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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편돌이-17화 (18/201)

17화. 상담하는 편돌이 (1)

편의점에서는 사직서를 팔지 않는다.

애초에 사직서가 돈 주고 사고팔 만큼 복잡한 양식으로 되어있는 게 아니잖아. 그냥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한 줄 써서 직장 상사한테 집어 던지고 휘파람 불며 걸어 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 앞으로 볼 일도 없는 양반인데?

사실 사직서 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나 다니던 회사는 내가 사직서 내기도 전에 지가 알아서 망해버렸거든. 일단 매뉴얼대로 대답했다.

“없는데요.”

“그럼 뭐가 있어요…?”

“담배, 주류, 견과류, 유제품,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죠.”

“저 배는 안 고픈데….”

그래 보인다. 술 냄새가 제법 났으니까, 뭐 안줏거리도 같이 먹긴 했겠지.

비틀대는 서큐버스를 정문에 세워놓기도 뭣해서 일단 테이블로 데려와 앉혀놨다. 여기가 편의점인지 취객 임시휴게소인지 모르겠네.

“…….”

앉혀놓자, 서큐버스는 다리를 좁혀 조신히 앉은 채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눈물이 글썽한 눈동자로 추측건대, 기분이 굉장히 우울한 듯했다. 그러니까 사직서를 찾겠지.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었고, 내 일이나 하련다.

카운터로 돌아와 손님들 적는 명부를 챙기고, 저주 검진기도 같이 챙겨 돌아왔다. 지금 상태가 메롱인 게 상사병보단 술이 원인인 듯하지만, 혹시 모르잖은가.

“손님. 매장에 계시려면 이거 써주셔야 되거든요.”

“아… 어제 그거네….”

“그리고 저주 검진할 테니 잠깐 팔 좀 내밀어 주세요.”

순순히 팔을 내밀어온다. 이 서큐버스는 꽤나 복잡한 알고리즘의 술버릇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편의점에서 사직서 찾는 거 보면 제정신은 아닌 게 분명한데, 말은 꼬박꼬박 잘 들어.

팔에 대고 찍어봐도 별 반응은 없었다. 이번엔 약 찾아다 먹일 일은 없을 것 같다.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런데 사직서 정말 없나요…?”

“사직서는 정말 없고, 이력서는 있긴 합니다.”

“이력서는 회사 그만두면 사러 올게요….”

그러든가….

우울해하는 서큐버스를 내버려 둔 채 카운터로 돌아와, 새벽 2시를 맞은 바깥 거리를 한번 바라보았다. 쌀쌀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출근 직후만 해도 그럭저럭 북적거리던 사거리는 한산해진 지 오래고, 행인은 억지로 훑어봐야 간간이 있는 수준이다. 제법 한가해졌으니, 오늘 근무는 이 한가한 분위기 그대로 끝이 날 듯싶었다.

저 서큐버스만 집에 보낼 수 있다면 말이야. 막차도 이미 끊겼을 텐데 집엔 어떻게 가려나 모르겠다. 또 택시 불러줘야 되나?

10분이 지나도 도저히 일어날 기미가 없길래, 아까 치와와가 던져주고 간 숙취해소제를 집어 서큐버스에게 돌아갔다.

“손님, 속 괜찮으십니까?”

“아파요….”

“이거 드십쇼. 술 드신 분들 이거 많이 찾더라고.”

“아… 네. 그런데 이거… 어떻게 먹어요…?”

그야 물이랑 같이 먹, 아. 괜히 가져왔네.

편의점엔 정수기가 없다. 즉, 숙취해소제를 먹이려면 물도 같이 사다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 사다 먹으라고 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내가 먹으라고 건네준 거고, 줄 거면 물도 같이 갖다주는 게 맞지 않냐는 생각이 들더라고. 냉장고에서 600원짜리 미네랄워터 사다가 결제하고, 일회용 커피컵에 물 따라서 건네줬다.

“이것들 얼마인가요…?”

“그냥 드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저도 마침 목말랐고.”

“…감사합니다.”

서큐버스는 느릿느릿 고개를 꾸벅인 뒤, 피로회복제 포장을 뜯어 가루를 입에 털어 넣고 물 한 잔을 벌컥 들이켰다.

이어 찬물에 머리가 띵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찬물 기운에 술이 좀 깼는지 살짝 또렷해진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저, 사장님. 그런데 저, 여기 오래 있어도 되나요…?”

안 된다.

명분은 없다만, 술 취한 손님을 편의점에 가만두는 게 영 내키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서큐버스의 경우엔 특히 더 그랬고. 계산대에 부침개 부쳤잖아.

“그건 좀 그런데. 콜택시 불러드릴까요?”

“그… 제가 이번 달 돈이 빠듯해서, 택시 탈 돈이 없어요….”

“그럼 술은 뭔 돈으로 드셨답니까.”

“직장 동료랑 같이 먹고… 걔가 샀어요. 걔는 금수저라서.”

“좋은 동료 두셨네.”

이후, 살짝 머뭇거리던 서큐버스는 내게 재차 고개를 꾸벅이며 말해왔다.

“그, 죄송해요.”

“어떤 게요?”

“계산대에서 제가, 그… 그, 그거 한 거….”

자기 입으로 말하긴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는지 말을 엄청 더듬어댔다.

“부침개 부치신 거?”

“어… 네….”

얼굴이 새빨간 게 홍당무 같다. 그래도 그걸 기억하고 사과해 올 줄은 몰랐던지라 내심 놀랐다. 이렇게 나오니 속으로 떽떽거리기도 뭐하네….

“진짜 죄송해요, 다신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마음 쓰지 마요. 직장생활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사장님도 직장 다니셨었어요?”

“다녔었죠. 망해버린 탓에 편돌이 하고 있지만.”

“에고… 어쩌다가요?”

그걸 설명하기엔 내 출신이 좀 그런데. 그나저나 왜 내가 이 서큐버스랑 대화를 하고 있냐?

편의점에서 손님이랑 이렇게 잡담 나누는 일이 자주는 아니어도 분명 있긴 있다. 대체로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편의점 와서는 라떼는 말이야~ 이러거나, 날씨 좋쟈? 나가 막 글씨, 벚꽃을 보고 왔는디… 하며 이야기보따리 풀어놓고 그래.

이해는 한다. 외롭고 서러워서 그렇겠지. 몸도 마음도 점점 늙어만 가는데, 세상 풍경은 자신에 맞춰 늙어주질 않으니까.

세상에 대고 왜 따라 늙어주지 않냐며 하소연해 봐야 들어먹질 않으니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을 해야 하는데, 상담에는 돈이 들잖는가?

그러니 싸고 만만한 편의점을 찾아오는 것일 터다. 물론, 사회초년생이 술 먹고 찾아와서 이러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하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말에 어울려주다 보면 술도 깰 거고, 그때면 집도 알아서 찾아가겠지.

“말씀드리긴 좀 그렇네요. 좋은 추억은 아니라서.”

“아, 네… 죄송해요. 괜한 걸 물었네.”

“그런데 집에는 어떻게 가실 생각이세요? 막차도 끊겼을 텐데.”

“그러게요….”

난 택시비 못 내준다. 생각하며, 바깥 광경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시커먼 하늘 아래, 광원이라고는 사거리 삼색 신호등의 빨간불 몇 개가 전부다. 저 멀리에 불 켜진 술집들 간판이 몇 보이긴 했지만, 저런 데서 시간을 때울 돈이 있었으면 진즉에 택시를 탔겠지.

이런 상황에서 나가라고 내보냈다간 몇 시간 거리를 배회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권했다.

“아예 첫차 올 때까지 있다 가셔도 됩니다.”

“그래도 되나요…?”

“부침개만 또 안 부치시면요.”

“아, 안 그래요. 아이, 참….”

서큐버스는 부끄러운지 몸을 숙였는데, 양복 등 쪽이 얕게 씰룩거리는 게 보였다. 날개가 파닥거리나 보다. 어차피 어울려 주기로 한 거, 궁금한 점이나 좀 물어볼란다.

“그런데 무슨 직장 다니십니. 아, 이런 거 여쭤보면 좀 그렇나?”

“괜찮아요. 저, 제약회사 다녀요.”

어제 점장이 추측했던 게 맞았네.

“제약회사면 좋은 곳 아닌가. 그런데 그만둘 생각을 하세요?”

“그게, 여기가 첫 회사고, 일한 지 얼마 되지 않긴 했는데요.”

“네.”

“아무래도 일이 생각한 거랑 좀 달라서….”

“어떤 약을 만들길래.”

“묘약을 만들어요. 사랑의 묘약.”

잠깐 멍해졌다. 뭘 만든다고? 묘약?

“그런데 사랑에 대해서 상사분들이나 동료들이 얘기하는 게, 도저히 저랑은 맞질 않아서요….”

이걸 내 나름대로 이해해보려 했다. 쌍화탕 만드는 곳은 사람의 소화기관에 대해 잘 알아야 할 거고, 감기약 만드는 곳은 감기 바이러스에 대해 다는 몰라도 최소한 바이러스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알고 있을 거고….

사랑의 묘약을 만들려면 사랑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지. 여기까진 이해했다. 근데, 사랑이 도대체 뭔데?

“직장에 다른 분들은 어떻게 얘기를 하시는데요?”

“각양각색이죠. 저처럼 어렵게 생각하는 서큐버스도 있고… 쉽게 생각하는 서큐버스도 있고….”

서큐버스들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생각을 한단다.

키우는 반려견이 집에서 홀로 자신을 맞이해 줄 때 느끼는 감정을 사랑이라 생각하는 서큐버스도 있고, 쉽게 쉽게 ‘사랑은 게임이다’라 생각하는 서큐버스도 있고.

“직장에 서큐버스분들이 엄청 많은가 봅니다.”

“아예 서큐버스들밖에 안 뽑거든요. 아무래도 만드는 약이 약이라서.”

잠깐 상상을 해봤다. 각양각색의 오피스룩을 입은 서큐버스들이 몇 층은 되는 회사 건물 내에 바글바글하면 어떤 광경일까. 눈 호강은 실컷 하겠다 싶었다. 오피스룩 좋아.

어쨌든 이 소리들을 꾸역꾸역 다 듣는 걸 해낸 지금 내 심정은… 쥐뿔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걸 내가 어떻게 이해하냐고, 29년을 모쏠로 살았는데.

근데 더욱 웃긴 게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요….”

“네.”

“제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이 서큐버스도 모쏠이란 점이었다.

이 말을 할 때는 귀가 불이라도 난 마냥 새빨개졌으며 얼굴은 양손에 파묻은 채였는데, 서큐버스 입장에선 모쏠이란 게 수치에 가까운 듯했다. 이건 우리 세상도 마찬가지이긴 하다만.

이걸 어떻게든 받아들여 보려고는 했다. 회사에 입사했는데 회사 업무에 도저히 적응을 못 하겠단 거잖아. 생각했던 거랑 달라서.

정리해보니, 내가 위로를 해줘야 할 상황 같다. 뭐라도 말을 꺼내 봤다.

“손님도 모쏠이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예…? 왜요…?”

“아니, 그… 예쁘시잖습니까. 맨정신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소리긴 한데.”

왜 모쏠인지 이해가 안 되기도 했고. 이세계에서 서큐버스들을 이종족들이 어떻게 보는지는 난 모르지만, 내 주관으로 봤을 땐 이 서큐버스는 도내 탑클래스 미소녀 같아서 그랬다.

반면 내가 모쏠인 이유는 심플하다. 모쏠이어야 할 얼굴이라서 그렇다. 서큐버스는 여전히 얼굴을 손에 파묻은 채로 대답해왔다.

“…고마워요, 사장님.”

더 얘기했다간 낯뜨거운 소리들만 나올 것 같아, 바로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너무 염려 마십쇼. 원하기만 하면 금방 남자친구 생기시지 않겠습니까.”

“…그, 사장님.”

“네.”

잠깐 말꼬리를 늘여 묻는 게 수상쩍긴 했으나, 일단 대답했다. 이후, 서큐버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사장님께서는 그,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글쎄, 나 모쏠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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