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1개국어 편돌이 (2)
이세계에서 거인의 사전적 정의를 짧게 요약하면 이러하다. 최소 신장 4m 이상, 최대 신장 30m가량. 평균으로 따지면 건물 5층 높이 정도다.
“그분들 화장실 가고 싶을 땐 어떻게 한답니까. 댐 막히는 거 아녜요?”
[ 그럴 일은 없구, 그분들은 아예 딴 데서 살아. ]
이유를 상상해 보니 쉽게 수긍이 갔다. 잠깐 산책만 나와도 신호등이며 송전선이며 죄다 박살 내고 다닐 것 아닌가. 겸사겸사 자동차도 몇 대 밟고 지나갈 것 같고….
이런 이유로 거인들을 위한 거주 특구가 세상 어딘가에 지어진 채라 하고, 사업상의 이유 혹은 법적으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곳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중범죄에 해당한다고 한다.
하여 이 거리에서 거인들을 볼 일은 없으니 안심하라는 것이 점장의 설명이었으나, 난 이게 궁금한 게 아니었다.
“그럼 저… 중인족들은 뭡니까.”
[ 중인족은 중인족인데. 왜? ]
“거인족, 중인족 분류 기준이 잘 이해가 안 돼서 말입니다….”
[ 거인보단 작구 소인보단 큰 분들. 이 크다는 게― ]
신장이 기준이고, 3m 이상에 4m 미만 정도면 중인족으로 분류된다고. 벨로시랩터가 딱 이만하지 않나?
이놈들도 일반적인 이종족들이 사는 동네에 몰아넣기엔 키가 크긴 했지만, 거인족들이 사는 동네에 같이 살라고 두자니 그것도 애매했다. 살아 움직이는 축구공 취급당할 것 아닌가.
하여 중인족만을 위한 특구 역시 따로 존재한다고는 하는데, 정작 여기서 사는 놈들은 별로 없단다. 땅덩어리만 넓고 할 게 없어서 심심하다나 뭐라나.
이게 싫어서 이놈들이 십수 년 전부터 ‘우리도 늬들 사는 데에 좀 놀러 가자’라며 시위를 해대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관광이나 취업비자를 발급받아 생활하게 하는 법안이 십수 년 전에 통과가 되었고….
동시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이 중인족 놈들의 성격이 점차 괴팍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요?”
[ 음… 일단, 키가 크잖아. 큰 만큼 힘도 세구. ]
“겉으로 보기엔, 예. 그렇게 보입니다.”
“키 크고 힘센 분들이 작은 이종족들이랑 같이 지내다 보니까, 본능적으로 우월의식을 갖게 돼서 그런 게 아닐까… 라고 하더라구. 학술지에서.”
학술지는 모르겠고, 갓 중고등학교 입학한 몸집 크고 힘센 놈들이 일진이 되어가는 과정을 길게 늘이면 딱 이런 느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
“점장님 의견은 어떠세요? 학술지 말고.”
[ 음… 나도 손님으로 몇 번 받아봤지만, 그땐 이런 인상이었어. 좀, 어… 자기중심적이신가, 같은? ]
“저도 비슷… 아, 점장님, 잠깐 전화 끊겠습니다.”
말하고 스마트폰을 잠깐 내려놓았다. 거인, 아니. 중인족 세 놈 중 하나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500ml들이 콜라 세 병을 카운터에 올려놓고, 이어서 4,400원을 꺼내 올려놓는다.
값이 안 맞았다. 콜라 한 병 값이 2,200원이니까.
4,400원만 올려놓은 걸 보면 2+1을 생각하고 온 듯한데, 콜라 2+1 이벤트가 4월 30일부로 끝났단 말이지. 지금은 5월이고.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거 2+1 아니세요. 이벤트 끝나서.”
“??????”
“6,600원이라구요. 2,200원 더 주셔야 돼요.”
“??? ???? ?????? ????? ??? ????? ?”
이놈 말 듣고 알아먹는 건 이제 포기하련다.
카운터 밖으로 나와 포스기 뒷면의 액정에 떠오른 가격을 가리키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인족 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2,200원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후, 콜라 한 병을 홱 낚아채고는 계산을 마치기도 전에 그냥 가버렸다.
이리하여 계산대 위에 콜라 두 병과 2,200원이 고스란히 남아버렸는데, 이런 경우가 진짜 짜증 나는 경우다. 안 살 거면 진열되어 있던 곳에 다시 좀 집어넣고 가주면 안 되냐? 이거 어려운 건가?
저놈들이 신경을 벅벅 긁는 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저놈이 가지고 나왔던 콜라를 진열하고 계산대로 돌아오니, 세 놈 중 하나가 막 웃음을 터트린 참이었다.
“??? ?? ????????, ??????, ??? ?????????? ?!”
“???? ??????? ???, ???? ?????!”
1분, 2분 정도 기다리면 그래도 좀 적당히 하겠거니 하면서 참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저게 쇼윈도 너머에서도 들리는 건지, 길을 걷던 이종족들이 힐끔힐끔 안쪽을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다시 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점장님, 저놈들 오지게 떠드는데 말입니다….”
[ 음, 단순히 떠들기만 하는 건 크게 상관없…. ]
“?????? ???, ?????!!”
[ …진 않네. ]
“점장님도 들리시죠. 저 지금 귀먹을 것 같습니다, 저놈들 장부에 연락처랑 거주지도 안 적었구요. 이거 안 적으면 큰일 나지 않습니까?”
[ 큰일까지는 아닌데, 이따가 엘프 경찰분 오면 뭐라고 하시긴 할 것 같은데…. ]
“그럼 지금이라도― 아니 뭐 하십니까, 손님!”
이 미친놈들이 웃옷은 갑자기 왜 벗는 거야?
바로 전화를 끊고 뛰어가니, 중인족 셋이 각자 티셔츠며 남방이며 벗어젖히고는 그걸 부채 삼아 서로한테 펄럭이고 있었다. 오크들이 문짝으로 서로 두들겨 패는 광경보다 이게 몇 배는 더 초현실적이다.
“손님, 대화하는 건 상관없는데 옷은 입고 떠드십쇼, 여기가 사우납니까?”
“???? ???? ???? ??????? ????? ?”
“이런 씨, 옷 입으라고 옷! 웨얼! 웨얼 유어 셔츠!”
“??? ???? ?????? ???????? ?? ?????????? ? ????? ?”
“이런 망할, 뭐라는 건지 알아 처먹을 수가 있어야지.”
“??????”
“옷 입으라고요!!”
어차피 말해도 못 알아 처먹을 거, 어조에 답답함과 긴박감이라도 실어보려 했다. 내 유니폼 끝자락도 들어 보이고 이놈들이 벗어젖힌 옷에 대고 삿대질도 해봤으나, 아예 관심조차 보이질 않았다.
“?????, ????? ? ??????!”
오히려 어딘가를 가리키며 나한테 큰소리를 쳐대길래, 가리킨 곳을 보니 창문이었다. 정확히는, 반투명 가림막 스티커 붙은 부분.
어차피 안 보일 거 뭐가 문제냐는 뜻인 것 같은데, 내가 보이잖아, 내가. 내가 뭔 죄를 졌다고 늬들 가슴털 보면서 근무를 해야 돼?
“저게 손님들 가슴털 가리라고 붙인 것도 아니고, 들어온 손님들이 보면 손님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
“아니 글쎄, 조용히 있지 말고 옷 좀 입으라니….”
얼굴을 보니 입을 꾹 다문 채로 시선이 정문을 향하는 채였다.
바라보니, 오토바이 헬멧을 쓴 경관 하나가 물끄러미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아, 신이시여.
서로 눈치를 보고는, 뭐가 불만스러운지 작은 소리로 구시렁거리면서도 다시 옷을 입기 시작한다. 이후 대화하는 목소리도 줄어든 걸 확인한 뒤 계산대로 돌아오니, 헬멧 안쪽에서 가라앉은 어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경 이루엘입니다.”
“…음료수라도 하나 드시렵니까, 경관님?”
“사양하겠습니다. 헌데, 저건 무슨 일입니까.”
“어떤 거 말이세요?”
“사건입니까.”
중인족 쪽을 힐끗 바라고는 묻길래, 옳다구나 하고 일러바쳤다. 하마터면 저놈들 스트립쇼를 볼 뻔했다고 말이다. 말을 마치고 대답을 기다렸더니, 잠시 말이 없던 엘프가 역으로 물어왔다.
“하의도 벗었습니까.”
“예?”
“저 중인족들이 직원분의 성욕을 자극하거나, 수치심을 유발하거나,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를 저질렀냐 여쭙는 겁니다.”
“어….”
이걸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싶었으나, 말하는 어조며 수첩을 꺼내는 거며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건 아니지만….”
“그 외에 고성방가, 영업방해, 손괴 등으로 추정 가능한 행위를 저지른 것이 있습니까.”
“뭐라 웃고 떠들긴 했습니다. 2분 정도.”
“애매하군요.”
뭐가 애매하단 거야. 진짜 콩밥 먹이려고?
이 엘프를 만난 게 이번이 고작 세 번째뿐이긴 했지만, 벌써부터 어떤 성격인지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았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타입인데, 그게 좀 심해.
내가 콩밥 먹이고 싶단 게 아니라, 업무 보고 나갈 때 같이 좀 데리고 나갈 수 없냐는 바람으로 물어본 거였는데 말이다. 중인족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길래, 오히려 일이 커지겠다 싶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경관님, 그 살쾡이 도둑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몸을 틀어 날 바라보고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어투로 대답해 온다.
“자수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아, 정말요?”
“예. 금일 오후 6시경, 당사자가 직접 찾아와 자수했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던 죄목에서 변경사항 없이 검찰에 사건을 이관하였으니, 직원분께서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말을 하던 도중, 내 얼굴을 슬쩍 바라보고는 말을 돌린다.
“…된다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안색이 썩 좋지는 않으시군요.”
알아봐 주니 참 고맙다. 이걸 내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이 동네 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편의점 털다 붙잡힌 도둑놈이 1심에 징역살이를 하면서 살게 될 것 같진 않다. 왜, 인터넷에 그런 기사들 있잖은가. 앙심을 품은 범인이 현장에 다시 찾아와 어쩌고저쩌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자수하며 말해왔던 게… 그 코볼트가 이 편의점에서만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던 것 같고.”
“심지어 여기만 턴 것도 아니에요?”
“최소 8건, 정도. 집행유예로 끝날 일은 없을 테니, 찾아올 수도 없을 거고….”
이후 덧붙인 내용이, 이게 들킬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 못 했는지 심문을 당하면서도 불안에 가득한 눈치더라. 심문하면서도 자기가 깜빵에서 몇 년 살게 될지부터 물어보더라. 그만큼 소심한 녀석이니 복수하는 것 따위는 당연히 꿈도 못 꿀 거다.
“지갑은 암시장에서 구한 듯한데, 걸려있던 마법이 해제되어 있어 추가로 알 수는 없겠더군요. 직원분께서도 짐작 가는 건 없다고 하셨고….”
“네.”
“…그렇다면, 자체 파괴 마법이 추가로 걸려있었다는 얘긴데….”
내가 제대로 말을 안 한 탓에 일거리를 더 늘려버린 것 같다. 솔직히 말하고픈 마음이 없는 건 아니긴 한데, 이젠 말하기도 애매해. 나 괘씸죄로 끌려가면 어떻게 하냐?
“여하튼, 이곳이 더 이상 해를 입을 일은 없을 겁니다. 혹 더 궁금하신 것 있으십니까.”
“그… 다 듣고 나서 말씀드리는 것도 웃기긴 한데, 그런 것들 다 말씀해 주셔도 되는 거예요?”
이렇게 들으니 안심이 되긴 했는데, 가해자를 보호한다든지 보안을 유지한다든지 하는 그런 법률도 따로 있지 않나. 떠오른 대로 묻자, 엘프는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는 대꾸해 왔다.
“말씀 안 드리면 잠 못 주무실 것 아닙니까.”
제 딴엔 농담이었는지, 목소리에 미세하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외에 궁금한 건 더 없으십니까.”
적어도 여기에 대해선 더 대화하고 싶지 않다. 숨기는 게 있는 상황이니, 괜히 이 주제로 더 대화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궁금한 게 없다고 하면 다시 돌아가 버릴 텐데, 돌아가고 나면 저 중인족 놈들이 경찰 나갔다고 또 떠들어댈 게 분명하단 말이지. 뭐 잡담거리라도 없나….
“아. 경관님, 이거 안 적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까 점장과 출입 명부 얘기하다 말았다. 출입 명부를 꺼내 내미니, 이 엘프가 잘 안 보였는지 아예 헬멧을 벗어버리고는, 명부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귀를 쫑긋거리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린다.
“왜 그러십니까, 경관님?”
“…….”
몇 번이고 귀를 쫑긋거리다가, 느닷없이 허리춤의 경광봉을 꺼내서는 자기 머리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뭐 버릇 같은 건가?
그러다 중인족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고는, 무감한 어조로 대답해왔다.
“저기서 제 얘기를 하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