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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편돌이-53화 (54/201)

53화. 편돌이, 때때로 이찬 (1)

오랜만이긴 하다. 월요일에 본 게 마지막이고 오늘이 토요일이니 딱 5일 지났네.

인사를 받아주려 했는데, 계산대 위로 빼꼼 내민 얼굴에 근심걱정이 가득 들어있었다. 바로 물었다.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그게, 제가 아니라여, 아조씨가….”

“나 뭐?”

“며칠 없으셨자나여. 걱정돼 갖구.”

자격증 때문에 이틀 출근 안 했을 때도 꼬박꼬박 찾아왔었나 보다. 이건 이해가 됐는데, 내가 걱정됐다는 말이 잘 이해가 안 됐다. 걱정될 게 뭐가 있….

아니지. 뭔지 알 것 같다.

“걱정할 일 없었어, 꼬마야. 그 살쾡이 코볼트나 지갑 때문에 안 나왔던 거 아냐.”

헤어지기 직전에 보고 간 광경이 도둑놈 멱살 붙잡고 실랑이하는 거였고, 그 직후 이틀 모습을 못 봤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정말여?”

“어. 개인적인 일 때문에 잠깐 쉬다 온 거야. 그리고….”

아예 아는 걸 다 말해줬다. 경찰이 사건 맡아줬고, 코볼트도 자수했으니 다른 누군가가 찾아오지도 않을 거고, 해코지당할 일도 없을 거라고. 이 녀석 덕분에 잡았던 거니, 이 녀석도 알 건 알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였다.

물론 사건이나 자수, 해코지 같은 단어를 이 녀석이 알아들을 리가 없었기에, 요약해서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경찰이 착하게 만들어 줬어. 그 도둑.”

“착하개여? 어케?”

“글쎄, 그건 말 안 해주더라고. 아무튼… 별일 없을 거야. 너도, 나도.”

“다행이애여.”

이것마저 듣고 나서야 낯빛이 밝아졌다. 생글생글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다, 잠시 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물었다.

“아조씨, 엄청 졸려 보여여.”

“그렇게 보이냐?”

“내.”

듣고 나서 거울을 슬쩍 보니, 평소 이맘때에 비해 다크서클이 훨씬 더 짙기는 했다. 몇 시간 내리 한 고민만 붙잡고 끙끙댄 탓인가보다.

심지어는 아직도 못 끝냈고. 고민은 나누면 반이 된다지만, 구태여 이 꼬마에게 내 고민의 반을 쥐여주고 싶진 않았다. 당장 더 급한 일이 있기도 했고.

“네가 내 걱정할 상황은 아니지 않냐, 꼬마야?”

“엣, 왜여?”

“내일 어버이날이잖어.”

말하며 계산대 밑에서 도화지를 꺼내 올려놓으니, 꼬마가 꼬리를 쭈뼛 세우고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앗, 마자여. 엄마야 드릴 선물 만들어야 대….”

“크레파스는 가져왔어?”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책가방을 벗어 뒤적이고는 노란색 케이스의 24색 크레파스를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허나, 걱정 그득한 얼굴이었다.

“그래두 아조씨, 진짜루 졸려 보이는대….”

“이따가 집 가서 자면 되니까, 걱정 말어.”

내 앞가림도 급급한 판에 이 녀석 선물 만드는 걸 도와주는 게 맞는 짓인진 모르겠지만, 당장은 계속 머리 굴린다고 뭐가 더 떠오를 것 같지도 않다. 차라리 이 녀석 선물 만드는 거 도와주다 보면 뇌도 식고, 좀 창의적인 발상도 떠오르고 그러지 않을까?

다 떠나서 나도 이젠 이거 완성본을 좀 보고 싶다. 2주 전부터 만들기 시작한 걸 아직까지도 못 만들고 있잖아….

하여, 도화지가 계산대 위에 펼쳐졌다.

꽃 모양으로 오려진 색종이들이 군데군데 붙어있고, 이것만으로도 완성본에 가깝게 보이긴 했다. 이제 이 꼬마의 동심만 덧칠해 주면 끝이다.

“머부터 그릴까여?”

“그려야 될 것들. 일단… 꽃이 피었으니까, 들판일 거잖냐?”

“내.”

“그럼 들판 그려야 될 거고, 하늘도 그려야 될 거고.”

처음에 상상한 건 컴퓨터 기본 배경화면이었으나, 그걸 그대로 따라 하기엔 꽃을 붙여놓은 위치들이 좀 높다. 차라리 하늘과 들판으로 반반 나누는 게 적당할 것 같아, 손가락으로 직접 선을 그어줬다.

“이렇게 나누고, 위에는 하늘, 밑에는 들판.”

“내. 들판은 어떤 색이 좋을까여?”

“보통 연두색이지. 풀들이 잘 먹고 잘 자랐으면 진한 초록색이고.”

“노란색은 어떨까여?”

“그렇게 하면 네 어머니께서 가을 들판으로 보실 것 같은데. 아니면 너도 봄보단 가을이 더 좋냐?”

“어… 아녀. 전 봄이 더 좋은대.”

“그럼 연두색이나 초록색 둘 중 하나로 해.”

내 말에 진한 초록색과 연두색 크레파스를 양손에 집어 들고 고민하던 꼬마는, 초록색 크레파스를 내려놓았다. 연두색이 더 밝아서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걸로 들판이 될 부분을 벅벅 칠하게 했고, 오려 붙인 꽃의 테두리 언저리는 내가 직접 칠해줬다.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칠하면 꽃 다 구겨먹을 게 분명하다.

다음은 하늘. 하늘은 무슨 색으로 칠하는가에 대해서 살짝 논쟁이 있긴 했지만, 금방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하늘 칠할 색이 하늘색 말고 뭐가 있겠어.

하늘도 마저 물들인 꼬마는, 만족스러운지 작게 콧김을 흥 내쉬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잘했져?”

“그래. 잘했다.”

“이젠 멀 그릴까여.”

“너 그리고 싶은 거 그려.”

이 녀석이 딥원이나 니알라토텝을 그리진 않겠지. 꼬마는 잠깐 고민하다가, 검은색 크레파스를 집어 양복의 형태로 슥슥 그려대기 시작했다.

양복을 전부 그린 후, 머리 부분에 흰색 크레파스로 원을 긋고는 웃는 얼굴로 채워 넣고 검은색으로 긴 머리카락을 그린 뒤, 머리 부분에 흰색 뿔 두 개.

“저이 엄마에여.”

어머니께서 참 형이상학적으로 생기셨구나, 말하려다 말았다. 근데 이 녀석은 흰 머리에 검은 뿔인데 얘 엄마는 검은 머리에 흰색 뿔이다. 유전자 성질이 쿠앤크인 건지, 염색을 한 건지.

이어서는 흰색 세모꼴의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뭘 그리려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이 편의점 기둥에 붙은 거울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저구….”

빨간 책가방을 앙증맞게 잘 그렸다. 마지막으로는 검은색 크레파스를 집은 채로 날 뚫어져라 바라보길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난 그리지 말고.”

“엣.”

편의점 유니폼이 검은색이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아이랑 어른 여성 그림이 그려져 있으면 당연히 애랑 엄마인 줄 알 거다. 근데 거기에 어른 남성이 더 그려져 있으면 그 어른 남성을 누구라고 생각하겠는가?

적어도 제2자인 얘 엄마는 궁금해 못 버티겠지. 아가, 이 남자 누구야? 유치원 선생님? 아니라고? 그럼 대체 누구니??

“그래두, 그리구 시픈대….”

“꼬마야. 세상일이 항상 네 뜻대로 되는 게 아냐. 그리고, 초상권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다….”

“초상껀?”

“그냥 부끄러워서 그래. 부끄러워서.”

대답하자 이해했다는 듯 고개는 끄덕였으나, 표정엔 이것만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한참을 고민하다, 도화지 왼쪽 위 구석에 검은색 날개 한 쌍의 나비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혹시나 싶어 물어봤다.

“이거 나라고 그린 거냐?”

“내. 나비 이름은… 아조씨 나비.”

“그럼 앞쪽에 수염도 좀 그려줘라. 나비도 더듬이 달려있잖어.”

“물론이져.”

엉겁결에 나비가 되어버렸다. 평생 바닥만 기고 살았는데, 그림 속에서나마 날아보는구만.

그래도 이 나비를 보고 29세 편돌이를 유추해 내는 이종족은 없을 것이다. 괜찮다고 대답하자, 해맑게 웃고는 널브러진 크레파스들을 케이스 안에 고이 집어넣었다.

“다 그렸냐.”

“내.”

도화지를 슬쩍 들어 살펴봤다. 오려 붙인 꽃들도 손볼 곳 없이 잘 붙어있고, 그림들도 2차 창작은 엄두도 못 낼 만큼 훌륭하게 잘 그려져 있다.

처음 도와주기 시작했을 땐 아예 코팅까지 직접 해줄 생각이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애 엄마가 알아서 할 일 같고, 마지막으로 뭘 해줘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 카운터 밑에서 친환경 봉투가 담긴 박스를 꺼내 안의 봉투를 다 털어냈다. 넓은 박스 안에 도화지를 살짝 오므려, 구겨지지 않도록 집어넣은 후 박스 입구 쪽을 닫아 건넸다.

“이대로 들고 가면 그림 번지거나 구겨지진 않을 거 같다. 그리고….”

“그리구?”

“내일이 어버이날이니까 내일까진 잘 숨기기도 해야 할 거고. 비밀선물이잖아.”

“마자여. 이거, 비밀선물이야.”

자기 몸통만 한 박스를 품에 끌어안고는, 활짝 웃으며 내게 물어왔다.

“엄마야가 좋아하시겠져?”

“이거 안 받고 좋아하면 사람이 아니지.”

“내? 엄마야, 드래곤인대여?”

“그래, 드래곤이 아니다. 뭐 어쨌든….”

2주간 질질 끌었던 게 드디어 완성이 됐다. 후련한 마음에 내뱉었다.

“다 만들긴 했다. 그치?”

“…아.”

꼬마도 후련해하라고 한 말이었는데, 들은 직후엔 오히려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어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날 바라보다, 머리를 푹 숙이고는 중얼거렸다.

“그렇내여… 다 만드럿내….”

이 꼬마가 7살치고 지나치게 사려가 깊다는 건 알고 있다. 지금 경우엔 ‘어버이날 선물 다 만들었으니까, 이젠 뭐 하러 오지….’ 이런 생각 하고 있는 거겠지.

바로 덧붙였다.

“이건 다 만들었고, 이젠 뭐 할까.”

“내?”

“이것저것 있을 거 아니냐. 유치원 숙제든, 뭐든.”

“숙째 있서여. 그치만….”

박스를 내려놓은 후, 가방에서 두 번 접힌 A4 용지를 꺼내서는 양손에 꼭 쥔다. 그러면서 날 올려다보는 표정이, 엄청 죄송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왜. 또 돈 없다, 이런 소리 하려고 그러냐?”

“우으….”

정곡을 찔렸는지 아무 말을 못 한다. 이 꼬맹이 안심시킬 만한 말이 뭐가 있을까….

“…며칠 전에 도둑 잡았잖어, 꼬마야.”

“내.”

“그때 그 도둑이 훔치려고 했던 게 5만 원어치쯤 되는데, 너 5만 원이 얼마나 큰 돈인 줄 아냐?”

“에… 저어가, 하루 용돈이 500원이니까는….”

“꼬박 100일을 넘게 모아야 5만 원이 된다고. 너 아니었으면 정말 도둑맞았을 거고….”

“헉, 큰일 날 뻔했내여.”

“네가 100일어치 도와줬으니 나도 100일어치 도와주겠다는 거고. 그게 맞지 않나?”

“그른가…?”

이 녀석이 ‘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고 가겠다면 난 전혀 신경 안 쓸 거다.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질 않아서 그렇지.

29살 고졸 편돌이 놈의 어디가 좋다고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지가 있고 싶다 하면 있게 해줘야지. 7살 때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정말루 도와주실 수 있나여?”

“일단 보고 나서 생각하자. 어떤 숙제길래 그러냐?”

“그개… 저어는 어려워갖구….”

A4 용지를 펼쳐 맨 윗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한 자 한 자를 또렷한 발음으로 읽어내린다.

“나에… 꿈은… 무엇일까여. 무름표.”

“꿈이 뭐냐고?”

“내. 꿈.”

이게 뭐가 어렵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나, 아리송하다는 듯이 덧붙이는 걸 듣고 나서는 바로 이해가 됐다.

“근대, 꿈은 자야지 꾸는 거자나여.”

“보통은 그렇지.”

“그럼여, 자면서 숙째를 해야대는 거 아닌가?”

“…잠깐 종이 좀 줘봐라, 꼬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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