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필기 보는 편돌이 (1)
점장이 휴가를 내줬다. 이틀짜리였다.
“그… 찬아. 접수는 내가 바로 할 테니까 일단 들어가서 자 내일은 밤에 나오지 말구. 듣고 있어?”
“듣고 있습니다. 듣고는 있는데, 이게….”
들은 내용이 머릿속에서 붕붕 떠다니고만 있다. 가본 적 한번 없는 곳을 가서 배워본 적 한번 없는 내용으로 시험을 치러야 하는 걸 제쳐두고서라도, 가장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신분증이 없잖습니까, 점장님. 나라 시험 치르려면 뭐라도 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아무 걱정 말구, 다 방법 있으니까―”
“어떤 방법 말입니까. 이 세상 행정부에 아는 분이 계시는 것도 아닐 테고….”
아무리 그래도 점장이 거기까지 마당발일까 싶어 아무렇게나 내뱉었는데, 점장이 이 부분에서 아예 침묵을 해버렸다.
“…….”
“점장님?”
“아, 아무튼 해줄 테니까 걱정 말구, 시험 시간 오전 9시라 하니까, 푹 쉬다가 아침 8시쯤에 편의점 와. 알았지.”
랜다. 함구해버린 게 무진장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일단은 제쳐두고… 진짜 이게….
“점장님. 이거 떨어지면 재응시 된답니까…?”
“응, 된대. 그러니까 오늘은 아무 생각 말구, 들어가서 쉬어.”
이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인수인계를 끝마치고, 점장에게 등 떠밀리듯 편의점을 나와 집에 들어갔고… 편의점에 있을 때는 그렇게도 졸렸는데, 막상 이불에 누우니까 낮이 다 지나는 동안에도 잠이 안 오더라.
해가 질 즈음에야 어떻게든 잠들었고, 눈 떠보니까 딱 오전 7시 40분. 혹시 몰라 집에 굴러다니던 컴퓨터용 사인펜을 주머니에 욱여넣고 편의점으로 가니, 점장이 턱을 괸 채로 계산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점장님, 저 왔습니다….”
“앗, 찬아.”
날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서는, 황급히 다가와 물었다.
“잠은 잘 잤어? 기분은 좀 어때?”
“자는 건 잘 잤는데, 기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에요.”
몸을 돌려 편의점 밖을 바라보았다. 근무한 지 거의 10일 가까이 됐지만, 내 주된 활동반경은 저 정문에서부터 딱 서른 걸음 바깥. 그게 전부였다.
근데 그런 나한테 버스를 타고 아카데미에 시험을 치르러 가래. 이게 말이 되냐? 교통카드도 없는데?
막막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점장이 내 손을 꼭 부여잡고는 말했다.
“괜찮아, 찬아. 내가 바래다줄 테니까.”
“점장님께서요?”
“응. 그 전에 우선 블라인드부터 치고….”
“아.”
공간이동을 하겠다는 의미다. 이걸 생각 못 하고 있었네.
블라인드를 치고 문을 걸어 잠근 후, 늘 하던 대로 정문을 등진 채 눈을 감았다. 점장이 어깨를 두드리고 난 후에 눈을 뜨고 돌아보니,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에 성, 그것도 정말 더럽게 큰 성 하나가 버젓이 서 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첨탑을 우뚝 세운 가장 거대한 성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건물 여럿이 빙 두른 채 자리 잡은 채였는데, 건물의 양식이 하나같이 이색적이었다. 어떤 건물은 현대식의 회색 빌딩인가 하면, 어떤 건물은 동양풍의 정자를 지붕으로 삼고 있다.
외에도 로코코 양식인지 르네상스 양식인지, 어렸을 적 중세시대를 다룬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건물이 수 채. 학원 지구에서 시험을 치른다 들었으니 여기가 분명 이종족들 공부하는 데여야 할 텐데….
“점장님, 여기 뭐 놀이동산이에요?”
“찬이네는 학교나 학원에 놀러 가는 거야?”
“정신 못 차리고 그러는 놈들이 몇 있긴 한데… 일단은 말 그대로의 의밉니다.”
“아하.”
이후 점장이 설명하길, 여기가 이 세상의 교육 기관 중에서는 제일 설비가 잘 되어있는 곳이란다.
중심이 되는 가장 거대한 성이 아주 옛날에 여러 이종족들이 합심해서 지은 성이라는데, 수십 년 전 전쟁이 터져 어지간한 건물들은 죄다 박살이 났지만 저 성만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화의 상징, 뭐 비스무리한 게 되어버렸다나.
하여 보수를 하고, 박물관이나 기념관 중 뭘로 써먹을지를 고민하다 ‘관상용으로 두지 말고, 여기서 아이들을 교육한다면 썩 괜찮지 않겠습니까?’라며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낸 게 그대로 채용됐고, 학원 지구의 첫 번째 건물이 되어….
수십 년간 조금씩 확장, 증축을 해온 게 지금에 이르렀단다.
“저만한 크기면 어지간한 과는 다 있겠네요.”
“웬만한 것들은 다 있지.”
헌터들 교육하는 곳도 있고, 점장 같은 마법사들 교육하는 곳도 있고, 공고, 공대 같은 곳도 있고. 또 뭘 가르치냐 물어보기엔 시간이 한참 부족할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음… 지금 위치는 어디쯤이에요?”
“학원지구역 근처. 원래는 나중에 오려구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아, 여기서도 장사하실 거라고 했었죠.”
“응. 왜?”
“아뇨. 별건 아니고.”
창밖을 바라보다, 떠오르는 대로 내뱉었다.
“멋져서요.”
나 사는 동네에 이런 곳 하나 있었으면 평생 심심하진 않겠다 싶었다. 내가 지금부터 저 안에 기어들어 가야 할 팔자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시험장은 저 중에 대체 어떤 건물이랍니까.”
“음… 약도상으로 보면… 저어기 오른쪽 건물 같은데.”
창가에 붙어서는 성의 우측을 가리키는 점장. 현대식 건물이었고, 제법 컸다. 최소한 길 잃을 염려는 없겠네.
나가려 했더니, 점장이 손에 이것저것을 들려주었다. 컴퓨터용 사인펜, 이건 갖고 왔는데. 외에도 캔 이온음료나, 알사탕이나.
“접수증은 시험장에서도 출력된다니까, 그냥 몸만 가면 될 거야.”
“알겠슴다.”
이후 나가려 했는데, 점장이 슬쩍 손을 붙잡아 왔다.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찬아?”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 있습니까. 장사하셔야지.”
“걱정돼서 그렇지. 찬이는 바깥에 돌아다니는 건 처음이니까….”
“시험 다 치르고 연락드릴 테니, 그때만 다시 와주셔요.”
버스 탈 일 없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정문 손잡이를 부여잡고 나가기 직전, 점장한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후딱 갔다 올게요.”
“응.”
* * *
기념비적인 이세계 첫 나들이가 이런 식으로 이뤄질 줄도, 그곳이 사거리가 아닌 학원 지구 뭐시기가 될 줄도 몰랐지만, 어쨌든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든 생각이, 고등학생 이하 이종족들이 사거리에 왜 그토록 드물었는지만은 아주 잘 알겠다는 것이었다. 여기가 학생들 천국이었으니까.
어딜 둘러봐도 교복 입은 학생들뿐이었고, 가끔은 교복 없이 가방, 실내화 가방만 든 코볼트, 뱀파이어 꼬맹이들도 보였고. 이 녀석들 모두가 예외 없이 다들 성을 향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더해서, 생각한 것보다 무섭거나, 꺼림칙하거나 그런 기분도 딱히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직장생활 하던 시절에 첫 제주도 출장 갔을 때의 그 느낌이다. 편의점 진상 놈들 상대하면서 면역력이 쌓여서 그런가.
이 동네 잼민이들은 뭔 얘기를 하나 싶어 귀를 기울여 봤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 하는 게임, 성인인증 안 하면 못 한대. 성 짓던 거 어떻게 해?”
“그거 어른들이 잘못한 거니까, 걱정하지 말래. 우튜브에서 그랬어.”
“진짜?”
“응. 근데, 게임 하는 게 어른들만 해야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왜 막은 걸까?”
그러게 말이다.
이 와중에 하늘에 뭐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 올려다보자 하피, 날개 달린 이종족들이 입에 식빵을 문 채로 취식 비행을 하고 있었다. 지각했나 보다.
이렇듯 인파의 흐름이 워낙 명확한 덕에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 정문으로 보이는 입구로 들어가니, 족히 20m는 뻗은 듯한 바윗길이 나타났고….
길을 쭉 따라가니 분수대가 나타났으며, 분수대 밑에는 큼지막한 글씨의 안내판 하나가 붙어있었다. ‘반마법 자격증 시험장, 300m ↗’라는 내용이었다.
안내판이 가리킨 방향으로 5분가량을 더 걸어, 미리 봐두었던 현대식 건물 코앞에 도착했다. 정문 위의 콘크리트에는 금빛으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헌터 이론 수업관’
봉황각, 현무관같이 알아먹지도 못할 이름이 아닌 게 마음에 든다. 앞 접수대 같은 곳에 양 머리에 양 뿔이 달린 수인이 앉아있길래,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여기가 반마법 자격증 시험장 맞나요?”
“네. 접수증은 가져오셨나요?”
고개를 젓자, 내 얼굴을 슬쩍 바라보고는 물어온다.
“인간이세요?”
아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냐…?
“죄송합니다. 급하게 접수한 거라….”
“아뇨, 괜찮아요. 접수증 안 가져오시는 분들이 몇 분 계셔서 익숙하거든요. 응시자님 종족, 인간 맞으시죠?”
“어… 아, 네.”
종족 물어본 거였구나. 대답하자, 접수대 테이블에 놓여있던 명단을 펼쳐 페이지를 몇 번 넘기고는 V자 모양 체크를 한 뒤 덮는다.
“성함이… 이찬 님. 확인되셨구요, 로비 안쪽 키오스크에서 얼굴인식 하신 후에 3층으로 올라가시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아, 그. 혹시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네. 어떤 거 말씀이세요?”
“혹시 응시자 중에 저 말고 다른 인간 종족도 있습니까?”
체크를 한 페이지에 딱 한 줄밖에 인쇄된 게 없어 물었다. 수인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올해는 없어요.”
“감사합니다.”
인간이 있었으면 고향 친구 만난 마냥 인사도 건네보고, 겸사겸사 예상 기출 문제도 좀 물어보려 했는데 말이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키오스크가 보였고, QR코드를 찍듯이 액자 모양이 떠올라 있었다.
얼굴을 갖다 대니 접수자임이 인증되었다는 문구가 떠오르고, 밑으로 종이 한 장이 드르륵 출력되었다.
쥔 채로 2층가량 계단을 걸어 올라 복도에 도착하니, 죄다 문이 닫힌 와중에도 딱 한 곳 문이 열려있는 게 보였다. 저기가 시험장인 듯하다.
들어서니, 어림잡아 일백은 족히 되는 이종족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시험 시간이 9시라던데, 이놈들은 왜 이리 일찍부터 앉아있나 몰라.
접수표에 적힌 번호대로 자리를 찾아 앉으니 왼쪽 자리가 미노타우로스, 오른쪽 자리가 오크였다. 앉아보니, 햄버거 고기 패티가 된 듯한 기분이 들더라.
시선도 피할 겸, 턱을 괸 채로 생각해 봤다.
누나는 내가 별문제 없이 시험을 통과할 거라 여기는 눈치였고, 점장도 시험의 합격 여부에 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근데, 시험 문제가 뭔지 알아야 나도 안심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뭔가 도움이 될까 싶어 오크 쪽을 슬쩍 바라보니, 기출문제집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채였다. 편의점에서 봤던 오크들과 같은 성격이라면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 죽빵을 갈겨버렸겠지만, 이 오크는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인텔리 같았다는 소리다. 왠지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을 걸었다.
“저기, 오크 형님. 죄송한데요.”
“…아, 저 말씀이신가요?”
대답해 오는 어투가 무척 정중했다. 배운 오크 맞나 보다.
“네. 혹시, 기출문제집 옆에서 잠깐만 보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아, 예. 닳는 것도 아니니까요.”
슬쩍 일어나, 오크의 시선이 닿지 않을 곳에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문제가 이러했다.
[ 산란기를 맞은 A급 마수 아라크네의 서식지에 습도 불균형이 일어났을 때의 원인으로… ]
일단 이건 넘기고….
*2022.10.31. 수정사항
초반부 신분증 관련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