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흑막 시점-108화 (107/117)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8화

놀랍게도(?) 마리아의 뇌는 녹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안티레인이 오고 있으면 에반젤린의 우비는 의외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생각해 보니 얘도 [신비]였지.’

겉보기에는 그냥 귀여운 외모의 꼬마지만, 일단은 마녀.

안티레인이 일상처럼 쏟아지는 도시 내에서 계속 약품에 노출되면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지금 도시에는 안티레인이 뿌려지고 있는 와중인데, 그걸 그대로 뒤집어썼다간 감기에 걸려 하루 이틀 코를 훌쩍거리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터.

나를 도와 아라야의 본체를 찾아내려면 비맞이 대책은 확실하게 해야 했다.

게다가 얼굴 팔려서 좋을 건 없으니 적당한 우비를 뒤집어쓴다면 그럴 걱정도 어느 정도 덜 수 있다.

난 또, 그 침착하고 철두철미한 마리아까지 레이나의 비정상적인 수비범위에 영향을 받아서 함께 뇌가 녹아 버렸나 했네.

뭐, 어쨌건.

에반젤린에게 입힐 우비의 색은 가장 대중적인 노란색으로 결정되었다. 좀 눈에 띄는 색이긴 하지만, 내가 함께 있으면 딱히 적에게서 숨을 필요도 없었고,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머나~ 귀여워라~”

비행기가 수직 이착륙 기능으로 전환하여 상공에서 천천히 하강하고 있는 동안, 마리아가 에반젤린에게 우비를 입혔다.

입히고 난 후에 레이나가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딱히 호들갑은 아닌 것이,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귀여운 편이었거든.

모자를 써서 얼굴만 살짝 내놓고 노란 장화로 단단히 무장한 모습이 마치 병아리 같다.

에반젤린 본인도 새 옷을 받아서 기쁜지 옷을 입는 동안 상당히 얌전해졌다. 원래 어린애들이 우비 같은 거 좋아하지, 암암.

“준비 끝났습니다.”

“그래.”

나 역시 한쪽 손에 검은 장우산을 건네받은 뒤, 입구 쪽에 섰다. 객실을 돌아보자, 그 사이 기내에서 전투준비를 마친 특별반 멤버들이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묘한 고양감.

나는 천천히 운을 떼었다.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어차피 작전 브리핑이라면 아까 전에 다 했다.

현재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아라야의 방어시스템 교란으로 내외부 출입이 막힌 상태. 방어 포탑이 작동하여 함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

내가 물리적인 시스템을 일차적으로 처리하면, 그 사이에 특별반 멤버들은 249층 스팅레이 사무실의 외부 비행형 차량 주차장을 통해 아카데미로 진입한다.

그 후, 나는 아라야를 찾아 족치고, 특별반은 자신들의 학우를 구해 낸다.

참으로 간단한 이야기다.

그러니 내가 이들에게 할 말은.

“다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라.”

너희라면 할 수 있다.

그 말에 내 후원을 받는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예!”하고 대답했고, 나는 마리아와 에반젤린 두 사람을 이끌고 비행기의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상공 10미터쯤에서 멈춰 있는 비행기.

문이 열리자 밑에서 아래쪽에 웅성거리며 우산을 쓴 채 모여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꽤 숫자가 많았는데, 손에 카메라나 마이크 따위를 든 것을 보니 아무래도 비행기에 붙은 스팅레이 마크를 보고 몰려든 기자들인 듯했다.

고개를 들자, 정면에는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건물이 보였다. 높이 20미터는 될 거대한 담벼락과, 그 위에 설치된 철조망과 활성화된 자동 포탑들.

담벼락 인근 10미터 지점에 붉은색으로 ‘접근금지’라고 쓰인 홀로그램이 떠 있었는데, 그 탓에 그 안으로는 아카데미 관계자와 기자들 모두 출입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지.”

“네, 도련님.”

내가 먼저 비행기에서 훌쩍 뛰어내렸고, 마리아가 에반젤린을 안고 따라왔다.

회색빛 우중충한 하늘은 질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또 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안티레인 특유의 쏘는 듯한 독특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마리아에게 받은 검은 장우산을 펼쳤다. 기자들은 곧장 나를 알아보고는 흥분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스팅레이 이사장님! 아카데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갑자기 방어시스템이 작동한 이유를 아십니까?!”

“아론 스팅레이 씨! 현재 아카데미 지도부 측의 입장발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시민들은 진실을 원합니다!”

보아하니 정보가 어느 정도 통제되고 있는 듯했다. 그럼 귀찮게 일일이 언론 반응까지 신경 써서 대사를 짜낼 필요는 없겠다는 거겠지.

“비켜라.”

“헙……!”

“네, 넵……!”

그 한마디에 내 길을 가로막던 기자들의 무리가 단숨에 반으로 갈렸다.

일단 특종을 위해 달려들긴 했지만, 내 기세를 보고서 겁먹은 거겠지. 황태자의 심기를 거슬렸다가는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건 저들도 잘 알 테고.

나는 걸음을 옮겨 지금은 봉쇄된 아카데미의 정문까지 향했다.

정문 입구 위에 붙여진 라틴어 표어를 바라보자, 자동 번역 어플리케이션에 의해 해석된 문장이 증강현실로 표시되었다.

‘신성(神性)조차 정복하겠다라…….’

세계를 집어삼켜 인류를 변두리 도시 안쪽으로 몰아넣은 [신비]들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볼 수 있는 표어다.

본래 영웅들을 길러 내기 위한 교육의 장이 기업들의 사육장으로 전락한 지금, 라틴어로 새겨진 저 문구가 다소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

정문 쪽에는 기자들과 아카데미 경비들이 모여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 중 파워드 수트로 무장한 채 기자들의 접근을 막고 있는 경비대장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꽤 많은 인파가 충돌을 벌이고 있었지만, 내가 접근하자 마치 홍해 바다처럼 저절로 길이 열렸다.

“스, 스팅레이 이사장님! 여기는 어떻게……!?”

“지금 누구 명령을 받고 일하고 있지?”

“사,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으로…….”

“연결해라.”

“예?”

“당장.”

미리 마리아를 통해 연락을 돌려 봤자 책임을 회피하면서 뺑뺑이 돌릴 게 분명했기에, 이런 식으로 현장에서부터 강행돌파를 하기로 했다.

내 지시에 따라 경비대장은 자기의 상급자인 ‘SD(Security Director).’에게 연락을 넣었고, 다시 내 얼굴을 확인한 SD는 곧장 아카데미 수뇌부 인사들을 단체로 불러냈다.

지난번 회의에서도 만났던 수많은 인사들의 얼굴이 시야에 떠올랐다.

이거야 원,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스, 스팅레이 이사장님? 어, 어째서 직접 연락하시지 않고……!]

[호, 혹시 지금 현장에 나가 계신 겁니까?]

진즉에 뒷방으로 물러나야 했을 늙은이들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대는 소리.

책임이 어쨌다느니, 언론이 어쨌다느니. 듣기 싫어서 전부 한 귀로 흘려버린 뒤 용건만 말했다.

“직접 방어포탑을 부수고 진입하겠다.”

[에, 예에?!]

“용건은 그뿐이다.”

말투를 보아하니 니들, 이런 문제가 터졌는데도 학생들 구할 생각 없는 것 같은데. 과연, 원작의 안드로이드 반란 당시에도 건물 외부에선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내부에서 영웅 노릇을 할 주인공은 없고, 그의 옆에서 날뛰었던 녀석들도 저 비행기에서 대기하는 중이다.

‘니들이 알아서 문제 해결 안 하면, 내가 무대에 주연배우들을 풀어 놓을 거야.’

그런 의사를 표시했더니 진즉에 묫자리를 파서 묻혔어야 할 구태놈들은 또 책임이 어쩌고, 돈이 어쩌고 떠들어댔다.

그놈의 돈, 돈, 돈.

근데 이걸 어쩌나.

곧 옷 벗어야 할 당신네들은 몰라도 난 돈이 썩어 넘치게 많거든.

“아무튼 그리 알도록.”

[이, 이사장님! 이사장님!]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계획을 통보하고는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는 경비대장에게 명령했다.

“옆에서 다 듣고 있었겠지?”

“예?”

“난 내 학생들을 구할 생각이다.”

“아…… 네에…….”

정신을 못 차렸는지 어버버하는 반응.

이거야 원.

이놈도 눈치가 영 없네.

“정리할 시간 3분 주마.”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카데미 경비대장은 빠르게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 전투가 벌어질 테니 민간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미리 피신시키라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경비원들은 부리나케 움직여 아카데미 주변에 몰린 인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추 그 작업이 끝나 가는 듯 보이자.

“모듈 온라인. [구름거미].”

나는 무기를 장착했다.

검은색 장갑이 내 손에 덧씌워진다.

내 뒤에 대기하던 마리아가 물었다.

“도련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제 와서 묻기엔 늦지 않았나.”

“그렇겠군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도련님의 의사에는 변화가 없으신지.”

본래 내 정확한 스펙은 스팅레이 그룹의 기밀이다.

지난번 타이탄을 쓰러뜨렸을 때야 괴물을 피해 사람들이 다 도망치고 난 후, 그러니까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힘을 사용했다.

이후로도 나는 내 힘을 본격적으로 사용할 때는 항상 보는 눈이 많지 않거나, 봐도 상관없는 사람들만 모인 곳을 골라 힘을 써 왔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경비대가 근처에서 인파를 몰아낸다고 해도, 아마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기자 놈들은 꾸역꾸역 카메라를 들이밀고 이곳을 주시하고 있겠지.

여기서 내 힘을 보여 준다면 여러모로 시끄러워질 것이다. 본사 보안부 쪽에서도 난리를 피울 테고.

물론 그 정도쯤은 내가 결과로 보여 주고, 조용히 뒤처리를 한다면 별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스스로 나서서 귀찮은 일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도 학생들을 위해서, 라는 이유로.

원래의 성질 더러운 아론 스팅레이라면 죽어도 하지 않았을 일이겠지.

근데 뭐, 상관있나?

나는 강하다.

힘을 완전히 되찾았고.

이젠 누구도 날 건들지 못할 텐데.

그렇기에 나는 담담히 답했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알겠습니다.”

마리아가 고개를 숙이며 에반젤린의 손을 잡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는 다시금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장갑 낀 손을 들어 올렸다.

거창한 준비동작은 필요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길 뿐.

그러자 다음 순간.

콰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콰아아!

아카데미 내부로 침입자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던 수십 대의 방어포탑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키며 파괴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건물 곳곳에 내장된 방어 장치들을, 나는 단숨에 부숴 버렸다.

거대한 삼각뿔의 세로변을 따라 포탑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고, 그 라인을 따라 [구름거미]의 실을 한 차례 휘두르는 것으로 순식간에 방어시설이 무력화되었다.

“지금이다.”

포탑 하나하나 신경 써서 부순 게 아닌지라, 자동수리 시스템이 작동하면 하나둘 차근차근 복구될 거다.

진입하려면 지금이 적기.

내 명령에 따라, 특별반을 태운 채 상공에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가 빠르게 목표 지점으로 이동했다.

무사히 249층 내 사무실 옆 주차장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후 줄곧 얌전히 기다리던 노란 병아리를 돌아보았다.

“자, 가자.”

“후훗, 드디어 이 몸이 나설 차례군!”

“추적할 수 있겠나? 비가 오는데.”

“처음엔 자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상관없다. 저 커다란 건물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게 놈의 마력이니.”

에반젤린이 아카데미 빌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놈의 마력이 지하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걸 따라 이동하면 된다!”

“그런가. 그럼 가도록 하지.”

나는 비어 있는 팔로 에반젤린을 품에 끌어안았고,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녀오십시오.”

“뒤처리를 잘 부탁하마.”

“부탁하마!”

에반젤린은 내 말을 따라 했다.

남은 귀찮은 일들은 마리아가 전부 처리해 줄 것이다. 우리 주연 배우들도 무대로 무사히 들여보냈으니,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

“아라야를 잡는다.”

이 지긋지긋한 연을 끝낼 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