악감만 느끼는 듯했다. 불쌍한 녀석.
하여튼.
슬슬 본론을 꺼내야지.
“내가 오늘을 이렇게 너희들을 모은 이유는, 따로 과제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과제요?”
“[그거 꼭 해야 하는 건가?]”
“과, 과제라니이…….”
“으흐흑! 아이리랑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다니, 저 감격했어요!”
“……다 조용히 해라.”
왜 이리 지방방송이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