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0화 (1/201)

0화. 고뇌하는 편돌이

편의점 POS기에는 계층키라는 게 있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고, 그냥 손님 연령대에 따라서 다르게 누르도록 만들어진 버튼이다. 잼민이들 상대로는 어린이男, 어린이女.

급식들 상대로는 중고생 버튼 누르면 되고, 대충 젊어 보이면 젊은 남여성 버튼, 적당히 늙어 보이면 늙은 남여성 버튼, 많이 늙어 보이면 노인, 아예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 같으면 외국인 버튼. 마지막 경우엔 나이는 신경 안 써도 된다.

사실 뭘 눌러도 계산은 잘 되지만 이걸 굳이 지켜야 할 때가 있다면 담배나 어린이용 교통카드를 팔 때. 담배 팔 때는 어린이나 중고생 버튼이 안 눌리고, 어린이용 교통카드 팔 때는 그 반대.

이게 전부다. 그 외엔 정말 신경 안 써도 상관없다. 어린이용 음료수 팔면서 노인 버튼 눌러도 되고, 외국인들 상대로 젊은 남여성 버튼 눌러도 된다. 흑형 백형도 어쨌든 젊은 남여성은 맞잖아?

그래도 이번엔 이걸 가급적이면 지킬 생각이었는데, 점장이 설명해 줄 때 맞춰 누르라고 했기 때문이다. 괜히 시키는 대로 안 해서 문제 생기면 내 책임이잖아.

그런데 말이다.

“플러스 한 갑만 주세요.”

“…손님,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600살 막 넘었어요.”

“…….”

“신분증 보여드려요?”

자신을 600살 먹었다 주장하는 120cm도 안 되어 보이는 금발 트윈테일 꼬맹이를 상대로는 대체 뭘 눌러야 한단 말인가?

키는 어린애였으나 말투는 젊은 여성이었으며, 머리 색은 외국인이었고 하는 소리는 노인이다. 넷 중 뭘 눌러야 할지를 도저히 모르겠어서 꼬맹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일단, 아무리 봐도 금발 트윈테일 꼬맹이가 맞다.

이 경험 자체는 한국 땅에서 별 신기한 경험을 다 해보네 하고 말 텐데, 이 꼬맹이는 평범한 금발 트윈테일 꼬맹이는 아닌 듯했다. 눈동자는 붉은색에 동공은 세로줄로 길었으며, 입가에는 덧니 하나가 뾰족이 튀어나와 있었으니까.

게다가 피부는 푸르스름하다 못해 창백할 지경이고. 너 편의점에서 담배 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병원 가 봐야 되는 거 아니냐? 피부과든, 소아정신과든….

“…신분증 보여주세요.”

날아가려던 정신을 붙들고 겨우 말을 꺼내자, 금발 트윈테일 꼬맹이는 익숙한 듯 앙증맞은 핑크색 파우치에서 신분증을 꺼내서는 내게 내밀어 왔다. 하나가 아니라 세 개를.

“지난주에 환생해서 아직 신분증이 안 나와 가지고, 전생 것들 드릴게요.”

“예?”

이건 또 뭔 소리야?

싶으면서도 일단 내밀어 온 신분증 세 개를 하나씩 살펴봤는데, 찍힌 사진은 눈앞의 꼬맹이가 맞긴 했으나 연도는 죄다 제각각이었다. 더해서, 지방청장 인장이 찍혀 있어야 할 자리에 별 모양 도장 같은 게 찍혀 있다.

“……뭐냐, 이게….”

“아니면 면허증 보여드려요?”

그 키에 액셀에 발은 닿냐?

아무튼 난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됐기 때문에, 꼬맹이한테 일단 기다려 보라 하고 점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으니까.

[ 어, 찬아. 왜? ]

“점장님. 상황이 대충 이런데요.”

저체온증 심하게 걸린 금발 트윈테일 꼬맹이가 담배를 달란다. 꼬맹이에겐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짧게 설명하자, 점장은 세 글자로 대꾸했다.

[ 주면 돼. ]

“예?”

[ 문제없어. 들어보니까 뱀파이어 같은데? ]

점장의 대답은 이 상황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뱀파이어라는 단어가 대체 여기서 왜 튀어나온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요?”

[ 응. 일단 주고, 그래도 신분증은 매번 잘 확인해야 돼.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진짜 미성년자 뱀파이어 와서 담배 달라고 할 경우도 있거든. 잘못 팔면 편의점 영업정지 당해. ]

여기까지 듣고 나니, 쥐꼬리만큼 남아있던 판단력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냥 담배 꺼내서 찍고 줬다.

담배를 받아 든 꼬맹이는 갑자기 떠오른 듯 내게 물었다.

“아, 그리고 혈액팩 300미리짜리 있나요? 도수 17% 정도.”

이것도 난 모르겠다. 아직 전화를 끊진 않았기 때문에, 다시 점장에게 물어봤다.

“점장님, 손님이 혈액팩 있냐고 물어보시는데요.”

[ 있어. 근데 몇 도짜리? ]

“17도요.”

[ 그렇게 쎈 건 없는데. 다른 매장 가시라고 말씀드려. ]

“저희 매장에는 없다네요.”

“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가버렸다. 꼬맹인지 뱀파이어인지 모를 뭔가가 열고 나간 정문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전화에 대고 말했다.

“저 일 그만둬도 돼요?”

[ 왜?! ]

왜긴 왜야, 이런 곳인 줄 몰랐으니까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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