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49화 (50/201)

49화. 실기 예행 편돌이 (1)

편의점에 돌아온 직후 점장에게 물었다.

“점장님, 저 신분증 진짜 어떻게 하신 겁니까.”

“어떻게든 했지. 딴 세상서 온 직원 받으려면, 이 정도 능력은 있어야 되는 거 아니겠어?”

굳이 말하고 싶진 않다는 말을 빙 돌려서 얘기해오길래 더 묻지는 않았다. 받는 입장에서 구태여 캐묻기도 미안하고, 이번 시험만 잘 해결하면 더 대화할 일 없을 주제이기도 하고.

그 대신이라 하긴 뭣하지만, 몇 시간 정도 근무를 서보려고 했다. 점장이 마법사 종특으로 하루 이틀 밤새우는 게 끄떡없다고는 해도, 받는 입장인 내가 마음이 전혀 편칠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기각당했다.

“찬이 서너 시간 일하구, 밤에 오면 밤새 근무할 수 있겠어?”

“…아뇨….”

할 수 있다고 해도 안 들을 것 같아서 솔직하게 말했다. 차라리 집에 가서 잠깐 씻고 오기라도 하셔라― 라고 했더니, 손님 없을 때마다 틈틈이 씻고 있으니 걱정 말라 하더라.

그래도 가능하면 정말 도와주고 싶었던 게, 사실 내 세상에 와서도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서 뉴스를 확인해 보니, 코로나 감염자가 하도 많은 탓에 PC방이고 노래방이고 죄다 영업이 중단된 상태라고 했다. 도서관은 물론이다.

이러니 갈 수 있는 곳이라 해봐야 카페 말고는 없었는데, 29살 남정네가 혼자 카페 가서 대체 뭘 하냐고. 그리고 나이 상관없이, 혼자서 가면 한두 시간 있기도 엄청 눈치 보이고 그러지 않나? 나만 그런가?

더해서 연락할 친구도 없는 아싸였던 탓에, 드러누워 잠드는 것 말고는 할 게 아예 없었다. 두어 시간 눈 껌벅이다 잠들고, 일어나 시간을 보니 딱 9시 40분쯤 된 채였다.

9시 50분 즈음에 출근하니, 점장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만면에 웃음을 띠어왔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어 물었다.

“점장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물론이지. 이거 봐봐, 찬아.”

말하며 점장이 스마트폰 화면을 슥 내밀어왔다. 눈으로 훑어보니, 필기시험 결과표였다.

“찬이, 문제 전부 다 맞혔대. 당연히 1등이구.”

“어….”

“내 말 맞지? 찬이 잘할 거라구 했잖아.”

내 점수 잘 나온 걸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는 게 고맙긴 한데, 이거 괜찮은 거 맞냐는 생각이 자꾸 든다. 만점 받았다고 기자가 찾아온다거나, 기사 실리지는 않겠지만….

“근데, 윤하는 심드렁하더라구. 별로 놀랍지도 않다면서.”

“누나는 제 사정 잘 모르잖아요.”

그리고 정작 나도 실감이 잘 안 난다. 학교 다닐 때 시험 만점 받아본 적이 언제였더라. 중학교 2학년 국어 시험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구, 실기는 내일 저녁이래. 7시쯤.”

“저녁 7시에 시험을 보래요? 그것도 일요일 저녁 7시에?”

“응.”

“일정 참 빡빡하네요. 뭔 크런치 기간도 아니고….”

“그분들 입장에선 길게 끌 이유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근무 교대가 얼마 안 남은 탓인지 점장도 더 길게 이야기를 이어가진 않았다. 대신, 계산대 밑에서 수박 모양 젤리가 가득 담긴 통을 꺼내 올려놓았다.

“나라면 실기 문제를 어떻게 낼까, 생각을 좀 해봤거든?”

“네.”

“그래 갖구, 이 젤리들에 각각 마법을 걸어봤는데. 예를 들면….”

뚜껑을 열어서는 젤리 한 알을 집어, 계산대 위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점장.

원래라면 툭 떨어져 어딘가로 굴러가야 하는 게 정상이었겠지만, 젤리는 빠르게 떨어지지도, 떨어져 툭 소리를 내지도, 어딘가로 굴러가지도 않았다. 느릿느릿 떨어져서는 계산대 위에 소음 없이 닿아, 그대로 고정될 뿐이다.

“이 젤리 한 알에, 대략 마법을 세 가지 정도 걸어놨어. 감속 마법이랑, 무소음 마법이랑, 충격 흡수 마법.”

“아, 이게 그, 세 가지 기술이 조합된 컴비네이션인가 뭔가 하는….”

“뭐, 그런 셈이긴 하지. 여튼, 찬이는 이 중에서 한 가지 마법만 골라서 없앨 수 있겠어?”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고개를 젓자, 점장은 젤리를 집어 다시 통에 넣고는 뚜껑을 닫으며 말을 마저 이었다.

“실기 시험에서라면 보통 이런 문제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적어도 점장 자신은 이걸 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면 고용하지 않을 거란다. 그러며 예시로 든 것들 중 하나가, 열차였다.

“기차의 기본적인 연료가 전기나 석유이긴 한데, 마력 기관이 안에 포함되어 있거든? 가속이랑 감속, 아니면 과열됐을 때 안정화를 도와주는 용도로. 여기까진 이해됐니?”

“조금은요.”

“응. 여기서 안정화를 돕는 마법이 불안정해져서, 해제한 후에 다시 걸어야 한다 치자. 근데 찬이가 건드려 버리면, 다른 마법들도 다 풀려버릴 것 아냐?”

여러 마법을 다시 손봐야 하는 만큼 수리 시간도 몇 배로 더 늘어날 거고, 그 선로를 쓰는 열차의 당일 운행이 중단될 게 분명하다고. 열차 고치러 갔다가 내가 수리당하게 생겼구만.

“원래라면 이런 걱정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찬이잖아?”

“제가 뭔 고유명사예요?”

“찬이한테는 마법을 지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지우지 않는 일이 훨씬 더 힘들 거란 얘기야. 그러니까, 오늘 밤은 이 젤리들로 연습하는 걸로.”

수박 젤리에 걸린 세 가지 마법 중 원하는 것만 골라 지워봐라, 이 말 같다. 점장이 계산대에 올려놓은 젤리를 집어, 점장과 똑같이 해보았다.

곧바로 마법이 죄다 풀려버린 건지, 계산대에 닿자마자 통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 올라서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바라보던 점장이 날 올려다보고는 덧붙여 왔다.

“찬이도 무의식적으로는 이걸 어느 정도 해오고 있을 거야. 당장 집에 갈 때만 해도, 찬이가 이걸 할 수 없었으면 집에 갈 수 없었을 테니까.”

근무 첫날 퇴근할 때에 들었던 얘기였다. 머릿속으로 내 집을 이미지하고, 집에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체질이 그 이미지와 의지에 그에 맞춰줄 거라고.

그것만은 쉽게 해낼 수 있었다. 난 내 집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수박 젤리를 좋아하고 수박 젤리의 탄력 있는 맛을 살리고 싶냐, 이건 잘 모르겠다. 애초에 이거 먹어본 적도 없고. 이거 신상품인가?

“마법을 쓰는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겠지만. 이것 말고는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네….”

“이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뭘.”

통에 담긴 젤리가 어림잡아 100개가 훨씬 넘는다.

점장 말대로라면, 점장이 저 젤리들을 하나하나 부여잡고 죄다 마법을 걸어댔단 소리였다. 그게 얼마나 걸렸을까. 6시간? 한나절?

이렇게까지 해준 마당에 이젠 잘 안돼서 못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점장 얼굴 봐서라도 어떻게든 해야지.

“말은 쉽게 했지만, 솔직히 어려운 일이 맞아. 연차 쌓인 반마법사분들도 가끔 실수하는 부분이거든. 그러니까… 어….”

“예.”

“힘내.”

그럴 생각이다. 힘낸다고 될 일인진 모르겠지만 말야.

힘낸다고 될 일인진 모르겠지만 말야.

이후 간단히 인수인계 사항을 건네받고, 점장은 퇴근. 도중에 궁금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전화하라 했지만, 이틀 날밤을 새운 점장한테 구태여 전화를 하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내 체질이다. 그러니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것도 나고, 내가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후, 수박 젤리를 다시 하나 꺼내 계산대에 툭 떨어트려 봤다. 아주 잘 굴러갔다.

착잡한 심정으로 만졌던 수박 젤리를 먹어도 보고, 지압구슬처럼 손바닥에 끼워 굴려도 봤으나, 당연히 소용없었다.

아예 매장 음악도 꺼버리고 집중을 해보려 했는데, 그러려고 할 때면 꼭 손님이 들어와서 뭘 하질 못하겠더라. 편의점에서 자격증 공부하는 편돌이들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짓거리를 11시까지 하며 젤리 20개가량을 허무하게 날려 먹었지만, 딱히 뭔가가 나아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사장님.”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하던 와중, 노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느라 손님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서 오세요, 손….”

벌떡 일어나려다 도중에 멈췄다. 손님 인상착의가 전에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검은 양복에 신사모, 상처가 난 손등.

“더 블루 한 갑 부탁드리겠습니다.”

전에 와서 오크들 강냉이를 털어버리셨던 그 대리기사 어르신인 듯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원 블루 달라고 하는 걸 들으니 바로 확신이 생겼다.

“울프 어르신, 오랜만에 오셨네요.”

묻자, 어르신이 약간 눈을 크게 뜨고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잠시 후 인자한 웃음을 띠어왔다.

“사장님께서 절 아직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 인생의 장르가 바뀔 뻔한 순간을 어떻게 잊겠는가. 그때 가신다 했던 게 마지막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자주 오실 것처럼 말하더니만.

“최근엔 다른 데서 일하셨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 보니, 동료들이 이곳저곳을 다녀보라고 권해주었지요. 덕분에 제법 견문이 넓어지긴 했습니다만….”

더해서 견문이며 동료며, 아무리 들어도 현직 대리기사가 쓸만한 어휘도 아닌 것 같고 말야.

“그래도, 교통편이 불편해서 자주 다니진 못하겠더군요. 사장님께서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다,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며칠 전에 저 문짝 한 번 더 박살 났어요.”

“…아, 저런.”

곧바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온다. 출입 명부에 거주지와 연락처를 적고, 피로회복제 병을 들고 테이블로 가서는 자리에 앉는 어르신.

이후 20분 정도는 손님이 오지 않았다.

수박 젤리라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집중이 안 되더라고. 쓸만한 방법을 떠올려 보려 해도 머리만 아프고.

어르신도 자리에 앉아계시던 중 한번은 밖으로 나가셨는데, 콜 받으셨겠구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더니 30초 만에 곧바로 돌아오셨다.

“택시인 줄 알고 불렀다 하더군요.”

내 표정이 어리둥절해 보였는지, 넌지시 말해주셨다. 택시랑 대리운전 전화번호를 왜 헷갈리는 건지 모르겠네….

이 직후 대리기사 어르신을 뒤따라 손님이 하나 들어왔, 뭐야. 저거 인간인가?

“어흐흑….”

근데 왜 울어?

이 손님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설녀라는 두 글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늘색에, 긴 생머리. 전체적으로 하얗다는 인상이었으나, 아침에 놀러 오는 용 꼬마만큼 새하얗진 않았다. 걔가 흰색 분필이라면, 이 손님은 하늘색 분필쯤 된다.

난 저게 구전되는 전설에나 나올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 보이니까 마땅히 이거 말고는 표현할 말이 없더라. 게다가 당장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던 게….

“으흑, 으흐흑….”

이 설녀가, 들어온 직후부터 물건을 골라온 직후까지도 눈물을 내내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계산을 하는 순간까지도.

“크흑… 우윽, 우으으….”

“…저, 손님….”

우는 건 좋은데, 계산부터 좀 하고 울면 안 되냐…?

*2022.10.31. 수정사항

초반부 신분증 관련 내용 추가 및 실기시험 일자가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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