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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편돌이-5화 (6/201)

5화. 적응하는 편돌이 (5)

점장이 말한 곳을 뒤져보니, 초록색 체온측정기처럼 생긴 게 보였다.

[ 찾았어? ]

“초록색 작은 기계, 맞나요?”

[ 응. 그거 맞아. 위쪽에 버튼 누르고 손님 맨살 부위에 겨눈 다음에, 액정 화면에 뭐라고 뜨는지 좀 알려줄래? ]

작동 방식도 비접촉 체온측정기랑 비슷한 모양이다.

들고 서큐버스에게 다가간 뒤, 이걸 어디에 겨눠야 하나를 잠깐 고민했다. 가장 편한 곳은 얼굴이었는데, 얼굴에 대고 레이저를 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아서였다.

“손님, 잠깐 손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

말은 당연히 안 들어 먹었고, 손은 팔짱 껴서 꼭꼭 싸맨 채다. 잠깐 몸을 훑다가, 어깨 언저리에서 살랑대는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하면 될 것 같다.

검은 날개를 겨누고 버튼을 누르자, 액정 화면이 옅은 보랏빛으로 작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점장님, 화면이 연보라색이 됐는데요.”

[ 점멸 주기는 어때? ]

“어… 2초 주기로 한 번씩, 규칙적으로 깜박이네요.”

대답하자 안도감 섞인 한숨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후 점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 다행이네. ]

“이 손님 멀쩡한 거예요?”

[ 그건 아니고, 저주 걸린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편의점에서 파는 걸로 해결 가능할 것 같아. ]

저주가 존재한단 것도 놀라운데, 그게 편의점에서 파는 걸로 해결된다는 게 더 놀랍다.

“저주가 반창고 붙이면 낫는 그런 거예요?”

[ 반창고 말고, 포스기 맞은편에 상비약 들어있는 케이스 있잖아. 거기 두 번째 줄에서 중간 사이즈 약 꺼내서 손님 드려. ]

“얼마인데요?”

[ 4,000원. 아, 두 알 드리면 돼. ]

그래도 별로 위험한 건 아니었나 보다. 4,000원짜리 약 두 알 먹이는 걸로 해결된다는 걸 보면 말야.

점장이 말한 대로 의약품 케이스의 가운뎃줄을 찾아보니, 분홍색 포장지의 의약품이 딱 눈에 보였다. 이어서 눈에 보인 건 케이스 윗줄에 큼직하게 적힌 효능.

“어… ‘상사병이 단방에 치료됩니다?’ 점장님, 편의점에서 항우울제도 팝니까?”

[ 항우울제는 아니구, 그 손님한테 걸린 저주가 상사병도 아니긴 하지만… 효과는 있을 거야. ]

“그게 대체 뭔… 아, 잠깐만요.”

다른 손님이 왔다. 창백한 피부에 회색빛 머리, 붉은 눈에 창백한 피부.

돌고 돌아 다시 뱀파이어인 듯했는데, 처음에 받았던 뱀파이어보다는 키가 좀 더 컸다. 그래도 좋게 봐줘야 중학생쯤. 외에 왼쪽 눈가에 눈물점이 찍혀 있는 게 눈에 딱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혈액팩… 어디쯤 있나요?”

목소리도 좀 어리게 느껴졌고. 뭔가, 뭔가 느낌이 오긴 오고 있는데, 일단은 절차대로 했다.

“혹시 도수 있는 거 찾으시나요?”

“네. 음, 13도짜리.”

“저쪽 끝에 주류 코너 밑에 줄 한번 봐보시겠어요?”

위치는 몰랐지만 굳이 점장한테 물어보진 않았다. 도수가 있으면 주류로 분류될 거고, 혈액팩도 냉장 보관해야 신선할 테니 냉장고에 있겠지, 뭐.

잠시 후 뱀파이어가 혈액팩 네 개를 가져와 내려놓았다. 혈액팩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응급실인지 편의점인지 분간이 안 간다. 심지어 여기에 알코올이 섞여 있단 거잖아?

“저, 그리고 담배 한 갑… 주세요.”

“어떤 담배 말씀이십니까.”

“저거요.”

담배도 달라고 한다. 바로 꺼내주진 않았고, 아까 왔던 느낌이 영 마음에 걸려 혹시나 하고 물어봤다.

“이 6mg짜리 드리면 되나요?”

“어… 네. 6mg.”

내가 든 건 5mg짜리다. 이놈 민짜 아니야?

미성년자의 속칭을 민짜라고 부른다. 속칭이라 거부감이 들 수도 있긴 하겠다만, 편의점에서 담배 사려는 놈들은 민짜나 철없는 애들이 아니라 씹새끼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왜냐면, 판 사람이 형사 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내가. 청소년 보호법 위반했다고 벌금 내야 되고, 주민등록증에 빨간 줄 그인단 말야. 전과자가 된다니까?

담배 하나 판 것 갖고 그렇게까지 하냐 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된다. 편의점은 영업정지 처분받게 되고. 인생 여럿 조지는 짓거리를 지들 폐 작살내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데 좋게 불러주려야 불러줄 수가 없다.

“신분증 보여주시겠어요.”

“네.”

이것도 정상적인 신분증은 아닐 게 분명하다.

받아 들어서 눈 가까이에 대고 들여다보는 척하며, 뱀파이어를 슬쩍 곁눈질했다. 원체 창백한 낯빛이라 얼굴색으론 알아볼 수 없었다만, 경직된 게 눈에 확 보였다.

이어서 신분증도 한번 살펴봤다. 지금이 2021년이니까 2002년생부터 성인이고, 민증은 딱 02년생이라 적혀 있긴 하다. 근데 숫자 주변 홀로그램은 왜 벗겨졌을까? 응?

손톱으로 한번 긁어봤더니, 02라 적힌 부분 언저리가 슬슬 벗겨지려 했다.

신분증을 돌려주며 말을 걸었다.

“이거 스티커 벗겨지는데요.”

“…네, 네?”

“계속 벗길까요, 아니면 라이터로 지져서 녹여볼까요?”

뱀파이어는 어느 쪽도 고르지 않았다. 신분증을 받아 들고는, 꺼내 온 혈액팩도 내팽개친 채로 후다닥 정문 밖으로 도망쳤다.

그냥 내버려 뒀다.

내가 민짜가 담배나 술 사는 걸 조질 권한도 없고, 경찰서에야 같이 갈 수 있겠다만 민짜가 폭행당했다고 역고소해 버리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게다가 스티커까지 붙여놓은 걸 보면 하루 이틀 이런 게 아닐 텐데, 저 민짜 뱀파이어를 역추적해서 담배 판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면 난장판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여, 민짜가 떠난 자리엔 혈액팩 네 개가 남았다.

한번 집어봤는데, 물컹물컹했다. 뱀파이어들은 이걸 대체 어떻게 먹는 걸까. 기성품 코너에서 수혈 도구 같은 건 못 봤는데, 빨대 꽂는 구멍이라도 있나?

[ 찬아, 서큐버스 손님 이제 좀 어때? ]

“아직 못 먹였어요, 방금 민짜가 술담배 사러 왔다가 가가지고.”

[ 진짜? 와, 큰일 날 뻔했네. 누구였어? ]

“뱀파이어요. 아까 이런 놈 가끔 온다고 하지 않으셨나?”

[ 가끔 오는 게 맞는데, 찬이 네가 오늘 고생 좀 하네…. ]

“그러게 말입니다….”

일을 해도 해도 시간이 안 가, 시간이 안 간다고. 이놈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경보 울리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

“경보요? 이것도 마법 같은 게 걸려있는 건가?”

원래 편의점은 경보고 뭐고 없다.

[ 응. 위조신분증 들고 들어오면 경보 울리게 해놨어. 대부분은 다 그걸로 잡았고. ]

“그냥 아날로그로 해놨던데요. 커터로 긁어서 숫자 부분 지운 다음에, 거기다가 위조 스티커 붙여가지고. 말하는 거나 행동거지도 어려 보이긴 했고요.”

난 순전히 눈썰미로 잡았다 생각했는데 말이다.

회사생활 3년 내내 거래처 상대하고 공사 다니면서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은 한 번도 못 만나봤고, 자연스레 눈치가 늘 수밖에 없었다. 그 눈치를 편돌이 하면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허나 점장은 이 부분에선 단호했다.

[ 그게 더 어려워. 청에서 발급하는 신분증은 위조 방지용 장치가 엄청 많이 걸려 있어서,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훼손하기도 힘들거든. 그 마법을 해제하는 데에도 엄청 마법을 썼을 거고, 그렇게 푼 신분증에 추가로 마법을 안 걸었을 리도 없고…. ]

“경보 마법도 안 울릴 정도로요?”

[ 위력이 센 걸 걸어둔 건 아니거든. 지금까지는 문제없었고. ]

“그럼 저 민짜가 마법적 능력이 탁월한가 봅니다. 하긴, 뱀파이어니 그럴 수도….”

[ 그건 아니고… 원래 뱀파이어들 집안이 대체로 돈이 많아. ]

20세도 안 된 뱀파이어가 수입이 많을 리는 없고, 부모님 고혈 빨아서 만든 위조신분증이었던 모양이다. 집에 돈이 많으면 골프를 치러 가라. 혹시 모르잖아, 프로 골퍼가 될지.

하여튼 이건 그렇구나― 하고 대충 넘길 부분은 아닌 듯해서, 한번 정리를 해봤다.

그 민짜 뱀파이어가 내민 신분증이 실은 온갖 마법이 걸린 위조신분증이었다, 점장이 말한 걸 난 이렇게 이해했다. 근데, 난 마법이고 뭐고 못 느꼈는데?

“음….”

점장도 쉽사리 대답하긴 힘든 문제인 듯했다. 생각하시라 하고, 서큐버스한테 약부터 먹이기로 했다. 포장을 까서 알약 두 개를 집은 뒤, 서큐버스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걸 어떻게 먹이냐….

아, 몰라. 빨리 끝내고 계산대나 볼란다.

그냥 입술에 손가락으로 한 알씩 밀어 넣었다. 여자 입술을 상대로 한 생애 첫 스킨십이 이런 식으로 이뤄질 줄이야.

넋이 나가 있던 서큐버스는 입 안에 들어간 알약 두 개를 우물대다 삼키고, 작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바로 점장에게 보고했다.

“손님한테 약 먹이긴 했는데, 이걸로 정말 저주가 낫나요?”

[ 낫긴 나을 거고, 음… 엄밀히 말하면… 저주라기보다는, 직업병? ]

이건 또 뭔 소리야. 직업병을 약으로 치료해?

[ 그 서큐버스, 대충 사회초년생으로 보이지 않아? ]

말을 듣고 바라보니 그렇게 보이긴 했다. 입고 있는 슈트도 비싸 보이진 않았고, 갖고 있는 서류 가방도 산 지 얼마 안 된 새삥으로 보였으니까.

이후 점장의 설명이 이어졌는데,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일단 내가 갖고 있는 서큐버스의 이미지는 대충 이렇다. 매료, 매혹으로 사람에게 거짓된 사랑을 심어 홀린 뒤 사랑을 나누고, 그걸 자신의 힘으로 삼는 음마.

이 세계 서큐버스도 크게 다르진 않았으나, 그 방식이 엄청나게 건전했다. 그러니까, 이 서큐버스라는 종족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개입하는 업종 전반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제약 회사에 들어가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키우거나 줄이는 약물을 개발하고, 정신과 의사가 되어서 사랑에 대해 상담하거나 콘돔 제작 회사에서 일하는 등.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말이다. 짐작이 되긴 했지만 물어봤다.

“왜요?”

점장은 짐작한 대로 대답했다.

[ 서큐버스들은 원래 그래. ]

종족 특성이라 그런 거였다.

그리고 이 사회초년생 서큐버스의 경우에는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자기가 취직한 곳에서 일하는 과정에서 마력이 과주입된 듯하다는 게 점장의 추측이었다.

[ 마침 근처에 제약 회사가 하나 있거든. 거기 직원분 아닐까? ]

“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나 보네요.”

[ 응. 지난달 일인데, 서큐버스 한 분이 발가벗고 들어오셔서는 널빤지 두 개랑 밧줄, 매직을 달라고 하셨거든. 빨리 보내야겠다 싶어서 팔았더니, 그 자리에서 널빤지 양쪽에 ‘안아줘요’라 적어서는 몸에 걸치고 나가셨어. ]

“…….”

[ 경찰이 잡아갔고. ]

나도 조만간 그런 손님 받을 수도 있단 소리로 들린다. 조심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이걸 어떻게 조심해야 되냐? 오는 손님 막을 수도 없고.

[ …아. 혹시 모르니까, 찬이두 검진기 한번 몸에 써봐. ]

“저도요?”

[ 응. 지금 그 서큐버스분이 위험한 게, 그때도 전염이 됐었단 말이야? 좀 여러 명한테. ]

당장 몸에 검진기를 사용해 봤다. 액정은 연보라색으로 점멸하진 않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알람이라도 된 마냥 삑삑거리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나서 물었다.

“점장님, 소리 들리세요?”

[ 응, 잘 들려. ]

“이 경우엔 어떤 겁니까?”

[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째는 마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거. 이 경우엔 엄청 위험한 거라 바로 병원 가야 돼. 근데 찬이는 다른 세계 사람이라 그 문제는 없을 것 같구…. ]

내 입장에선 점장이 다른 세계 사람인데 말이다. 이어서 점장이 말했다.

[ 둘째는, 저항 마법 때문에 측정기가 작동 안 하는 거. ]

나로선 영문을 모를 일이라 점장이 말하는 걸 가만 기다려봤다. 좀 더 고민하는 듯하던 점장이 대뜸 말했다.

[ 찬이는… 아무래도 마법이 안 통하는 몸 같은데. ]

“아니, 그건 또 뭔 소리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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