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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막 시점-89화 (89/117)

아카데미 흑막 시점 89화

“너희에게 한 가지 임무를 맡기려고 한다.”

어느 정도 교통정리가 끝난 후.

얼추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내 옆에 있던 마리아가 테이블의 한가운데에 작은 기계장치 하나를 놓았다.

데이터팩.

그것을 바라보자 자연스레 얼굴 앞에 홀로그램의 형태로 문서창이 떠올랐다.

“이건 뭐죠?”

“일단 내용을 살펴봐라. 간단히 살펴보면 내가 설명해 주겠다.”

모두가 문서를 열람한 것을 확인하고 난 후, 나는 입을 열었다.

“스팅레이 보안부 쪽에서 내게 들어온 [신비] 토벌 요청이다.”

“이사장님한테요? 왜요?”

아이리의 질문에 나는 내가 평소 맡고 있던 업무가 재단 관련 업무 외에도 있음을 설명해 주었다.

새롭게 콜로니 단지를 세우려고 할 때나, 아니면 갑자기 몰려온 괴물들을 막거나. 보안부의 인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여겨질 때마다 이런 식으로 요청이 온다고 말이다.

“그, 그럼 엄청 어려운 임무인 거 아닌가요? 겨우 학생에 불과한 저희들이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라고 판단한 일이다. 물론 나도 함께할 예정이지.”

원래라면 내 선까지도 오지 않았을 수준의 난이도.

지난번 베네딕트가 일으킨 반란 때문에 회사 보안 인력에 큰 구멍이 생겨 버린 탓에 내가 나서게 생겼다.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이런 일까지 들어온다는 게 참으로 불만스러웠지만, 나도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번까지 안 하겠다고 뻐팅겼다간 진짜 큰일 날 것 같았거든.

“얼마 전 무너진 생산 콜로니 한 곳이 있다. 지금은 괴물들의 손에 떨어진 그곳을 탈환하는 게 목표다.”

“호, 혹시 지난번 V시리즈 모듈 출시 연기의 원인이……?”

“잘 알고 있구나.”

역시 신제품에 관심이 많은 미유는 바로 깨달은 듯했다.

“중간고사 이전에 타이탄이 도시를 공습했던 걸 기억하고 있겠지. 실은 놈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향했던 곳이 우리 스팅레이 사의 V시리즈 모듈 생산 담당 콜로니였다.”

“타이탄이라면 이사장님이 습격을 받고 자리를 비우셨을 때네요.”

아이리는 다른 학생들에게 한창 괴롭힘을 당하던 시기였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아이리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그래. 내가 미처 나서지 못했던 탓에 방어선이 뚫려 버렸었다. 콜로니가 폐쇄되면서 생산이 중지되었지.”

“[타이탄이라면 우리 실력으로 나서긴 더더욱 힘들 것 같은데. 새로운 전투 모듈이라도 주는 건가?]”

사일런스가 내게 반말을 하자 상황을 잘 모르던 레이나는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당연히 장비는 충분히 지급할 예정이다. 하지만 타이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거인들은 전부 처리했고, 이제 시설에 남은 건 격이 떨어지는 괴물들뿐이니.”

“[잔당을 소탕한다는 거군.]”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토벌이 끝나 가던 찰나에 갑자기 [신비] 무리가 골치를 썩이고 있다더군. 너희는 나와 함께 가서 녀석들의 토벌을 도울 것이다.”

“호, 혹시 어떤 괴물인지 알 수 있을까요오……?”

“드워프.”

“헉.”

미유가 흠칫 몸을 떨었다.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고 이를 바득바득 갈려고 시동을 걸려던 찰나에 사실을 털어놓았다.

“……는 농담이고 트롤이다.”

“노, 놀리지 말아주세요오……!”

“드워프가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 걔네는 아인종이라 인간이랑 그럭저럭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미유의 묘한 반응의 이유가 궁금했는지 레이나가 물었다. 그러자 미유는 지난번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는지 꽤 살벌한 표정으로.

“……드워프는 전부 죽어야 해요.”

“히익.”

레이나를 겁먹게 만든 후에 다시금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반응이 재미있어서 나는 속으로 웃다가 다시금 주제로 돌아왔다.

“하여튼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트롤이다. 다들 트롤이 어떤 괴물인지는 알고 있나?”

“재생력이 무척이나 강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총이나 칼 같은 물리적인 공격이 전혀 통하질 않는다고.”

“맞다.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군.”

“흐, 흐흠. 그렇죠, 뭐.”

칭찬에 약한 아이리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아이리는 마리아를 향해 슬쩍 시선을 보냈고, 마리아도 슬쩍 미소를 지으며 화답해 주었다.

이쪽은 사이가 참 좋아 보이네.

뭐, 어쨌든.

“그래. 트롤은 Lv.5 모듈을 장착한 적응자 수준의 재생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방어력도 그와 비슷하게 상당해서 일반적인 공격이 거의 먹히질 않지.”

방어력과 재생력만으로 보면 나보다도 강한 수준이다. 게다가 힘도 상당히 강해서, 평범한 인간은 놈이 가볍게 휘두르는 주먹만으로 온몸의 뼈가 으스러질 수준이다.

물론 트롤에게도 물리 공격이 통하기는 한다. 내 [구름거미]나 [테크 블레이드]와 비슷한 수준의 무기를 이용하여 재생하기 전에 죽여 버리면 된다.

뭐,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지만.

“그럼 트롤의 일반적인 약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나?”

“화생방 공격이라고 들었어요.”

“정확히는?”

“화학, 생물학, 방사능 공격이요. 물론 Lv.3 이하급 화염방사기 정도론 어림도 없고, 백린이나 다른 화학약품을 통해 재생하기 힘들 정도의 고열을 가해서 죽이는 거죠.”

“오오, 우리 아이리는 머리도 똑똑하구나. 정말 멋져……!”

“시끄러워, 누가 우리 아이리야.”

눈치 없이 끼어드는 크싸레의 입을 다물게 한 후 아이리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다만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통한 공격은 금방 적응해 버려서 거의 안 통한다고 들었어요. 그 외에 지속적으로 방사능에 노출시키면 세포 재생력이 뛰어난 만큼 엄청 효과적이라고 들었고요. 하지만 운이 나쁘면 한층 더 위험한 괴물로 변할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훌륭하다.”

짝짝짝.

우리 아이리 똑똑해. 내 딸 해.

마침 트롤에 대한 내용을 1학기 초에 배웠기 때문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술술 대답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그래. 그 정도로 잘 알고 있다면 구태여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자리에 앉은 녀석들의 모습을 둘러본다.

“다음 주말. 너희는 나와 함께 V시리즈 모듈 생산 콜로니로 간다. 그리고 아이리?”

“네?”

“네가 리더다. 네가 주도하여 트롤들한테서 콜로니를 탈환할 작전을 세우고 내게 보고하도록.”

“제가 리더라고요?”

아이리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

“저보다는 사일런스 선배가 더 나을 거 같은데요. 나이도 더 많고, 3학년이잖아요.”

“맡기 싫은가?”

“……네.”

“그렇다면 사일런스. 너는 어떻지?”

“[못할 건 없지만.]”

녀석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마스크 위에 ‘(-_-);;’ 모양의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그 타이밍에 나는 계속 아이리에게 시선이 못박힌 레이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제 딴엔 몰래몰래 본다고 하는 것 같은데, 너무 티가 난다.

하여튼 내가 신호를 주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이나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이리가 리더를 맡는 게 좋다고 봐요. 아니, 이번 건은 무조건 아이리가 맡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 나한테……!”

“생각해 보세요. 어째서 스팅레이 이사장님께서 아이리에게 리더를 맡기려고 하셨을까? 처음엔 알 수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혜안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혀에 기름을 친 것처럼 마구 움직이기 시작한 입. 연극 같은 몸짓과 표정. 그리고 대놓고 내게 점수를 따려는 대사에 조금 골이 아파지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의외의 호소력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다른 녀석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레이나는 자연스레 대사를 이어 나갔다.

“아이리의 포지션은 뭔가요? 네, 보기 드문 ‘탱커’이죠. 방패를 들고 전열에 나서서 적의 공격을 받아 내는 역할입니다. 한편 사일런스 선배?는 은신과 기습에 특화되어 있죠!”

“[내 능력은 어디서 들었냐?]”

“……비슷한 위치에서 적의 공격을 감당해야 하는 다른 팀원들과는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 있어야 하기에, 지시를 내린다고 해도 그 정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사일런스의 지적을 물 흐르듯 무시하고서 연설을 이어 나가는 레이나. 참고로 사일런스의 능력과 성격에 대해서는 내가 미리 정보를 알려 주었다.

“게다가 이곳의 다른 멤버들과도 가장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사람이죠! 이런 사람이 리더를 맡지 않는다면 얼마나 큰 손해인지 아시겠나요, 여러분?”

“자, 잠깐만. 뭐 이상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음대로 떠드는 거야?”

“[뭐, 부정할 수는 없겠군.]”

사일런스가 레이나에게 동조하고 나섰다.

“[나도 내가 리더에 맞는 인물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아. 평소 아카데미에서 받는 훈련에서도 나는 후방기습과 교란이라는 역할을 주로 맡거든.]”

“저, 저도 아이리 씨가 리더인 게 조, 좋을 것 같아요오…….”

평소와 아이리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미유 역시 찬성했고.

“역시 아이리밖에 없다니까요!”

아이리의 광신도인 레이나는 당연했고.

“시엘은 여기서 아이리 외에는 처음 만나는 분들뿐이에요~!”

시엘 역시 동조하고 나서면서 사실상 결론은 나왔다.

지난 중간고사 때 마리아하고도 주기적으로 연락했었으니, 사실상 모든 관계가 아이리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 잠깐. 다들 진정하라고요. 나더러 어떡하라는……!”

“아이리를 리더로! 아이리를 리더로!”

레이나가 갑작스레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시엘이 신난 듯이 그것을 따라 했다. 미유도 기대 충만한 눈빛으로 아이리를 바라보았고, 사일런스는 아이리를 향해 ‘어쩌겠어? 네가 해.’라고 말하듯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아…… 아아…….”

아이리는 당황해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내 포기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알았어요…… 하면…… 하면 되잖아요.”

그렇게 특별반의 리더는 아이리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짝짝짝.

* * *

회의가 끝나고, 수업이 남아있는 아이들은 각자 수업을 들으러 복귀했다.

듣자 하니 아이리는 교실로 돌아가기 전 내 사무실에 온 김에 저쪽 휴게실 쪽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깡그리 걷어 간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기를 리더로 삼은 데에 대한 소소한 복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보다는 우리 직원들한테서 곡소리가 나올 복수라는 게 문제지만.

“갑자기 확 조용해졌네요~”

시엘의 말마따나 소란스러워졌던 사무실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마리아와 시엘. 그리고 추가로 한 사람.

“[아론 스팅레이. 시간 좀 내주시지.]”

사일런스였다.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불만스러워 보였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얼굴 마스크에 화난 모양 이모티콘이 떠 있었으니 녀석의 기분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대충 이유가 짐작 가면서도 모른 체했다.

사일런스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내게 선언했다.

“[한판 붙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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