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46화 (47/201)

46화. 나아가는 편돌이

전화는 거기서 끊었다.

정문 고쳐놓고 나니 뜨문뜨문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손님 받아야 할 것 같다 했더니, 점장이랑 누나가 아예 아침에 얼굴 보면서 얘기하자 하더라.

매장 정리하는 데에만 몇 시간은 걸릴 것 같았던지라, 나도 그러겠다고 했다. 하여 새벽 내내 물건 정리하고, 박살 난 초콜렛 진열대도 고쳐놓고….

아침 되어서 직장인들 러쉬도 막아내고. 9시 땡친 직후에 정문으로 누나가 들어왔다.

“어이, 이찬. 누나 왔다.”

“이틀 만에 보네. 점장님 집에서 바로 온 거야?”

“화장 마저 하고, 출근 10분 전엔 오겠다던데?”

점장님 집에서 자고 오기라도 한 건지 머리를 덜 빗은 채였지만, 원본이 뛰어나다 보니 제법 그림이 나오더라. 곧바로 음료 창고로 가서는 피로회복제 두 병을 들고 와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씨익 웃으며 말해왔다.

“이찬. 네가 소개해 준 작업장, 일 엄청 잘하더라.”

“아. 진짜?”

“어. 마수 한 마리 가계약으로 맡겨봤는데, 두 시간 만에 끝내주더라고. 문제없이. 두어 번 더 일 맡겨보다가 아예 계약 맺어버렸어. 3년짜리.”

잘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식으로 명함을 건네준 거였는데, 전자 쪽으로 흘러갔나 보다. 계산을 마치자, 사 온 두 병 중 하나를 내게 내밀어온다.

“그래서 약속한 대로 너 게 한 마리 사주고 싶은데, 언제 한번 시간 내지 그래?”

“게는 됐고, 그냥 이거 받아먹는 걸로 땡치면 안 돼?”

“왜? 맛있게 하는 집 아는데.”

그 맛있게 하는 집에 가서 먹으려면 내가 거길 가야 하는 거잖아. 그리고 난 이 동네 게를 먹고 싶은 마음이 없다. 게 앞다리랑 주먹다짐을 벌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 덕분에 어제도 야근 안 하고 시간 낸 거고 말야.”

“그거면 됐지, 뭘.”

명함 하나 건네준 게 전부니, 그걸로 이것저것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누나가 건네준 피로회복제를 들이켜고 있자니, 누나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래, 이 얘기는 나중에 하자. 너 엄청 졸려 보인다.”

“실제로도 졸린데?”

그냥 졸린 게 아니라 더럽게 졸렸다. 매장 정리하느라 진이 빠졌던 것에 더해, 어젯밤에 했던 얘기로 생각을 좀 많이 했기 때문이다. 자격증은 또 무슨 소리야?

묻자, 누나가 창가 쪽 테이블을 가리켰다. 따라가 앉고서야 누나가 말을 꺼냈다.

“어제 언니랑 좀 오래 얘기를 해봤는데….”

그 얘기 내용이 이랬다. 내 체질은 사용하다가 발전하든,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하든 계속 성장을 해나갈 건데, 이걸 대체 어떻게 숨겨야 하냐는 것.

점장은 최대한 내 정체를 숨기는 방향으로 방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체질을 억제하는 마도구를 구한다든가.

“그건 얼만데.”

“건강보험 적용하면 얼마 안 나오긴 하겠지만, 기간이 문제지. 병원 다니면서 몇 개월 통원치료 받은 기록이 있어야 되거든.”

쥐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이나 다름없어 기각됐단다. 이후에도 둘이 맥주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결국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내 생각엔 못 숨겨. 그거.”

“허어….”

“나도 헌터 일 하면서 반마법 전문가를 못 만나본 게 아니라 그래. 까놓고 말해서, 그 전문가들 네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걸? 연비 면으로나, 시간 면으로나.”

비행기를 태워준다 한들, 내가 다른 반마법 능력자를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여튼 내가 워낙 오버스펙인 탓에 숨기기가 하도 곤란할 지경이라, 점장이 아예 내가 여기서 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 건가까지 고민했다고 하는데….

“술을 얼마나 잡수셨길래 그런 생각까지 하셨대.”

“혹시나 싶어서 묻는 건데, 이찬 너 여기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둘 거야?”

“아니. 전혀.”

난 여기 말고는 일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만화에서나 볼 법한 이세계 트립을 해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미치지는 않고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 있는 한,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내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 덕이다.

지금까지 내 출신이 들키지 않은 것도 이 세상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닐 일이 없는 덕이라 생각하고 있고. 그러니 안 그만둘 거고, 못 그만둔다.

내 대답을 들은 누나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곧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왔다.

“언니가 네 대답 들으면 좋아하겠네.”

“얘기나 마저 해줘, 누나. 자격증 따는 게 이거랑 상관이 있어?”

아예 나 반마법 능력자요― 하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란 소리 같아 물었다. 의견을 말하자, 누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기는 한데, 요점만 말하면… 명분이 생기지.”

“어떤 명분.”

“언니한테 들었는데, 너 지금 정직원이라며. 일반 정직원.”

“어.”

“그러지 말고, 아예 국가자격증 따서 전문가 자격으로 재계약하라는 얘기야. 그러면 네가 이미 소속된 곳이 있으니, 네 능력이 어느 정도든 간에 다른 곳에서도 널 못 건드릴 거 아냐?”

잠깐 이해를 못 하고 있다가, 잠이 반쯤 깨는 듯한 기분이 확 몰려왔다.

요컨대, 이중 취업이 불가능한 신분이 되라는 거잖아. 그럼 고민들 죄다 해결되는 거 아닌가….

“그거참 묘안일세?”

“근데 이 얘기를 했더니, 언니는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을 거라고 하더라.”

“뭐 따로 문제가 있어?”

“내 생각엔 문제가 없거든? 아카데미 가서 시험을 치르긴 치러야 하는데, 너라면 필기든 실기든 전부 쉽게 통과할 거고… 그냥 이 세상 종족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건데,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지.”

문제 있는 거 맞네. 이 세상 종족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는 부분이 특히.

난 지금 이 세계에 발만 아주 살짝 담근 상태다. 몸을 담글 필요가 없었으니까.

당장 밖을 바라봐도 이종족들로 가득 찬 버스가 신호대기 중인 상태지만, 난 저 버스조차 아직 타본 적이 없는 것이다.

저 버스를 타야 하겠지.

시험장도 찾아가야 할 거다. 내 발로 직접. 번호표를 받아 이종족들 사이에 서 있어야 할 거고, 번호가 호명되면 시험을 치러야 할 거고….

재수 좋게 자격증을 따고, 재계약을 맺는다 해도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거란 기대는 안 한다. 그만큼 다른 누군가와 엮일 일도 많아질 거고….

그게 뭔 일이 될진 모르겠지만 말야. 내가 늘 고민만 많은 놈이라 그런가.

그렇게 사는 게 이 세상의 이종족들에겐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겐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소리지만, 난 아직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걸 할 수 있겠느냐. 누나의 제안이 내겐 그렇게 들렸다. 지금처럼 어중이떠중이 식이 아닌, 소속된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겠냐.

“언니는 너한테 말하기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내가 대신 물어보러 온 거야. 뭐, 자격증 못 따는 개인적인 문제라도 있어?”

대답하는 대신 역으로 물었다.

“누나. 어젯밤에 점장님이 내 걱정 많이 하셨어?”

“엄청. 어젯밤엔 네 얘기 말고 다른 말은 아예 한마디도 안 하더라.”

더는 생각 안 하기로 했다.

“문제없어. 전혀.”

점장이 내 걱정 한다는데, 뭐 어떻게 해?

현재 이 세상에서 내 사정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 점장인데, 내 개인적인 사정으로 더 맘고생 하게 만들고 싶진 않다. 될 대로 되라지.

대답하자, 누나는 의아하다는 듯 피로회복제 병을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재차 물었다.

“정말?”

“어.”

“나 참. 그럼 언니는 대체 뭘 걱정한 거람?”

“시험 못 통과할까 봐 그러셨던 거 아냐? 자격증 따는 게 쉬운 일도 아닐 거고.”

대화 주제를 돌려보려고 말을 꺼냈더니, 누나가 곧바로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푹 찔러왔다. 더럽게 아팠다.

“아, 뭔데!”

“이놈은 쌩 시골에서 상경을 했나, 내 말을 당최 믿지를 않네?”

“국가자격증이라며! 어렵다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됐고, 이거나 한번 만져봐 봐.”

그러고는 품에서 비닐 팩을 하나 꺼내 내게 내밀어왔는데, 안쪽을 들여다보니 크기가 10cm쯤 되어 보이는 흰색 어금니 같은 게 들어있었다.

“이건 또 뭔데.”

“다이아 울프 어금니. 작업장에서 작업한 거 받아온 거야.”

파충류 비늘, 말 염통에 이어 이번엔 이빨이야?

살펴봐도 흠집 하나 없는 걸 보면, 그 작업장이 발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나 보다. 비닐 팩에서 어금니를 꺼내며 중얼거리는 윤하 누나.

“작업은 깔끔하게 됐고, 정화 작업만 끝내면 되는데….”

나한테 맡기겠다는 말로 들린다. 누나가 이빨을 건네오길래 집어봤으나, 꺼끌꺼끌한 느낌만 난다는 것 외엔 딱히 이상한 걸 느낄 수 없었다. 뚫어져라 쳐다봐도 딱히 일그러져 보이거나 하지도 않았고.

“누나, 이거 별문제 없어 보이는데?”

“아, 그래? 확실히?”

“적어도 내 눈엔 그래.”

대답하자, 누나는 피식 웃고는 되물었다.

“작년도 자격증 실기 기출 문제 중 하나가 뭐였는지 알아?”

“모르는데.”

“아무런 마력이 없는 물건 던져준 다음에, 그걸 정화해보라고 시켰다더라. 정화하려 들면 불합격, 눈치채면 합격.”

덧붙이길, 정답률은 100명 중 5명이 겨우 맞추는 수준이었단다. 잠깐 생각한 후에야, 누나가 기출문제랍시고 이걸 던져준 거란 걸 깨달았다.

“너 바로 알아맞히는 거 보면, 최소한 실기는 문제없이 합격할 것 같은데?”

누굴 놀리냐고 핀잔을 주려 했는데, 웃는 얼굴이 하도 해맑아서 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웃는 얼굴 그대로 몸을 슬쩍 돌려 시계를 바라본 누나는, 앉은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고는 몸을 일으켰다.

“…어우. 할 얘기도 끝났으니, 나도 슬슬 출근 준비해야겠다.”

“뭐야, 오늘도 헌터 일 하는 거야?”

“그럼 안 하냐, 평일인데. 언니 오거든 나 잘 출근했다고 말해주고… 걱정 안 하게 대화 잘 해봐.”

그럴 생각이다. 손을 흔들자, 누나는 또다시 활짝 웃고는 편의점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후 손님은 없었고, 30분가량이 더 지나 점장이 왔다. 날 바라보자마자 뭔가를 말하려 하길래, 선수를 쳤다.

“점장님, 고민하시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요.”

“…응.”

“뭐… 까짓거, 시험 한번 치르고 말지. 설마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별일 있겠지. 하지만 그 뒤의 일은 뒤의 일이고. 점장 걱정하는 얼굴 보기도 이젠 싫다.

“그러니까 점장님도 제 걱정 마시고. 아직 시험도 안 치른 마당에 설레발 떠는 것 같긴 한데.”

“…찬이는 잘할 거야. 이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애니까.”

“29살 먹은 놈한테 애가 뭡니까, 애가.”

“나한텐 애인데, 뭘.”

말하는 점장 얼굴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역시 웃는 얼굴이 제일 보기 좋다.

“점장님, 근데 그 시험은 언제 치를 수 있는 겁니까. 연간 2회밖에 안 치른다든가, 뭐 그런 건 아니죠?”

“글쎄. 나도 일정은 잘 몰라 갖구… 잠깐만.”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점장이 손을 뚝 멈추고는, 화면을 바라보며 내용을 읊었다.

“금년도 반마법 자격증 시험이 있는 월이 5월이랑, 7월, 9월. 응시자가 적어서, 시험 전날까지도 접수받는대. 찬이는 언제가 좋아?”

“전 빠를수록 좋아요.”

마음고생 덜려고 치르는 시험이니, 빨리 치르고 빨리 편해지고 싶다.

“그럼 5월 일정 한번 찾아볼게. 필기시험 먼저 치러야 된다고 하구, 5월… 어… 그. 찬아, 오늘이 며칠이지?”

“3일이요. 왜요? 설마 다음 주입니까?”

“그게….”

눈을 두어 번 끔벅인 점장이 날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4일이라는데?”

뭐야, 내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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